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화
나는 프로셴이 미나엘을 세상에 다시 없을 냉혈한으로 만들어 가는 게 거슬려서 반박했다.
“그럴 수도 있지. 미나엘은 교황이 굉장히 싫을 테니까. 그녀가 마녀사냥 때문에 죽을 뻔했다는 걸 생각하면 마땅한 복수라고 생각해.”
내 말에 프로셴은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꽤 떨떠름한 기색으로 말해왔다.
“그래? 네 계획을 어그러뜨렸다는 점에서 네가 미나엘을 싫어하게 될 줄 알았는데.”
전부터 생각했는데, 프로셴은 나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안 그런 것처럼 보였다.
그는 왕궁에서 거의 가장 좋은 방을 내게 줬다. 하지만 내가 배신할까 봐 작위 수여식을 늦추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 꺼낸 대답도 그랬다.
보통 자신이 호의를 품은 사람이라면 좋게 평가하기 나름이다.
하지만 프로셴은 나를 피도 눈물도 없이 제 계획과 이익만을 중시하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게 뭐 그렇게나 크게 계획을 망친 거라고…….”
“엄청난 거지. 너는 교황을 일부러 살려 놔서 나를 살아 있는 내내 견제하려고 했잖아.”
멈칫.
나는 억지로 고개를 돌려 프로셴을 바라봤다.
그가 이것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프로셴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귀족들을 제멋대로 숙청한 것도 네가 싫어할 줄 알았어. 그렇게 하면 왕권이 강해지는데, 그건 네 의도에서 벗어나는 거잖아.”
나는 프로셴이 지금 분노를 억누르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내내 나의 허수아비 신세를 했으면서 제 신세에 불만조차 품지 않았던 그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것까지도 알고 있었어?”
프로셴은 말없이 빙긋 웃고 말았다.
나는 그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저 백치 같은 웃음 때문에.
* * *
나는 프로셴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귀족들의 사교 클럽. 왕의 핏줄을 찾아 잠입한 곳에서 발견했던 아름다운 남자.
프로셴은 바보같이 웃으며 그곳에서 귀족의 비위를 맞춰 주고 있었다.
대충 맞장구쳐 주고, 그들이 바라는 대로 멍청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 대가로 귀족들이 내던지는 돈과 보석들을 주워 생계를 유지했다.
‘멍청하니 왕위에 올려 두고 내 뜻대로 움직이기 좋을 것 같네.’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으니 수준 높은 교육을 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미 생존 여부를 확인한 다른 왕의 핏줄들도 있었다. 하지만 프로셴이 가장 무능하고 멍청해 보였기에 나는 그를 선택해 거기서 데리고 나왔다.
하지만 클럽에서 나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눠 본 것만으로 그가 내 생각처럼 멍청한 자가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멸망한 왕조의 후손이라고 하면 내가 기뻐할 줄 알았어?”
프로셴은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되물었다.
설마 당사자인 제가 제 근본을 모를 것 같았냐는 어투였다.
“참 신기해. 피가 귀하다는 이유로 왕위에 오르게 돕겠다는 게 녹시렐의 후예가 결정한 충성이야?”
당신을 왕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말에 프로셴이 보여 준 반응이었다.
그는 내게 조소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때 나는 그가 멍청하지 않다는 것에 아쉬워해야 하는지, 혹은 나와 말이 잘 통한다는 것에 기뻐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착각하지 마. 나는 네게 충성을 바칠 생각 없어.”
“뭐……?”
“네가 멍청해 보이니 내 입맛대로 휘두르기 적합해서 선택했던 거야. 내 기대와는 다르지만, 아무튼 같이 가는 걸로 하지.”
고민은 길지 않았다. 결론은 그를 안고 가자는 것으로 내려졌다.
나는 프로셴과 약속을 맺었다.
“네 말마따나 네 피가 귀하다는 이유로 존중할 생각 없으니 나중에 아쉬워하지나 말렴.”
“누, 누가 너를 따라가겠대?”
“왜 그러지? 너와 나는 바라는 게 같은 것 같은데.”
나도 제정신이 아니지만, 생각해 보면 프로셴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귀족이 신분제를 무너뜨리겠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왕이 왕권을 포기하겠다는 것도 미친 생각이니까.
“나는 왕이 된 너와 왕이 되지 않은 너도 동등하게 취급받는 세상을 만들 거야.”
* * *
그때의 프로셴은 꽤 날카로운 면모가 자주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바보처럼 마냥 밝게 웃는 일이 많아졌다.
왕위도 되찾지 못한 시절인데 뭐가 좋다고 그렇게 웃어 댔는지 모르겠다.
“이제 왕위에 앉았으니 성격을 고친 건가. 하긴. 너도 위치에 걸맞게 행동하는 게 나을 테니까.”
“으응…… 무슨 말이야?”
“갑자기 달라진 네 태도에 대해 말하는 거야.”
“난 평소랑 같은걸.”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뻔한 거짓말을 왜 하냐는 시선으로 바라보니 프로셴이 머쓱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보라색 눈동자는 생각에 잠긴 듯 어두워졌다.
“꼭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닌데.”
“그러면?”
“……네가 유독 멍청하고 해맑은 사람에게 약하단 걸 알아?”
다시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로 돌아온 프로셴이 놀리듯이 말하며 웃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혈압이 올랐지만 억지로 웃는 척했다.
“그래서 나를 효율적으로 부려 먹으려고 그랬던 거라고?”
“뭐. 비슷하지! ……으악!”
나는 그에게 베개를 내던졌고, 프로셴은 다시 불쌍하고 약한 척을 하며 멀어졌다.
고작 일주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동안 가만히 누워만 있던 내 몸은 금세 지쳐 버렸다.
프로셴은 내가 모든 베개를 다 던져 버리고 씩씩거려도 칠렐레팔렐레 웃었다.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이내 그는 밖으로 나갈 듯 문고리를 잡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내 혈육에 대한 건 말인데.”
“아, 잊을 뻔했네. 사교 클럽에서 소식이 시작됐다고 했지? 잠입 일정을 어서 잡아야겠어.”
“아니야. 너는 쉬어. 몸 회복에 힘써야지. 그건 미나엘이랑 내가 알아서 해결할게.”
꽤 이상한 반응이었다. 물론 내가 환자니까 응당 당연히 베풀어야 하는 배려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반응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나 없이 둘이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면 그렇게나 불안한 얼굴을 했던 건 뭔데?’
프로셴이 옛 녹시렐 저택에서 자신의 형제가 존재한다는 말을 했을 때, 그는 굉장히 초조한 얼굴을 했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작위 수여식을 늦추는 이유로 꽤 타당하다고 생각했었다.
‘이제 와서 이렇게나 별것 아닌 일 취급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야 모르겠지만 사실 내게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말마따나 내 몸 상태는 아주 하찮았고, 당장 잠입이나 정보 조사에 뛰어들기에는 꽤 벅찼다.
하지만 내 시선은 문 바깥에 서 있는 남자의 그림자에 머물렀다.
“아니.”
느긋하게 침대에 누워있을 여유가 없다.
침대에서 빠져나와 바닥에 발을 디디며 말을 마저 이었다.
“나도 그 일정에 포함시켜. 사실 몸 상태가 그리 나쁘진 않아.”
내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멜과 단둘이 있어야 하는 시간이 늘어난다.
나는 멜과 함께 있는 시간을 되도록 줄이고 싶었다.
* * *
“세르베인!”
밖으로 나오니 예상대로 멜이 있었다.
그는 내가 들어오라고 말하지 않자 계속 바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일어나도 돼? 이제 괜찮아? 어디 아픈 곳 있으면 말해 줘.”
내가 프로셴에게 저를 바다로 보낼 거라고 한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행동했다.
우리 사이에 아무런 갈등도 없다는 듯이 다정하고 유약한 태도였다.
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멜은 모든 걸 알고 있다.
오히려 모든 걸 잊었던 나와 달리 똑바로 기억하고 있는 건 그였다.
“오랜만이네.”
거리를 둬야겠다고 다짐했는데 무심코 그 말이 튀어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겐 몇십 년 만에 만난 존재니까.
나는 그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영문도 모른 채 멜은 가만히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물기가 어려 생기 있게 반짝이는 눈동자는 내가 호수에 빠진 채 올려다봤던 텅 빈 눈동자와 달랐다.
마치 처음 그를 만났던 때처럼, 내가 병약했던 세르베인 녹시렐일 때 만났던 그와 같았다.
“이젠 네가 괜찮아진 것 같아서 다행이야.”
말하지 못한 말들이 응어리져서, 피의 흐름조차 막아 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쓰게 웃고 말았다.
나는 멜이 당황하든 말든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 봤다.
그의 눈동자를 만질 듯이 손끝을 가져다 대자 멜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속눈썹을 지나 이후에는 손가락 등으로 흰 뺨을 쓸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멜은 가만히 있었다. 다만 불안에 잠식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의미로 한 말이야?”
멜의 눈동자에 비친 내 얼굴을 확인했다. 지쳐서 감정이 사라진 얼굴이 있었다.
버석하게 굳어 버린 입술을 두어 번 깨물어 움직인 다음, 겨우 미소 지었다.
하지만 힘없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나는 익숙하게 거짓말을 지어냈다.
“그때 배에서 네가 내게 화가 났다고 생각했거든.”
“아니야! 그건…… 그건 내가 과민반응한 거야. 넌 당연히 물을 수 있는 거였어. 내가 잘못했어.”
그러고 보니 잘못했다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기억이 없을 때는 그가 왜 내게 사과를 하는지, 왜 죄책감을 느끼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멜은 나를 죽였던 그 일을 기억하는 거다.
“사과하지 마. 안 해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