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 화 (61/132)

61 화

내 착각이다.

내가 세르베인 녹시렐이던 시절에 바다를 본 적이 없다는 건 거짓이었다.

나는 바다를 본 적이 있다.

절벽 아래에 파도치는 푸른 물의 세상.

크게 차오른 달이 비치는 남색의 물결.

……사랑하는 너의 머리칼과 똑 닮은 아름다운 색.

‘하늘에서 내리던 물은 어디에서 온 걸까.’

저택 안에 갇힌 채 창밖을 보며 궁금해했던 때가 있다.

비가 오는 날마다 창문을 열어 댄 탓에 감기에 걸린 적이 있었다.

그 후로 비가 오는 날이면 하녀들은 내가 창문을 열지 못하게 감시했었다.

‘그 물은 바다에서 왔나 봐. 세상에 이렇게나 경이로운 풍경이 있을 줄은 몰랐어.’

너는 너처럼 아름다운 곳에서 왔구나. 그랬던 거구-.

“증표를 어디에 놔뒀냐고 물었잖아!”

그들은 나를 데리고 어디론가 향했다. 절벽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 과정에서 생각했다.

이런 꼴을 당하는 건 나로 충분하다. 절대로 이들이 라헨을 쫓도록 하지 않을 것이다.

라헨 오빠는 어차피 사생아였으니 귀족 사회에 알려진 존재도 아니었다.

‘나만 입을 다물면 라헨 오빠는 안전해.’

애초에 ‘가문의 증표만큼은 지키겠다.’ 같은, 가문을 사랑해서 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저 우연히 라헨에게 준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행동이 이들의 계획을 어그러뜨렸다.

그걸로 내 행동의 대가는 충분했다.

‘죽고 싶다. 차라리 나를 죽여 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도망치지는 않을 것이다.

기회가 생긴다고 해도, 이곳을 빠져나가지 않을 거야.

‘내가 여기서 참으면, 나만 여기서 입 다물고 죽으면, 다 괜찮아져.’

라헨이 누군가에게 쫓기는 일이 없어진다.

멜이 안전하게 바다로 돌아갈 시간을 벌게 된다.

내 목숨 하나로 얻기에는 과할 만큼 충분한 대가였다.

‘그러니까 괜찮아…….’

정말로 괜찮아.

이젠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숨을 쉴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시각, 청각, 촉각, 역류된 피를 느끼던 미각. 그 모든 감각이 드디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죽을 수 있어.

환희를 느끼려던 순간, 누군가가 말했다.

“혹시 삼킨 거 아니야?”

“뭐?”

“그럴 수도 있잖아. 듣자 하니 작은 로켓 같은 거라던데.”

흐려진 눈이지만 그 시선만큼은 안경이라도 낀 듯이 선명히 보였다.

마치 생명체가 아니라 사물을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살인에 익숙하지만, 사람들에게 멸시받지 않기 위해 인간의 탈을 쓰며 예절을 흉내 내던 이들의 본성이 드러났다.

* * *

나는 독을 마시고 죽지 않았다.

내 몸은 바다에 버려졌다. 그러니 내가 입은 옷까지 토막토막 찢긴 거겠지.

“끔찍해. 다 죽여 버리고 싶어. 복수할 거야. 다…… 다 죽여 버릴 거야.”

틸리타를 집에 데려다주고 오는 길에 몇 번이고 다짐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나는 평민이고 당장 이 마을을 벗어날 방법도 없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더라도 복수를 다짐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었다.

‘나는 어째서 전생의 기억을 되찾게 된 걸까?’

뭔가 계기가 있으니 전생을 기억하게 된 것일 테다.

나의 경우라면 복수를 위해서 기억해 낸 것이겠지.

“너희들을 전부 기억해.”

스무 명도 더 되는 인원이었지만 그 얼굴을 전부 다 기억했다.

하지만 이미 60년 정도가 흘러 버렸다.

이미 죽어 버렸을 수도 있었다.

“당사자가 죽었으면 후손들까지 다 죽여줄게.”

어차피 내게는 더 이상 지킬 것도 없었다.

공작가가 멸망한 이후, 또 다른 녹시렐 가문의 사람이 처형되었다는 소문이 없는 걸 보면 라헨은 안전했다.

그리고 멜 역시 바다로 돌아갔겠지.

“어떻게 복수를 하지?”

아침에 눈을 뜨고 딱딱한 나무 침대에 눕는 순간까지도 계속 복수를 떠올렸다. 심지어 자는 동안에도 그랬다.

몇 날 며칠 동안이나 폐인처럼 복수할 궁리만 했다.

* * *

전생을 떠올린 후, 나의 삶은 망가졌다.

물론 겉보기에는 정상처럼 굴었다.

“하슈 언니! 나 동화책 읽어 줘!”

“옛날, 옛날에 어느 공주님이-.”

“그거 말고 내가 좋아하는 걸로!”

“……옛날에, 옛날에 어느 호랑이가 ‘어흥’ 하며-.”

“조금 더 영혼 있게!”

“……그래.”

늘 하던 대로 틸리타를 돌봤고, 종종 마을 사람들의 일을 도우며 돈을 벌었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누군가를 어떻게 죽일지 궁리만 하고 살았다. 그게 정상적인 삶은 아니리라.

“그런데 어떻게 접근하지?”

하지만 복수의 길은 막막하기만 했다.

돈도 없고 신분도 천한 내가 그 귀족들을 만날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부정한 땅으로 지정된 이후 이곳의 주민들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없었다.

“그 가문의 하녀로 들어갈 수만 있었다면 음식에 독이라도 풀었을 텐데.”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른 방법을 찾으려 했다.

그러다가 문득, 녹시렐 저택으로 갈 생각을 했다.

“옷이라든가 작은 보석 하나라도 발견하면 지금의 내겐 큰돈이 돼.”

저택 내부가 쑥대밭이 되어 있을 걸 알았다. 위험한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다음 날, 나는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다.

어디론가 향하는 나를 발견한 마을 사람들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하슈, 어디 가니?”

“숲으로 가요.”

“……저택 근처의 숲 말이니?”

어떤 저택인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이 동네에서 가까운 숲은 녹시렐 저택을 둘러싼 숲뿐이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을 어른들이 염려하며 만류했다.

“거기는 왜 가려고?”

“숲에 먹을 것이 없나 찾아보려고요.”

“세상에! 그 정도로 먹을 것이 없었던 거니? 내가 음식을 줄게. 그러니 가지 말렴.”

“감사합니다. 그래도 버섯 같은 게 보이면 팔 수도 있을 테니까요.”

“하슈…… 너는 어려서 모르지만, 어른들이 숲에 가지 않는 이유가 있어.”

어른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낯선 사람이 없는지 확인했다.

그들은 이내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너희 집 옆집에 사는 체렌 아저씨 아니? 그 아저씨가 새벽에 창밖을 보다가 봤대. 수상한 사람들이 종종 저택이 있는 숲속으로 가더란다.”

“수상한 사람들이요?”

“그래. 얼굴도 가리고…… 마치 암살자처럼 생긴 모습이더래.”

암살자처럼이 아니라 암살자가 맞을 것이다.

그들은 녹시렐 가문을 철저히 멸망시켰으면서 아직까지도 꾸준히 암살자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징그러운 수준이야. 그런데 그건 분명히 녹시렐의 증표를 못 찾았다는 뜻이겠지.’

공작을 죽이고, 공작의 후계자도 죽이고, 온 저택을 뒤졌지만 증표를 찾지 못했다.

그건 꽤 두려운 일일 것이다.

자기들이 처리하지 못한 녹시렐 가문의 핏줄이 남아 있다는 뜻일 수 있으니.

“괜찮아요. 정말 조금이라도 위험할 것 같으면 바로 돌아올게요.”

나는 어른들을 뿌리치고 숲으로 갔다.

그들은 나를 계속 걱정했지만 함께 가주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들이 책임져야 할 진짜 가족이 있는 상황에서 한낱 고아인 나를 위해 목숨을 걸 필요는 없는 거다.

“그래…….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렴.”

그것이 내가 하슈 레이타로 마을에서 지냈던 마지막 날이었다.

* * *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아 숲에는 길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옛날, 하녀가 나를 해치고 도망가던 중 불탔던 숲이었다.

그랬던 숲이 이제는 울창해져 있었다.

“식물학자가 100년쯤이면 완전히 회복될 것이라고 말했지.”

나는 울 듯, 웃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아쉽지도 않다고 생각했었다.

“어차피 내가 이 숲이 회복된 걸 볼 날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어.”

숲에 들어오기 전에 걱정이 많았다.

혹시 기사들에게 폭행을 당했던 기억이 떠올라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될까 봐 불안했었다.

“이상하지. 숲에 나무들이 많아져서 그럴까?”

무심코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훔쳐 버렸다.

증오와 복수로 점철됐던 마음이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냥 너와 행복했던 기억들만 떠오르기 시작해.”

그냥 복수 같은 거 다 잊어버릴까?

안온하고 편리한 충동이 나를 설득했다.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과거를 회상했다.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한 기억이었다.

“네가 100살까지 살라고 했었는데. 널 보러 바다로도 올 수 있느냐고 물었었는데…….”

그때는 안 된다고 말했지만, 지금의 내게는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너무 시간이 흘러 멜은 나를 잊었을 수도 있지만…….

하지만 그는 분명 살아 있다. 인어는 100살 정도는 가볍게 사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과거 일을 하나하나 들려주면 나를 다시 기억해 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 몸으로는 네가 있는 바다로도 갈 수 있어. 배를 타려면 돈은…… 조금 많이 모아야겠지만.”

복수를 포기하면 모든 게 편해진다.

널 만나러 갈 수도 있고, 어떻게든 수소문하면 라헨 오빠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요절하지만 않았다면.

“내 모습이 달라져서 못 알아볼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든 나란 걸 증명하면 돼.”

계속 걸음을 옮기며 행복한 상상에 빠졌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만난 멜. 내 모습은 달라졌지만 반갑게 나를 맞이해 주는 멜과 라헨.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