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화
나는 평민을 연기하려고 마음먹고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 얼굴을 확인한 순간, 내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멜?”
아직도 또렷이 기억했다. 내 호수에 있던 어린 소년을.
나의 작고 사랑스러운 인어를.
“너…… 왜 여기에 있어……?”
선명히 기억하는 아름다운 꼬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 그때, 화상을 치료하느라 수조에 너를 다시 가두었던 때가 문득 떠올랐다.
수조에 부딪혀 떨어진 비늘을 보는 게 그리도 마음이 아팠었는데.
물가에서 살랑살랑 흔들리던 그 푸른 꼬리가 참 예뻤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걸까?
어떻게 사람의 다리가 생긴 걸까.
비늘 하나만 떨어져도 고통스러웠을 텐데. 다리가 생기는 건 아프지 않았을까?
그가 나와 같은 인간이 되어 기쁜 것보다, 그 과정에서 그가 조금이라도 아팠을까 봐 걱정됐다.
“왜, 왜 네가……! 아, 세상에!‘
인어는 소년에서 남자가 되어 있었다.
아름다운 꼬리 대신 이제는 인간의 다리가 있었다.
다리가 생겼으면 그토록 원하던 바다로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너는 왜 여기에 남아 있는 걸까.
끝없는 질문들이 이어졌다.
너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어쩌다가 다리가 생긴 걸까.
설마 이때까지, 몇십 년 동안 계속 이곳에서 혼자 지냈던 걸까.
“네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제발 내가 생각하는 답을 말하지 마. 바다로 돌아갔다가, 우연히 다리가 생겨 이곳에 와본 것뿐이라고 말해 줘…….”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것과 완전히 달라져 버린 멜의 모습이 그걸 부정했다.
핏기없이 창백한 피부, 빛이 죽어 버린 눈동자, 감정이 메마른 입술이 알려 왔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희망찬 일 따위 일어나지 않았다고.
너, 사랑스럽고 천진한 웃음을 지었는데.
호숫가에 반사된 달빛보다도 네 눈동자가 더 반짝였는데.
그 모든 게 사라진 멜은 저택에 유폐된 유령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세르……베인?”
그때 절대로 불릴 일 없을 이름이 들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기울이던 멜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세르베인……이야?”
나는 울음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죄책감에 멜의 얼굴을 바라볼 수도 없었다.
‘모습이 변한 나를 어떻게 알아보는 거야?’
지금의 나는 ‘세르베인 녹시렐’이던 때와 완전히 다른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초록색 눈동자. 순하게 내려온 눈꼬리. 곱실거리는 갈색 머리칼.
‘그런 나를 어떻게 의심조차 안 하고 세르베인이라 생각할 수가 있어?’
“드디어 왔네.”
멜이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그가 서서히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만들어 냈다. 아름다운 얼굴 위에 지어졌으니, 당연히 아름다운 미소였다.
하지만 어딘가 정상이 아니었다.
“……멜?”
나는 입을 막았던 손을 내렸다. 그의 상태가 이상했다.
처음 그의 얼굴을 봤을 때부터 느낀 감각이었지만, 어쩌면 그 이상으로 멜의 상태가 안 좋은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직 확답을 듣지 못했기에, 다시 한번 멜에게 물었다.
“있잖아…… 왜 바다에 가지 않았어?”
바다로 가지 않은 걸까, 못 간 걸까.
혹은 바다에 갔었다가 돌아온 걸까.
심장이 피를 뿜어내는 것을 고스란히 느끼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
하지만 멜은 대답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어서, 혹은 대답을 고민하느라 생긴 침묵이 아니었다.
그는 마치 환상을 보듯 내가 말하는 걸 구경하고 있었다. 흥미로워하는 기색조차 보이는 섬뜩한 시선이었다.
나는 침을 삼키고 무작정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가자, 멜. 내가, 내가 널 바다로 데려다줄게.”
혹시 가지 않겠다고 버티면 어떡하나 고민한 게 무색할 정도로 멜은 쉽게 끌려왔다.
‘다리가 생겨도, 바다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저택을 못 떠난 걸까?’
그의 손목을 잡고 걸음을 옮기는 동안에도 눈물이 흘러나왔다.
소리 없이 턱 아래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멜의 시선이 닿는 것도 같았다.
‘너와 행복한 재회를 바랐던 건 사치였어. 다시는 널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아. 너만 행복하면 돼.’
몇십 년 만의 재회였다.
우연한 만남에 행복한 것보다도, 이곳에서 유폐되어 망가진 너의 모습이 나를 슬프게 했다.
“내가…… 너무 미안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손목을 잡은 채 걸어가며 말했다.
차마 눈을 마주 볼 용기가 없어서,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널 혼자 두고 가버려서…… 미안해.”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됐던 걸까?
어떤 수모를 겪더라도 나를 핍박하던 이들의 비위를 맞춰 주며 목숨을 연명해야 했던 걸까?
……그랬던 거야.
네가 온전히 바다로 돌아갔다는 걸 내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 죽어서는 안 됐어.
“그러니까, 이번에는 꼭 내가 살아 있을 때 널 바다로 보내 줄게.”
약속했던 보물을 쥐여 줄 수 없단 게 아쉬웠다.
네게 약속했는데. 널 바다로 돌려보내는 날에, 네가 또다시 누군가의 손에 잡혀 고통받는 일이 없도록 녹시렐 가문의 보물을 주겠다고 했는데.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이제는 도움이 안 될 거고…… 내가 지금 갖고 있는 게 없으니까.’
그 순간 잡은 팔목에서 이질적인 감촉이 느껴졌다. 정신없이 그를 끌고 가느라 뒤늦게 발견한 것이었다.
내가 잡은 멜의 손목에 뭔가가 매달려 흔들리고 있었다.
그걸 본 순간 나는 걸음을 멈췄다.
신음 같은 소리가 목구멍에서 흘러나왔다.
“이걸…… 아직도 차고 있었어…….?”
싸구려 팔찌였다.
당시의 내가 차고도 넘치게 가지고 있던 보석 하나 달려 있지 않은 보잘것없는 물건이었다.
그저 팔찌에 달린 조개와 소라 껍데기가 널 기쁘게 할까 봐.
꽤 가벼운 마음으로, 간악하게도 네게 조금 예쁨받고 싶어서 준 물건이었다.
닳고 닳은 팔찌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보였다.
조개와 소라들 역시 마모되어 이제는 거의 조각나 있었다.
‘안 돼. 이런 걸 네게 마지막 선물로 줄 수 없어.’
걸음이 멈췄다. 이대로 너를 보낼 수 없다.
네게 제대로 된 선물을 주고, 그 후에 바다로 보내야 한다.
“멜…… 뭐 가지고 싶은 거 없어?”
나는 억지로 밝은 얼굴을 만들어 내 물었다.
마치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구해 줄 수 있었던, 권위 있는 공작가의 후계자였던 시절처럼 허세를 부렸다.
“말해 줘.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네게 줄게.”
숲의 한가운데에 서서 다정하게 그에게 말했다.
멜의 눈에는 굉장히 우습게 보일지도 모른다.
내가 입고 있는 옷은 멜이 입고 있는 옷보다 훨씬 허름하고 더러웠다.
온갖 험한 일을 하느라 내 손은 온통 까지고,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손뿐일까. 옷 밖으로 드러난 피부가 전부 상처투성이였다.
멜의 아름다운 모습과 비교될 정도로 험하고 흠이 많은 모습이었다.
그래도 뭐든지 주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그가 바라는 게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의 손에 쥐여 줄 것이다.
“…….”
그리 다짐했건만 멜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갑자기 내 손목을 잡고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멜?”
“…….”
“뭐 하는 거야? 어디로 가는 거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멜은 맹목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그의 뒷모습이 낯설고 무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 그런 생각을 털어 냈다.
멜이 무섭다고?
멜이 얼마나 여리고 사랑스럽고 무른지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이대로 따라가면 안 될 것 같아.’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끊임없이 위험 경보를 울리고 있었다.
게다가 멜이 향하는 방향은 바다로 가는 길이 아니었다. 호수로 가는 길이었다.
“그쪽은 바다로 가는 길이 아니야. 어디로 가려는 거야? 호수?”
“…….”
“대답해!”
멜의 상태가 이상했다.
나는 멜을 멈춰 세우기 위해 억지로 다리에 힘을 줘 버텼다.
하지만 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고, 나는 그저 주욱 끌려갔다. 그는 내가 가지 않으려고 버텼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예상대로 멜을 따라간 곳에 있는 건 호수였다.
왜 나를 이곳에 데려왔는지 묻기도 전에 멜은 나를 호수에 빠뜨렸다.
미처 대화할 순간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풍덩!
갑작스러운 입수에 몸의 근육들이 뻣뻣하게 굳었다.
하지만 애써 팔다리를 움직여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데 성공했다.
“푸핫! 콜록콜록!”
세르베인 녹시렐이던 때와 달리 몸 하나는 건강했기에, 수영을 잘하지는 못해도 호수에서 나가는 것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많이 미웠겠지. 그러니 조금 화풀이하는 걸 거야.’
나를 호수에 빠트린 것 정도야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었다.
호수에 빠진 채 올려다본 멜의 얼굴은 어스름한 달빛에 창백히 빛나고 있었다.
그는 기쁜 듯 웃고 있었다.
“……멜?”
“하하하!”
“왜 웃는 거야?”
내 물음에 멜은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어차피 살면서 바다에 들어갈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나였다. 그러니 당연히 수영을 배우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발버둥 쳐 수면 위로 고개를 꺼냈던 몸의 움직임이 서서히 작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