71 화
멜에게 반지를 줘야겠다.
망가진 싸구려 팔찌를 고쳐 주는 게 아니라, 반지를.
생각 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건넸던 약속들이 내게로 돌아왔다.
지킬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안심시키기 위해 내뱉었던 기만적인 말들이 전부 나의 족쇄가 되었다.
내게만 돌아온 업보였다면 기꺼이 감내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멜에게 했던 약속들이 그를 내 곁에 묶어 두고 있었다.
아무 죄 없는 타인들까지 고통을 받고 있었다.
“세르베인!”
나를 흔들어 깨우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놀란 얼굴을 한 미나엘이 내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흐릿하게 보이던 미나엘의 얼굴이 뚜렷해졌다. 곧 다시 흐려지길 반복했다.
나는 내가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울지 마라. 내가 무서워서 그런다면 다신 네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
“아니,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나는 서둘러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미나엘은 이미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내가 어떻게 그들을 무서워할 수 있겠는가.
나 때문에 미나엘은 죽지 못했고, 멜도 바다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 탓에 망가진 이들을 내가 어떻게 무서워하고, 피할 수 있겠는가.
“미안해, 블미에. 잠깐이라도 널 무서워해서 미안해.”
내게서 멀어지려던 블미에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어찌할 줄을 몰라 허공을 맴도는 그녀의 팔이 느껴졌다.
“나 때문이었어. 네가 마녀로 몰려 고통받던 것도, 죽지 못했던 것도, 다 나 때문이었어.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너를 무서워해.”
“…….”
“미안하고 고마워. 지금까지 네가 몇 번이나 내 목숨을 구해 줬단 걸 알아.”
모든 걸 되돌려 놓을 것이다.
나로 인해 망가졌던 삶을 전부 본래 행복해졌어야 하는 삶으로 돌려놓을 것이다.
“널 다시 만날 수 있어서 기뻐. 널 지금이라도 내가 구해 냈다는 것에 감사해.”
이제 블미에가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마치 멜을 다시 만났을 때와 같았다.
멜을 처음 저택에서 마주했을 때는 두려웠지만 지금의 그는 내게 조금도 무서운 존재가 아니듯이.
“……나도.”
그녀는 내게 조금도 고마워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나 때문에 죽음을 맞이하지도 못하고 마녀로 몰려 고통스럽게 살아야 했으니까.
그런데도 멍청할 정도로 착한 블미에는 나를 용서하고 말았다.
“나도 너를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쁘구나.”
* * *
나 때문에 블미에는 그 긴 세월 동안 홀로 살아가며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일 잠입을 위해 억지로 눈을 붙이면서도 내내 그 생각이 맴돌았다.
‘그런데 라헨은 약속을 지킬 때까지 노화가 진행됐는데 블미에는 어째서 그대로지?’
순간 의문이 들었지만 블미에를 더 추궁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다음 날 아침이 밝아 왔다.
“무턱대고 급여가 높아서 왔다면 후회할 거야.”
나와 블미에, 그러니까 미나엘을 가르치던 선배 직원이 말했다.
“여긴 높으신 분들이 주로 오는 곳이야. 절대 거슬리는 짓을 해서도, 그분들의 대화를 기억해서도 안 돼.”
“당연하죠. 그 정도 각오는 얼마든지 했답니다.”
나는 서글서글한 인격을 흉내 냈다.
긴 세월 동안 살아 본 결과, 남의 밑에서 일할 때는 잘 웃는 것이 최고였다.
“그나저나 선배님은 대단하세요. 여기서 오래 일하셨다니.”
“흠흠, 뭐. 별거 아니지. 아무튼 마음이 조마조마한 것만 견디면 돈은 많이 벌 수 있을 테니 열심히 해봐.”
“네. 감사합니다.”
타인과의 교류가 어색한 미나엘을 대신해 내가 아부를 퍼부으며 우리의 평판을 신경 썼다.
고급 살롱이었기에 아랫것들은 대화조차 나누면 안 되는 분위기가 주류였다.
그러니 유일하게 우리와 교류를 할 수 있는 상급자인 그녀와 친하게 지내야 했다.
“괜히 윗사람들 눈에 찍혀서 좋을 것 없어. 그러니 너네는 창고에서 일해.”
문제는 그게 잘못된 방식으로 돌아왔다는 것이지만…….
우리는 창고에 덩그러니 남았다.
시즌마다 바뀌어 잠시 사용하지 않는 가구를 닦는 게 우리의 일이었다.
“아무래도 네가 다폴샤에게 너무 잘 보인 것 같군.”
미나엘이 우리를 가르치던 상급자의 이름을 언급했다.
그 말대로였다. 다폴샤에게 너무 잘 보인 나머지, 귀족들의 눈에 띌 리 없는 안전한 곳에서 일하게 됐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목적과는 어긋나는 거 아닌가. 그러면 이 일을 하는 기간도 늘어날 텐데.”
이런 허드렛일을 하는 게 끔찍한지 미나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표정은 없었지만 곤란하다는 기색이 보였다.
“그러게……. 나도 이럴 줄은 몰랐지.”
벅벅, 조용한 창고에서 가구를 닦는 소리만 들렸다.
* * *
비록 귀족들이 나누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지만 수확은 있었다.
창고를 전전하며 다니다 보니, 오히려 같은 직원들이라도 잘 모르는 구석진 장소에 대한 지리도 익힌 것이었다.
“하지만 그걸로는 한계가 있지. 지금이라도 너나 나 둘 중 한 명이 귀족의 신분으로 잠입하는 게 어떤가.”
“그런데 우리 얼굴은 이미 직원들이 기억할 텐데.”
“…….”
결국 일을 그만두고, 몰래 이곳에 숨어들어 오는 수밖에 없나.
진지하게 고민하며 나는 허드렛일을 계속했다.
그 기간이 2주를 넘었을 때 우리는 새로운 일을 부여받았다.
“생각보다 조용하고 일을 잘하더군. 그 정도라면 꽤 사람들의 눈이 있는 곳에서 일해도 되겠어.”
다폴샤는 앞으로 맡을 일이 귀족에게 잘못 걸리면 골치 아프지만, 설설 긴다면 높은 돈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미나엘은 보통 귀족들이 사용한다는 살롱으로 가게 됐다.
‘나도 저기로 가겠지.’
드디어 잠입다운 일을 한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한숨을 내쉴 때, 다폴샤가 내게 어깨동무를 했다.
미나엘을 보내고, 나와 단둘이 남자 그녀가 내 귀에 속삭였다.
“얘. 너 돈이 필요하다고 했지.”
“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다.
나는 울상을 지으며 애처로운 척 말했다.
“아주 많이 필요해요.”
“쯧.”
내 말에 다폴샤는 대충 사정을 어림짐작하고는 딱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녀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네 친구랑 같은 일을 줄까 생각했는데…… 어쩔 수 없지.”
“…….”
“네가 앞으로 일할 곳에서는 절대 고개를 들어서 사람을 보지도, 소리를 듣고 반응해서도 안 돼. 원래 시각 장애인이나 청각 장애인만 쓰는 곳인데…… 넌 청각 장애인인 것으로 하자.”
‘어쩐지 지금까지는 퍽 멀쩡해 보이더라니.’
과거 프로셴을 구하기 위해 잠입했던 귀족들의 클럽은 만만치 않게 지저분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프로셴이 왕이 되며 사라졌다.
그 후 새로 생긴 이곳은 그곳과 다르게 꽤 건전하고 교양 있게 운영되는 것 같아서 의아하던 참이었다.
‘하긴. 건전하고 교양 있는 곳이라면 애초에 프로셴이 잠입해서 정보를 빼내지도 않았겠지.’
왕이 되기 전, 사교 클럽에서 일했던 기억 때문에 프로셴은 개인적으로 귀족들이 4인 이상 모여 있기만 해도 치를 떨었다.
“걔들은 모여 있으면 누구 하나 무덤에 묻을 궁리나 하는 종자들이라니까?!”
즈레이카 왕국에는 법전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다. 왕이나 교황의 말이 곧 법이니까.
물론 사람들은 죄인을 저마다의 방식대로 처리하곤 했다.
하지만 죄인을 어떻게 벌할지에 관한 명확한 기준이 없었다.
정말 심각한 사안은 왕의 귀에 닿았고, 그때 내려지는 처벌은 왕의 말이 곧 법이었다.
“세르베인. 성문법을 만들 거라고 했지? 그러면 귀족들한테 사교 활동 금지를 내리는 게 어때?”
초롱초롱한 눈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던 프로셴이 떠올랐다.
그때는 왕위에 앉자마자 끌어내려지고 싶은 거냐고 타박을 줬지만 사실 속내는 달랐다.
‘그거 꽤 괜찮은 생각일지도…….’
“네가 어디서 일해야 하는지 알려 줄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다폴샤는 나를 데리고 어딘가로 향했다.
* * *
프로셴은 세르베인의 부탁대로 멜의 곁을 지켰다.
사실 정말로 지킨 건 아니고…… 일하라고 독촉하는 신하들을 피해 그쪽으로 대피했다.
인어는 며칠째 눈을 뜨지 않았다. 덕분에 프로셴은 맘 편히 이쪽으로 대피해, 휴식을 즐길 수 있었다.
‘사실 책을 읽어야 하니 휴식도 아니긴 해.’
프로셴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미나엘과 세르베인이 공부하라고 주고 간 책을 펼쳤다.
벌써 둘이 떠난 지 며칠이 지났다. 그리고 책은…… 여전히 10페이지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
“솔직히 알아먹을 수가 있어야지…….”
역사의 흐름에 따라 법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
다른 왕국의 내부 정치 상황과 관련된 성문법과 불문법의 조직 과정이 어떠했는지.
뭐 그런 걸 모아 둔 끔찍하게 두꺼운 책이었다.
“왕이 왜 왕이겠어. 능력 있는 신하를 부려 먹어도 되니 왕이지.”
깔끔하게 결론을 내리고 프로셴은 미련 없이 책을 닫았다.
아무래도 재능 없는 분야에 매달리기보다는, 자기가 나름대로 자신 있는 ‘인재 찾기’나 해야 할 성싶었다.
“이 남자가 끝까지 저택을 못 나왔다면 참 마음에 들었을 텐데.”
프로셴은 혀를 차며 눈을 감은 멜을 바라봤다.
* * *
프로셴이 처음 옛 녹시렐 공작 저택에 들어선 날이었다.
시든 잔디와 억세게 엉킨 덤불을 짓밟으며 프로셴은 거만하게 걸음을 옮겼다.
두려워할 건 없었다. 의외로 프로셴은 저택의 음침한 외관에 겁을 먹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저택 안에 존재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제압할 수 있을 만큼의 병력을 가져왔으니까.
“하여간. 사람 안심시키려고 어설픈 거짓말을 지어낸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