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 화 (67/132)

67 화

의례상의 미소를 지은 후 뺨에 댔던 손을 내렸다. 자연스럽게 멜을 스쳐 지나갈 속셈이었다.

그러자 멜이 당황하며 내 손목을 잡았다.

“세르베인!”

“왜?”

“그…… 배고프지 않아?”

누가 봐도 나를 붙잡기 위한 변명거리였다.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멜은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리며 어설픈 화젯거리를 만들어 냈다.

“내가 요리를 해줄게. 넌 갈아 만든 음식을 좋아했잖아. 여기는 재료가 많을 테니 나 더 잘 만들 수 있어.”

“…….”

“아니면 책 읽을래? 아니면 정원으로 갈까? 못 걷겠다면 내가 널 안고 걸으면 돼.”

멜은 내 손을 두 손으로 잡은 채 꼼지락거렸다.

그 꼬물거리는 조그마한 움직임에 손가락 마디마다 입 맞추고 싶었다.

참 웃기지. 나를 죽였던 무감각한 얼굴을 기억한다.

호수에 빠진 나를 보며 환희했던 네 얼굴을 기억한다.

아무리 네 이름을 불러도 닿지 못했던 네 마음속 벽을 확인했다.

그런데도 넌 왜 여전히 사랑스러운 걸까.

그래서 나는 기억이 없는 와중에도 너를 만나기 위해 부득불 녹시렐 저택으로 향했던 걸까.

하지만 이제는 너를 놓아줄 때가 되었다. 내가 다시 태어난 게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러니 이제 네 손에 키스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미안해. 내가 지금 바빠.”

“어?”

“말했잖아. 수도로 오면 내가 바쁠 거라고.”

“하지만……!”

멜이 무슨 말을 할지 뻔히 알았다.

‘하지만 나를 혼자 두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대충 그런 말을 하겠지.

난 그에게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참 많이 해버렸다.

‘하지만 이미 거짓말을 한 게 너무 많으니 이 정도는 괜찮지? 그렇잖아. 내가 네게 했던 최초의 약속만 지켜 주면 되는 거잖아.’

정신이 조각조각 나는 기분이 들었다. 초점이 사라진 채 그가 잡은 내 손목만 바라봤다.

그 순간 뜻밖에도 다른 대답이 들려왔다.

“……알겠어.”

멜은 내게 무언가를 더 요구하지 않았다.

부드럽게 내 손목을 쥐었던 손을 놓았다. 그 기분이 끔찍했다.

“대신 한가해지면 바로 와줘야 해? 나 계속 기다릴게.”

그 말은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듣는 순간, 발작적으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기다리지 마. 여태껏 기다렸으면서 왜 또 나를 기다리겠다고 말해?”

기다리는 시간이 끔찍해서 정신조차 무너졌으면서. 그는 어떻게 다시 기다린다는 말을 내뱉을 수 있는 걸까.

“너를 이해할 수가 없어. 사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지.”

까끌까끌하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사고가 제멋대로 달려 나가며 말이 이상하게 치달았다.

“내가 너한테 한 짓을 생각해. 날 사랑한다고? 그게 말이 돼? 네가 기다리면서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데 또 기다리겠다는 말이 어떻게 나와? 그렇게나 바다로 가고 싶어 했으면서 왜 이제는 가고 싶지 않다고 해? 도대체 너를 이해할 수가 없어!”

“…….”

생각나는 대로 말해 버렸다.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었는데.

제멋대로 소리 질러 놓고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혹시나 그의 정신이 다시 불안해졌을까 봐.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서 한 말이지만, 혹시 이 말이 멜에게는 상처일까 봐.

“기억……났어?”

곧 숨이 넘어갈 듯, 신음처럼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멜은 끔찍한 광경을 목도하고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듯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전부 다…… 떠오른 거야……?”

멜이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 짐작 가능했다.

그가 나를 죽였던 때의 기억이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나는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래.”

이렇게 된 것,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멜은 제 발로 바다로 가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을 떼어 버리는 게 좋다.

“네가 나를 죽였잖아.”

비수로 꽂힐 말임을 알면서도 무신경하게 말했다.

분명 그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마음과 정반대의 말이 나왔다.

“나를 죽인 사람을 어떻게 좋아하겠어. 난 널 보고 싶지 않아.”

“아아아악!”

그 순간 멜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생각했던 반응보다 너무 격렬한 거부 반응에 놀라서 그를 내려다봤다.

“아니야! 그건 꿈이었어!! 꿈이었단 말이야!”

그 행동을 할 때 멜이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의 본성이 얼마나 여리고 사랑스러운데. 그는 절대로 누군가를 웃는 낯으로 사지에 몰아붙일 존재가 아니었다.

꿈인 줄 알았기에 충동적으로 저지른 잔인한 짓이었거나, 혹은 사람이 물에 빠지면 죽는다는 것도 몰랐거나.

“꿈…….”

사실은 꿈이었다고, 혹은 네가 그때 불안정해서 그랬다는 걸 아니까 이해한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나를 죽인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마음이 그렇게 흘러 버렸다.

그런 너라도 사랑하니까.

‘그런데 그러면 네가 바다로 돌아갈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멜이 바다로 가지 않겠다고, 내 곁에 있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이유가 무엇일지.

‘사랑 때문이라는 건 안 믿어. 그러니까…… 너는 죄책감 때문에 내 곁에 있겠다고 하는 거야. 내가 너를 좋아했으니까.’

그렇다면 내가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멜은 바다로 돌아갈 것이다.

그의 죄책감만 해소되면 되는 거다. 그리 결론 내리고 입을 열었다.

“꿈 아니야. 그게 사실인 건 너도 알잖아.”

“……세르베인.”

멜이 고개를 들었다. 그 탓에 막연히 울고 있을 것이라 짐작만 했던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멜의 눈동자는 나를 호수에 빠뜨렸을 때처럼 빛이 사라져 있었다.

생명을 잃고 물고기 한 마리 살지 않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던 녹시렐 저택의 호수가 생각났다.

나는 이제 그가 이성을 잃으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그는 내 다리를 끌어안았다. 내 손을 제 입가로 가져가 입 맞췄다.

“기다릴게. 나…… 얌전히 기다릴게.”

“…….”

“내가 다리가 생겨서 싫은 거지? 내가 바다로 돌아가면 다시 네 기억 속의 모습이 될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서 그러는 거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속삭이며 어딘지 섬뜩해 보이는 얼굴로 멜이 웃었다.

초점이 어긋나고, 미소조차 뒤틀려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멜이 내 다리에 뺨을 부비며 말했다.

“그러면 나 노력할게.”

그 말을 끝으로 멜이 쓰러졌다.

차가운 바닥에 그의 상체가 고꾸라지기 전에 서둘러 그를 안았다.

그의 몸이 간헐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보니, 그를 끌어안고 있는 내 팔이 떨리고 있는 것이었다.

초점 없는 시선이 그 아름다운 얼굴을 향해 쏟아졌다.

들끓는 소유욕을 억지로 제어했다. 나는 또 잘못된 선택을 해서는 안 된다.

“내, 가 잘한 게…… 맞을까?”

제발 누군가가 내게 확신을 주길 바랐다.

혹은 내게 어떻게 해야 멜이 스스로 바다로 돌아갈 것이라고 알려 주길 바랐다.

“아니야. 괜찮아. 이래야 네가 바다로 갈 거야. 다른 선택지는 떠오르는 게 없었잖아. 괜찮아, 괜찮아…….”

“……”

“넌 바다로 돌아가면 다 괜찮아질 거야. 바다가…….”

“……”

“바다가 그랬……나?”

울음기가 섞인 형편없는 발음으로 그에게 속삭였다.

바다가 내게 그런 확신을 줬던가?

불안한 질문 따위는 속으로 다 삼켜 버렸다.

하지만 그것 외에도 끊임없이 내 귓가에 재생되는 불길한 징조는 수도 없이 많았다.

너, 도대체 무슨 노력을 하겠다는 거야?

왜 그런 말을 했어?

어째서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말았던 거야?

이전에도 그가 저택에서 내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이젠 꼬리 대신 다리가 있어서 싫냐고.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난 너를 알고 싶어…….”

힘없이 쓰러진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마침내 생각하던 것을 내뱉고야 말았다.

“널 만나지 않는 편이 좋았어.”

어차피 끔찍하게 죽을 인생이었는데, 사랑을 알고 모르는 것 따위가 뭐가 중요해.

그냥 만나지 않았다면 너는 행복했을 텐데 말이야.

“널 죽이면 너도 다시 태어날까? 너도 기억을 잃을까? 너를 죽이고 호수에 빠트리면 그렇게 되는 거야? 그러면 너, 행복해질 텐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지만 멜은 대답이 없었다.

여기서 누군가가 ‘응.’이라고 수긍하기만 하면 곧장 멜의 목을 조를지도 모른다.

덜덜.

하지만 이렇게 사랑스러운 너를 어떻게 죽이겠어.

나는 조심스레 그를 바닥에 눕히고 일어섰다. 소매로 눈물을 닦아 내고 표정을 지워 냈다.

저벅저벅.

복도를 지나자 하녀들이 보였다. 나는 평온한 척 그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복도에…… 남자가 쓰러져 있어. 그를 방으로 옮겨 줘.”

“예, 공작님.”

아직 공작 지위도 받지 않았는데 성의 사용인들은 나를 그렇게 불렀다.

나는 내 발로 다시 기어들어 와버린 녹시렐의 이름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하녀들이 바삐 내가 말한 복도로 향하는 게 보였다.

그 뒷모습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다가 무언가를 깨닫고 덧붙였다.

“……아. 잠시 멈춰줄래?”

상냥한 목소리를 지어냈다. 미친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미친 사람으로 보일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눈은 가리고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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