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 화 (64/132)

64 화

“아.”

그때가 되어서야 객관적으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멍청했다. 다리가 생겼는데도 네가 저택에 남은 이유가 나를 사랑해서일 거라고 생각하다니.

‘너는 내게 복수하고 싶었던 거야.’

지금 멜에게는 누구보다도 가장 증오스러울 존재가 나였다.

어느 날 가문을 멸망시킨 교황파도 아닌, 나를 배신하고 멜을 바다로 옮겨 주지 않은 기사들도 아닌, 오로지 나였다.

“미안해.”

대답해 주지 않는 존재에게 쓰게 웃으며 말했다.

멜은 웃음을 멈추고 의아한 얼굴로 갸웃거렸다.

구구절절 설명해 줘야 옳은 걸까.

나는 널 호수에 버리려고 의도한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었다고.

가문이 망하고 내 목숨이 위태롭던 그 날, 내 안위를 포기하고서 너를 도망치게 하려 했다고.

하지만 거듭된 배신이 내 계획을 망쳤다고.

“……변명해 봤자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 결국 네가 바다로 돌아가지 못한 건 내 탓인데.”

배신에 대비하지 못한 것도 내 탓이었다. 애초에 멜을 일찍 바다에 돌려보내지 않은 내 탓이었다.

그래서 나는 구구절절 나를 위해 해명하는 짓을 그만두기로 했다.

너무 추운 호숫물 때문에 몸의 감각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빨리 호수에서 나가야 살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나가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멜이 바라니까.

“멜. 바다로 가는 길은 알아?”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절박하게 그를 올려다보는데 멜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절망적인 답이었지만, 적어도 내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있다는 건 확인되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호수로 왔던 길 알지……? 갈림길에서 반대쪽으로…… 쭉 걸어가면 바다가 나와.”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보랏빛으로 변해 가는 내 손이 보였다.

나는 부디 멜이 내가 한 말을 기억하길 바라며 웃었다.

“미안해. 나는 네가 바라던 대로 이곳에 있을게……. 그러니까…… 넌 바다로 가.”

그 말을 끝으로 발버둥 치던 움직임을 멈췄다. 내 의지는 아니었고, 몸이 한계에 다다른 것이었다.

그러자마자 내 몸은 훅 물속으로 빠졌다. 폐를 채우는 물의 감각이 끔찍했다.

‘혹시 멜이 나를 구해 주진 않을까?’

절박하게 일렁이는 수면 위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멜의 형체는 미동 없이 이곳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조금은 나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건 결국 자기중심적인 착각이었다. 그리고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애초에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던 고백 자체가 네겐 그저 상황에 휩쓸려서 내뱉었던 실수였으니까.

나는 그걸 알고 있었어. 그런데도 마음이 아프네.

‘하지만 네가 행복하길 바라.’

나는 체념한 채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이제는 네 복수를 이뤘으니 바다로 돌아가.’

* * *

“세르베인!”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눈을 뜬 곳은 온통 새파란 세상이었다.

“세르베인!!”

저 이름은 누구의 이름일까?

공작가의 후계자였던 병약한 세르베인?

혹은 공작가를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세르베인?

호수에서 죽었던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은 없다. 멜도 잊었을 것이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 나는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왜 바닷속인데 숨이 쉬어지지?’

요동치는 파도를 따라 물살이 거세게 이동했다. 하지만 내 몸은 잔잔한 호수에 있는 것처럼 가만히 바닷속에 있었다.

나는 한 번 더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어 보았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도대체 무슨 일이…….’

고개를 드니 커다란 배 그림자가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나풀거리는 남색 곱슬머리. 바닷속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푸른 눈동자.

멜은 먼 곳에 있었지만 나를 한눈에 발견하고 헤엄쳐 왔다.

그 모습을 보자 내가 어째서 바닷속에서 숨을 쉴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묻어버렸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원인을 알 것 같기 때문이었다.

멜, 인어, 바다. 아마 그 중에 이유가 있겠지.

‘나 이 모습을 꿈에서 본 적이 있어.’

몸이 약했던, 세르베인 녹시렐로 지내던 때에 비슷한 꿈을 꿨었다.

나는 멜을 데리고 설원 속에 있었고, 그를 수조에 둘지 혹은 바다로 보낼지 고민했었다.

‘난 결국 너를 바다로 보냈고, 수조에 들어간 건 나였지.’

거꾸로 수조를 뒤집어쓴 채 너를 따라 바다에 뛰어들었다.

나는 끝없이 가라앉았고, 너는 바닥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행복하게 헤엄쳤었다.

‘드디어 진짜로 네가 바다에 있는 모습을 보게 됐네.’

하지만 그의 다리에 시선이 멈췄다.

인어의 꼬리 대신 인간의 다리가 존재했다.

‘다리가 있는 채로 바다에서 살 수는 없는 걸까?’

그런 의문을 갖는 순간, 누군가가 내 머릿속으로 말을 걸어왔다.

계속 바다에서 지내게 된다면 다시 꼬리가 돌아올 거란다.

나는 흠칫 굳어 정신없이 좌우를 살폈다.

멜은 내가 발버둥 치는 것이라 생각했는지 창백하게 질려 비명을 지르는 듯한 얼굴로 다가왔다.

하지만 아무리 주변을 살펴도 내게 말을 걸어온 존재는 찾을 수 없었다.

나의 의문 역시도 눈치챘는지 자애로운 듯 무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바다란다.

그 말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멜이 말했던 가족.

그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가족이 내게 말했다.

내 아이를 바다로 보내 주렴.

마치 인간의 형태를 한 바다가 손으로 내 눈을 감겨 주는 느낌을 받았다.

바다는 눈을 감은 나를 온전히 멜에게 건네며 일렁이듯 속삭였다.

지금은 내가 이 아이를 불러도 오지 않으니 네가 직접 보내 주렴.

약속을 지키라며 나를 호수에 빠트리던 멜.

그 모습은 이미 죽었던 내가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바다가 내게 알려 준 것이었다. 그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단서였다.

“세르베인!”

내가 숨을 쉬지 못한다고 생각한 멜이 내게 입 맞춰 왔다.

이 온도를 알고 있었다.

불타는 숲속에서 너는 나를 살리기 위해 숨을 불어 넣어 주고, 네 몸을 덥혀서 나를 안아 왔었다.

‘네 온도가 서늘해, 멜.’

저택에서 그를 옆에 끼고 누워있을 때와는 달랐다.

단순히 차가운 바닷속에 들어왔기에 몸이 차가워진 게 아니었다.

‘이젠 네가 인간보다 인어에 가까워졌나 봐.’

네가 저택에 갇힌 채 고통스러워했지만, 인간에 가깝던 시절을 바라야 하는 걸까?

‘아니야. 널 바다로 보내기로 했으니, 이게 옳아.’

기억을 찾기 전에 가졌던 욕심을 억눌렀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없다. 실수로 인해 고통받는 건 쉽게 죽는 내가 아닌 너니까.

멜은 거센 물살을 헤치고 바다를 벗어났다.

바다는 그를 놓아주기 싫다는 듯 몇 번 더 물살을 일으켰지만 멜을 막을 수는 없었다.

“눈을 떠, 세르베인!”

그가 나를 끌어안은 채 우는 소리가 들렸지만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 * *

눈을 떴을 때는 왕궁이었다.

프로셴이 왕좌를 되찾은 후 내가 늘 지내던 방이었다.

‘전에는 말도 못하게 사치스러운 방이라고 생각했는데.’

첫 번째의 삶을 떠올리자 이 방이 그렇게나 경악스럽게 느껴지진 않았다.

물론 여전히 녹시렐 공작가의 내 방보다 훨씬 크고 화려한 방이긴 했다.

천장을 크게 채운 몇백 년 전 예술가의 그림.

벽면과 기둥마다 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방.

위로 말려 올라간 흰 커튼 아래로 보이는 커다란 창문.

‘아무리 왕궁이라고 해도 공작가 후계자가 쓰는 방보다 화려한 방이 흔하진 않아.’

이전에는 그저 ‘엄청나게 화려한 방’이라고만 생각했지만 이제는 달랐다.

‘이건 1순위 계승자 정도가 쓸 법한 방이다.’

프로셴은 무작정 ‘좋은 방이니까 세르베인에게 주자!’라고 한 거겠지만 다른 귀족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이런 식이니 나를 향해 무수한 살인 청부가 쏟아진 것이다.

내가 관자놀이를 눌러 댈 때 문이 열리고 하녀가 나를 발견했다.

“깨…….”

그녀는 손 들고 있던 세숫대야를 바닥에 내던지듯 놓고는 달려 나갔다.

“공작님이 깨어나셨습니다!”

꽤 화려한 환영 인사였다.

* * *

프로셴과 미나엘 중 내게 먼저 도착한 이는 미나엘이었다.

그녀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내게 딱딱히 말했다.

“역시 그 인어를 믿는 게 아니었다. 널 두 번이나 익사시킬 뻔했어.”

“글쎄. 익사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 인어가 너를 바다에서 건져줬다고 감싸는 건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네가 바다와 관련되면 이렇게나 수난을 겪는 게 필시 인어 탓이라 예상되는데 말이다.”

“……”

“다시는 바다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마라. 아니, 그냥 물 근처에 가지를 마!”

미나엘이 사정없이 말로 나를 흠씬 두들겼다.

걱정하지 말라고 태평스레 답했더니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다시 만난 그 얼굴이 블미에 헥사바임의 것과 너무 똑같아서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후손이라서 얼굴만 닮은 것일 텐데 말이지.’

프로셴에게는 말했지만 미나엘에게는 말하지 않았던 계획이 있었다.

그만큼, 미나엘과 알고 지냈던 기간이 비교적 짧았고, 핍박받긴 했을지언정 그녀가 줄곧 귀족 사회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믿지 않았던 면들이 있었다.

그랬던 주제에, 그녀가 블미에와 닮았다는 이유로 입이 열리고 말았다.

“미나엘, 걱정 하지마. 정말로 내가 익사하는 일은 없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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