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화
“블미에. 블미에는 잘 지내고 있을까?”
복수를 다짐했던 시작이 흐려지고 서서히 행복했던 과거를 더듬기 시작했다.
블미에 헥사바임. 그녀가 아직 살아 있을까?
“그때 블미에가 거절해도 뭐든 줄 걸 그랬어. 그때 블미에가 거절해서 뭘 해주겠다고 했었는데. 그게 뭐였지?”
어쨌거나 헥사바임 남작가는 아직 존재한다.
여전히 가난한 것 같았지만 녹시렐 가문에 연루되어 같이 몰락하는 일은 다행히 없었다.
물론 그 시절에도 남작가를 떠나 일하던 블미에가 지금이라고 해서 남작가에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오히려 의사로 여기저기를 떠돌며 지낼 테니 더 만나기 쉬울 것이다.
“그래. 복수를 포기하자. 나만…… 나만 포기하면 돼.”
나만 그 기억을 덮어 두면 된다.
나만 끔찍했던 일들을 속으로 삭이면 된다.
“그러면 다시 행복해질 수 있어. 멜도, 라헨 오빠도, 블미에도 만날 수 있어.”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저택을 뒤져서 찾아낸 재물이 있으면, 그 돈으로 그 셋을 만나러 갈 것이다.
아무리 부정한 땅으로 지정되어 주민들의 이동이 금지되었다고 해도,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편법으로 이곳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게 왜 여기 있어?”
수조가 있었다. 아주 큰, 버려진 수조가 있었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수조로 달려가 수조를 휘감고 있는 덩굴을 뜯어냈다.
손이 가시덤불에 찢겨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아.”
덩굴에 가려진 수조의 모습은 예상보다 더욱 처참했다.
산산조각이 나버린 수조.
두 구의 해골.
내게 걱정 말라며, 인어를 바다로 돌려보내겠다고 말하던 기사의 옷.
그리고 멜. 나의 멜.
“아니야. 안 돼. 아니야……. 아닐 거야.”
수조는 저택과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됐다.
그 말은, 호수에 도달하기도 전에 발각됐다는 것이었다. 백골만이 남은 시체가 그걸 증명했다.
“아, 아니야. 뭔가 내가 이해하지 못한 사정이 있었겠지. 인어를 수조에 담아 바다로 보낸 뒤 다시 수조를 가져왔던 게 분명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였다.
그 긴박한 상황에서 기사들이 그랬을 리 없다는 걸 아는데도 그랬다.
만약 멜을 바다로 옮겼다면, 쓸모없어진 수조는 그 주변에 내버렸겠지. 저택에 가져올 리 없었다.
타다다닥!
나는 미친 사람처럼 호수로 달려갔다. 신발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뛰었다.
언젠가, 아버지가 멜을 죽이려고 했을 때 이랬던 기억이 떠올랐다.
“멜!”
호숫가에 도착해 곧장 그 이름을 불렀다.
암살자가 숲에 있을지도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첨벙!
나는 호수 안으로 고개를 집어넣었다. 물이 차갑다든가, 눈이 따갑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차가운 물이 안구를 찌르는 듯했지만 멜을 찾는 게 더 중요했다.
하지만 아무리 호수를 살펴도 멜은 보이지 않았다.
“……바다로 간 건가?”
급격히 온몸에 피가 돌고 안도감이 찾아왔다.
하지만 불길하고 섬찟한 기분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깨끗하고 아름다워 보여야 할 호수가 공포스럽게 보였다.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떨렸다.
“그런데 왜 물고기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거지……?”
나는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발바닥이 따갑고 오한이 들기 시작했다.
“오늘은 이 정도만 살피고 그냥 돌아갈까……?”
갑자기 공포심이 닥쳤다. 저택에 가는 것이 무서워졌다.
아는 것도, 그 어떤 떠오르는 가설도 없는데 막연히 저택이 무서웠다.
암살자가 있을까 봐 무서운 게 아니었다. 복수를 하는 일이 막막해서 무서운 게 아니었다.
나는 저택에 가는 게 두려우면서도, 무엇이 나를 두렵게 만드는지 알 수 없었다.
“……진정해. 멜은 바다로 무사히 갔어. 그러니까 호수에 없는 거야.”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위한 말을 끊임없이 내뱉었다.
그럴수록 마음속에서는 그걸 반박하는 말들만이 솟아났다.
‘그렇다면 수조는 왜 거기에 버려졌는데?’
“수조 말고…… 다른 방법으로 멜을 옮겼을 수도 있어.”
‘기사 두 명의 시체는 왜 저택과 그렇게나 가까운 곳에 있었던 건데?’
“처음에는 수조를 들고 옮기려다가 습격당했고, 남은 인원들이 멜을 옮긴 걸 거야.”
‘처음에 기사들 전부가 함께 수조를 옮겼는데 그것밖에 이동하지 못했다고?’
“…….”
나는 걸음을 멈췄다.
멜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바다로 갔을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시체처럼 안색을 굳히고 성큼성큼 걸었다.
잠재웠던 복수심이 들끓기 시작했다.
끝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그들이 배신했어!”
녹시렐 가문에 속해 있던 기사들이 나를 배신했다.
두 명을 제외하고는 애초에 멜을 옮길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내 방의 온갖 보물들만 챙기고 도망칠 작정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다른 가문의 기사도 아니고 너희가 그럴 수가 있어!”
수조 옆의 해골 두 구. 그 두 사람만이 수조를 옮겼던 것이겠지.
두 명이서 그렇게나 커다란 수조를 옮겼으니 얼마 가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나와의 약속을 지키느라 도망치지도 않고 미련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무거운 수조를 옮기느라, 저택에 들이닥친 기사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했다.
“그냥…… 그냥 차라리 다른 이들처럼 도망가지 그랬어…….”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가슴을 두드렸다.
그 순간에 처음으로 깨달았다.
나를 고문하고 괴롭게 하던 인간들이 준 고통이 가장 크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 때문에 죽게 된 나의 사람들의 죽음을 알게 된 게 더 고통스러웠다.
“……그들이 멜을 데려간 게 분명해.”
호수에 멜이 없는 건 그 탓일 거다.
저택을 뒤진 후 호수도 뒤졌겠지. 그리고 멜을 발견한 거야. 홀려서 데려간 게 분명해.
걱정이 현실로 되어 버렸다. 멜이 나 외의 인간에게 붙잡혀 버렸다.
녹시렐 가문을 끔찍이 싫어하는 그들이 녹시렐 가문의 소유였던 멜에게 얼마나 끔찍하게 굴지는 자명했다.
“널 진작 바다로 보내야 했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울음이 섞여 나왔다.
후회됐다. 멜이 내 곁에 있겠다고 말한 후, 그저 기뻐하며 계속 호수에 멜을 두었던 것이 후회됐다.
“멍청한 세르베인 녹시렐. 어차피 멜은 날 사랑할 리 없었어. 그냥 분위기에 휩쓸렸던 거지. 넌 그걸 알았잖아. 알았으면…… 멜이 원한다고 해도 바다로 보냈어야 하는 거잖아!”
미친 사람의 몰골을 하고 저택에 도달했다.
머리칼은 엉망으로 얽혀 산발이 되었고, 드러난 피부는 생채기가 가득했다.
“허억, 허억……!”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초점 없는 시선으로 저택의 외관을 살폈다.
저택의 외관은 청소하지 않아 이끼와 때 낀 자국으로 더러웠다.
하지만 유리창은 깨끗했다.
한 군데도 아닌, 외관상 보이는 모든 유리창이 깨끗했다.
“……어째서?”
암살자들이 유리창을 닦았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60년도 더 방치된 저택의 유리창이 깨끗한 이유는 뭘까.
“부정한 땅으로 지정한 교황파가 이곳에 사람을 보내 청소했을 리는 없어. 혹시 청소를 시켰다고 해도…… 아. 혹시 함정인가?”
그럴듯한 가설이 떠올랐다.
함정이다.
함정이 아니고서야 암살자가 드나드는 곳에서 누군가가 태평하게 집이나 치우고 살고 있을 리 없다. 분명 살해당했을 테니까.
‘녹시렐의 핏줄을 꾀기 위한 함정일 거다.’
머릿속이 차분해진 이후, 나는 최대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머리칼도 빗었다. 잃어버린 신발은 어쩔 수 없으니 그냥 놔두기로 했다.
‘길을 잃은 척, 도와 달라고 떠보자. 나는 어리고, 누가 봐도 초라한 평민이니까 녹시렐의 핏줄로 의심할 이유 없어.’
꽤 무모한 계획이었다.
혹시 이 저택을 점유하고 있는 자가 어린애든 아니든 상관없이 다 죽이는 자라면?
그렇다면 나는 죽는다.
그럼에도 도박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힘이 없는 자는 늘 위태로운 선택을 강요당한다.
“죽지 않아도 성공이고, 이곳에 사람이 없어도 성공이야. ……괜찮아. 괜찮아.”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문을 두드리기 전에, 가여운 길잃은 아이 같은 표정을 연기했다.
이미 울었던 흔적이 남아 있기에 그건 쉬웠다.
나는 문고리를 잡고 문을 두드렸다.
터엉 텅!
“저기요. 혹시 계시-.”
끼이익…….
그저 두드린 것만으로 문이 힘없이 열렸다. 애초에 잠겨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빈집일 테니 기뻐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었다.
저택의 문이 열린 순간 나를 둘러싼 끔찍하고도 암울한 기운 때문이었다.
“…….”
고개가 빳빳이 굳어 움직이질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아주 조금 시선을 들어 올려보기로 했다.
‘바닥이 깨끗해.’
내 발만 보이던 시야에서 문 너머에 있는 저택의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상과 달리 깨끗하게 청소된 바닥이었다.
‘분명 폐허일 거라고, 먼지 구덩이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치 기사들이 들이닥치기 이전의 녹시렐 저택 같았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내가 겪은 모든 일들이 환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안일하고 멍청한 생각이었다.
“……!”
그리고 조금 더 고개를 든 순간, 나는 낯선 남자의 신발을 발견했다.
“어, 언제!”
기겁하며 고개를 쳐들었다.
누군가가 존재하는 기척도, 다가오는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이렇게 기척을 지운 걸 보면 분명 암살자야. 암살자가 이 집에서 함정을 파고 지내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