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화
‘아…… 하지만 돈이 많았어도 평탄하지는 않았어. 독을 마시고 자살했으니까.’
그걸 위로라고 떠올릴 때 틸리타가 나를 흔들었다.
그 애는 이번에도 내가 무시하고 못 들을까 봐 또박또박 힘을 주어 말했다.
“내가 해변을 걷다가 이상한 걸 발견했어.”
“뭔데?”
“우음…… 천?”
천 조각을 찾은 게 뭐가 특별한 건지.
물론 여덟 살 꼬마가 보기에는 돌멩이도 자기가 관심을 갖는 순간 특별해 보일 거다.
나는 무미건조하게 아이의 환상을 깨뜨렸다.
“바닷물에 밀려온 쓰레기일 거야.”
“아니야! 하슈는 왜 이렇게 감정이 메말랐어?”
“……미안.”
마지 못해 사과하니 틸리타가 배시시 웃었다. 그러고는 여덟 살답지 않게 꽤 영악하게 굴었다.
“미안하니까 나랑 거기 같이 가주는 거다?”
나를 끌고 가기 위해 이런 꾀를 쓰다니. 커서 제법 머리 굴리는 일을 하게 될지도…….
나는 틸리타가 저런 수를 써야 할 정도로 바다에 가는 걸 꺼렸다.
바다 근처에만 가도 갑자기 파도가 밀려와 내 옷을 몽땅 적시곤 했으니까.
‘내가 가난해서 배를 탈 일이 없다는 게 다행이지.’
전생. 내가 세르베인 녹시렐일 때에도 바다에 가까이 가면 이랬을까?
그건 영원히 알 수 없을 터였다.
그때의 나는 몸이 약했기에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이 없었고, 게다가 이미 죽었으니까.
“네 옷이 파도에 젖어도 나는 모르는 일이야.”
“괜찮아!”
틸리타는 내 손을 잡아끌며 인적이 드문 바닷가로 달려갔다.
그곳은 모래사장이 아닌 온갖 암석들로 이뤄진 험지였다. 이런 곳이니 혼자 오기 무서웠던 거겠지.
“여기 봐! 낡았지만 자그마치 레이스인걸?”
토도도.
내 손을 놓고 뛰어간 틸리타는 회색빛 천을 들었다. 거기에는 제법 여러 조각의 천 조각들이 있었다.
비록 소금물과 온갖 오염 물질에 노출되어 쓰레기처럼 보이는 꼴이었지만, 고급 원단이긴 했다.
“……그러게. 레이스네.”
평민들은 레이스를 구경할 일이 드물다.
더군다나 찢어지게 가난한 우리 마을에서는 절대로 볼 일이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 밀려온 거지?”
나는 더러운 천을 손끝으로 들어 올려 관찰했다.
천 조각은 거의 고대 유물처럼 더럽고 낡았다. 그냥 쓰레기라며 지나칠 꼴인데 발견해 낸 틸리타가 신기했다.
“하슈 언니. 이거 가져다가 팔면 돈이 될까? 여기 여러 개 있는데, 몇 개는 언니 줄게!”
“……고맙지만 그건 불가능할걸. 너무 더럽고 낡았잖아.”
내 말에 틸리타는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곧 미련을 버렸는지, 바위 밑에 놔둔 천 조각들을 한 움큼 꺼냈다.
그 양이 생각보다 많아서 놀랐다.
“아니, 고작해야 손수건인 줄 알았는데…….”
당황스러워서 나는 천 조각들을 뒤지듯이 살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누더기 같은 레이스들을 조합했다.
그리고 별안간 떠오르는 기억에 머리를 붙잡았다.
“언니! 왜 그래? 아파?”
틸리타가 놀라서 내게 달려왔다.
나는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덜덜 떨릴 것만 같았다.
“아니야……. 틸리타. 일단 이 천들은 그냥 버리자.”
“못 팔아서 그래? 그래도 아까운데…….”
“……언니가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예쁜 레이스 달린 손수건이라도 사줄게.”
“정말?”
틸리타는 어려서 그런지 이런 허무맹랑한 거짓말에 쉽게 넘어갔다.
나는 싱글벙글 웃는 아이의 손을 잡고 도망치듯이 그곳을 빠져나왔다.
온몸이 차가워지고,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건 옷이야.’
저렇게 많은 레이스 달린 천들이 사용될 곳이라면 귀족의 옷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충격을 받은 건…… 단순히 그게 옷에서 나왔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입고 있던 옷이야.’
기억해 버렸다.
언뜻, 단편적인 장면으로 떠올랐던 전생이 무더기처럼 떠오르기 시작했다.
끝인 줄 알았지만 끝이 아니었던 기억.
그리고 진짜로 맞이했던 죽음까지도.
“언니? 왜, 왜 울어……?”
틸리타가 당황해서 걸음을 멈추고 내게 물었다.
나는 억지로 눈물을 참으려 했지만, 결국 주저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언니! 울지 마…….”
기억해 버렸다. 나는 왜 내가 입고 있었던, 정확히 말하자면 자살했을 때 입고 있던 옷이 갈가리 찢긴 채 해변에 밀려왔는지 기억해 냈다.
그날, 나는 독을 마시고 죽지 않았다.
* * *
아버지, 녹시렐 공작은 내가 고통스럽게 죽지 않길 바랐다.
그래서 잠이 오듯 평온한 죽음을 선사하는 독을 내게 쥐여 줬다.
예전의 나는 죽고 싶었기에 독에 대한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때 독을 먹고 죽을 결심을 하지 않은 건, 현재 존재하는 독들은 전부 고통스러운 죽음을 선사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내게 준 약은 새로 실험해 만들어 낸 독이었겠지.’
새로 만들어 낸 독은 충분히 효과를 증명할 만큼 사용되기도 전에 내게 왔다.
문제는 거기서 등장했다.
독은 드물게도 종류마다 효력이 잘 듣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그게 나였다.
나는 그날 독을 먹고 죽지 않았다.
“눈을 떴군.”
“으읍!”
“후계자의 증표는 어디에 뒀지?!”
아직도 기억했다. 내가 살아오며 겪은 어떤 순간들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지옥 같은 광경이었다.
죽은 줄 알았던 내 몸은 고통에 뒤틀리며 의식을 차렸다.
끔찍하게도 내가 눈을 뜬 곳은 사후 세계 같은 곳이 아니었다.
나는 저택에 남겨져 있었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사용인들의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내 방은 도둑과 강도들이 덮친 곳처럼 폐허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도둑과 강도는 저택에 들이닥친 기사들이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내가 목격한 건 흰빛의 낯선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었다.
“대답 안 해?!”
“큭큭. 야, 손을 떼야 말을 하지.”
선한 인상의 흰 갑옷과 달리 저택을 헤집은 그들의 행동은 잔혹했다. 기사의 행동이라 볼 수 없었다.
나는 당혹스러운 상황과 압박 탓에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나의 반응이 심상치 않으니 몇몇이 염려했다.
“저러다가 죽을 것 같은데?”
“손 좀 떼봐.”
그러자 숨을 막을 듯이 내 입과 코를 틀어막은 손이 떨어졌다.
하지만 숨을 돌릴 틈은 없었다. 그들은 곧장 내게 후계자의 증표에 대해 말하기를 강요했다.
“빨리 말해!”
온몸이 덜덜 떨렸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헛구역질이 나왔다.
기사. 책에서는 충성스럽고 약자를 배려하는 존재로 나오던 이들.
하지만 누군가의 감시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이들은 그냥 무력이 센 남자들이었다.
“무시하는 거야? 당신이 아직도 공작가 후계자 같아?”
그들은 나를 연행해 가려는 것인지, 내 팔목을 잡았다.
힘없이 침대에서 끌려 나올 때,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내 귀를 사로잡았다.
“말할 생각이 없나 봐?”
“좀 더 고생하면 생각이 변할걸?”
“교황청 고문실의 첫 손님이 귀족이 되는 건가.”
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그들을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그때 힐긋, 눈이 마주친 어떤 남자가 내뱉었다.
“뭐 어때. 그게 공작가문이라면 꽤 역사적이고 좋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초인적인 힘으로 방에서 뛰쳐나갔다.
죽은 듯이 엎어져 있던 내가 그렇게나 빠르게 움직일 줄은 몰랐는지 기사들이 소리쳤다.
“잡아!”
“어차피 네가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허억, 허억!
시야가 점점 어둑해졌다. 나는 차라리 지금 죽어 버리길 원했지만 본능적인 감각이 있었다.
설령 여기서 눈이 안 보이고, 다리가 마비되더라도 당장 숨통이 끊기진 않을 것이다.
내 몸 상태는 내가 가장 잘 알았다.
타다닥!
기사들이 여럿 모여 뒤지고 있는 1층으로 갈 수는 없었다.
결국, 손님들에게 내주거나 잘 사용하지 않던 3층으로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푸흡, 멍청한 년! 공작 가문에서 태어나 뻣뻣이 고개 쳐들고 살아와서 그런가?”
“3층으로 가다니. 공녀님. 어디로 도망가려고요? 하하하!”
기사들은 이제 뛰지도 않았다. 일부러 천천히 농락하듯 나를 쫓아 걸어왔다.
나는 정신 없이 고개를 돌리며 복도를 살폈다.
알고 있다. 내가, 한낱 귀족 영애로 태어난 데다가 몸까지 약한 내가 이 시련을 헤쳐 나갈 방법은 없었다.
그저 시간을 번 것뿐이었다.
드르륵!
“야, 저거 뛰어내리려는 거 같은데?”
“뭐?! 젠장!”
내가 창문을 열자마자 기사들은 당황하며 뛰어왔다.
내가 가문의 증표를 어디에 숨겼는지 말해 주기 전에 죽을까 초조한 얼굴이 보였다.
“증표만 순순히 주면 목숨은 살려 주지. 그러니-.”
휘익!
그 뻔한 거짓말에 대답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몸을 떨어트렸다.
간발의 차로 나를 놓친 손이 섬뜩하게도 선명히 보였다.
콰직!
“……아, 으…… 아…….”
하지만 3층에서 떨어져도 사람은 죽지 않았다.
머리부터 떨어져 목뼈가 부러졌다면 즉사했을 텐데. 운도 없지.
“미친년! 독하기 짝이 없군.”
저택 안에서 우르르 나온 기사들이 나를 구경하듯 둘러쌌다.
그들은 내가 숨이 붙어 있단 걸 확인하자 안심하고 비웃어 대기 시작했다.
그 웃음소리가 깨진 듯이 들렸다. 떨어질 때 고막이 잘못된 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정신을 잃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악!”
“이게 사람을 가지고 놀았으면서 편히 죽으려 해?”
기사가 내 팔을 잡고 끌어 올렸다.
그는 걷지 못하는 나를 억지로 끌고 걸으며 말했다.
“편히 죽고 싶으면 증표를 내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