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 화 (59/132)

59 화

“멜, 나는 이만 들어가 볼게.”

“응? 아, 아. 같이 가자.”

멜은 허둥지둥 바다에서 시선을 떼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웃어 줬다.

“아니야. 괜찮아. 바다 더 보고 와도 돼.”

“하지만 혼자는 위험해. 무슨 일이 있을지 몰라.”

“어차피 여긴 바다 한가운데인걸. 위험한 사람도 없어.”

“……그 남자랑 선장이랑 선원들이 있잖아.”

멜은 눈을 번뜩였다. 그 눈은 순간적으로 얼음 조각 같은 날카로움을 보였다.

그렇지만 과한 걱정이었다. 나는 푸핫, 웃고는 그를 안심시켰다.

“괜찮아. 알테슈메그는 다리도 다치고 손도 다쳤어. 나머지 사람들은 배를 운항하느라 바쁘고. 걱정 안 해도 돼.”

“그……러면, 조금만 있다가 들어갈게.”

“그래.”

멜은 주저하다가 다시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깊어서 보이지 않는 불투명한 수면의 아래가 보이는 것처럼.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울 것 같은 눈빛이었지만 동시에 감정이 메마른 듯한 입매가 보였다.

그 얼굴을 보자 충동적으로 객실로 돌아가던 걸음을 멈췄다.

나는 그와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물었다.

“있잖아. 바다로 돌아갈 생각은 없어?”

멜은 눈에 띄게 놀라선 나를 돌아봤다. 유기된 적 있는 동물과 같은 표정이었다.

그는 불안과 상처로 점철된 얼굴을 하고서 물었다.

“왜 또 그런 말을 해? 날 버릴 생각이야?”

‘또’라니. 나는 이 말을 처음 꺼냈다.

하지만 그의 정신이 불안정했던 건 늘 있었던 일이기에 무시했다.

“그런 게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널 위한 것 같아서.”

“날 위하는 척하지 마.”

멜의 창백한 눈가가 붉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건드려서는 안 되는 화제를 건드린 것 같았다.

착각일까. 그의 등 뒤로 먹구름이 몰려오는 형태가 보였다.

새파랬던 하늘이 어두워지고, 하늘을 반사시켜 청명한 빛을 띠던 바다가 까매졌다.

곧 폭풍이 닥칠 듯한 풍경이었다.

“네가…… 날 위해서 한 것 중에 제대로 실행한 게 있었는 줄 알아?”

명백히 화가 난 모습이었다.

어떻게든 독한 말을 해서 내게 상처를 주고 싶은 것이겠지.

“수조에 넣었다, 호수에 넣었다, 바다에 넣었다……. 네 맘대로 휘두르는 내가 참 쉬워서 좋았겠어.”

정작 그 눈은 내가 화를 낼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탓에 나는 상처를 받을 수도,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넌 내가 사랑한다고만 말하면 어디론가 보내려고 해. 역시나 그게 네 목적이었어.”

멜이 말하는 일 중 내가 아는 건 없었다.

당연했다. 내가 한 일들이 아니니까.

“미안해.”

그럼에도 사과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난간을 붙잡고 서 있는 멜이 불안정해 보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초조함에 신경이 곤두섰다.

그의 표정, 흔들리는 배, 떨리는 손가락 등이 신경 쓰여서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내 멋대로 해서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저, 나는 네 의사가 궁금했어.”

정작 바다로 돌아가는 게 어떠냐고 물은 건 나인데 이상한 생각이 차올랐다.

바다와 가까이 선 멜이 사라질까 봐 무서웠다.

내게 화가 나서, 나를 버리고 바다로 갈까 봐 무서웠다.

이상하다. 며칠 만에 저택에서 그를 다시 만났을 때도 그랬다.

언젠가 보내 주겠다고, 그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돕겠다고만 다짐했었다.

그 계획의 끝은 늘 바다로 돌아간 멜이었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사과하지 마.”

내가 다가가자 멜은 도리어 자신이 창백해진 얼굴을 했다.

그는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다시 한번 애원했다.

“제발 내게 사과하지 마.”

“아니. 해야 해.”

너를 온전히 가질 수만 있다면 내가 목표한 것들을 다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웃어 버렸다. 그런데 눈물이 흘렀다. 분명 내가 슬플 일이 없는데도 눈물이 나왔다.

“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 나는 네게 기회를 줬어. 내 곁에 남겠다고 한 건 너야. 그러니까 나중에 원망해도 늦었어.”

초점이 흔들렸다. 흔들리는 배 탓일지도 모른다.

온전치 못한 감각이 나를 지배했다.

눈을 크게 뜬 채 나를 바라보기만 하는 멜에게 웃었다.

“아무래도 나는 널 보낼 수 없을 것 같네.”

덜커덩!

뒤쪽에서 거칠게 문이 열렸다.

멀리서 알테슈메그가 다급히 외쳤다.

“공작님! 멜 공자! 거기서 뭐 하는 겁니까! 빨리 들어오세요!”

나는 시선을 위로 들었다.

멜의 뒤로 까맣게 변한 풍경이 보였다. 먹구름이 낀 탓에 어두워진 풍경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이 배를 다 덮을 만큼 높게 솟아오른 파도였다.

“안 돼!”

덮쳐 오는 물의 흐름에서 멜이 내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파도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마치 손이 달린 것처럼, 내 몸을 잡아당겨 바다로 끌고 갔다.

“세르베인!”

나를 놓친 멜의 얼굴이 절망에 물들었다.

* * *

“약속을 지켜.”

어디선가 우는 목소리가 들렸다.

달빛이 내린 호수에서 멜이 울고 있었다. 그는 누군가를 안아 들고 있었다.

흐트러진 갈색 머리칼이 보였다. 눈을 감고 있는 여자는 허름한 옷을 입고 있었다.

살아온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는지 그 손은 꽤 거칠었다.

사랑한다든가, 원망한다든가, 저주한다거나, 저만큼 아파 보라는 말이 아니었다.

인어가 바라는 건 하나뿐이었다.

“네가 한 약속을 지켜, 세르베인.”

인어는 여자를 안아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아무것도 없는 호수에 그녀를 놓아 버렸다.

풍덩.

호수에 빠진 시체는 가라앉기 시작했다.

응당 떠올라야 이치에 맞는 몸체는 호수 바닥에 닿고, 다시는 올라오지 않았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여자의 갈색 머리칼이 너울지며 흔들렸다.

나는 그 사람을 알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억해 냈다.

하슈 레이타. 옛 녹시렐 공작령에 살던 평민 고아.

이름이나 출신뿐만 아니라, 나는 그 사람의 생에 있던 모든 일들을 알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나의 전생이었으니까.

* * *

약을 먹고 죽었던 녹시렐 공작가의 후계자.

그게 나였단 걸 떠올린 건 20세 때였다.

‘착각이거나 망상증이라고 하기에는 장면들이 너무 또렷해.’

그런데 전생을 떠올렸다고 해서 내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일은 없었다. 고작해야 신분과 짧은 장면들만 떠올랐으니.

그 이전에 정체성 혼란 따위를 말하며 철없는 소리를 하기에 지금의 나는 여유가 없었다.

“하슈 언니. 왜 그래?”

“……아니야. 그런데 우리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안 듣고 있었던 거야?! 언니도 내 말을 안 믿는 거야?”

“아, 아니야. 그러니까 울지 마.”

나는 울먹이기 시작하는 틸리타를 도닥였다. 다행히 그 애가 심하게 와앙 우는 일은 없었다.

평민이자 고아인 나는 늘 돈이 부족했다.

그래서 마을에서 일을 하느라 바쁜 어른들 대신 아이들을 돌보곤 했다.

그마저도 요즘에 돌볼 아이는 틸리타뿐이었다.

틸리타는 우리 마을에서 그마나…… 아주 그나마 여유로운 집안의 딸이었다.

이 마을에서 보통의 가정이 하루에 두 끼만 먹고 산다면 틸리타네 집은 가끔 세 끼를 먹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틸리타를 돌보는 일은 내게 아주 중요했다.

……이렇게 틸리타를 돌보는 일에 절박한 건, 최근에 마을 어른들의 원조가 끊겼기 때문이었다.

나는 얼마 전의 일을 떠올렸다.

“미안하구나, 하슈. 이젠 너를 도와줄 수 없게 됐어.”

“괜찮아요. 상황이 어쩔 수 없는 거니까요. 그리고 이제 저도 어른인걸요.”

“정말 미안하구나…….”

녹시렐 공작가가 망한 이후, 녹시렐 공작령은 비공식적으로나마 주변 귀족들에게 흡수당했다.

그건 그곳 주민들에게 절대 나쁜 일이 아니었다. ‘공식적으로 내 땅은 아니지만, 인륜적으로 너희를 도와주겠다.’라는 의미였으니까.

“빨리 이곳을 책임져 줄 가문이 나타나면 좋을 텐데…….”

하지만 녹시렐 저택과 가까운 곳에 사는 주민들은 버려졌다.

교황이 녹시렐 저택 부근을 부정한 땅으로 지정한 탓이었다.

반란을 일으켜 왕궁을 차지한 교황.

그를 지지하지 않았기에 눈치를 보는 귀족들.

그 두 세력이 평화를 위해 합의한 건 ‘녹시렐 공작가’에 모든 화살을 돌리는 것이었다.

“이곳이 부정한 땅으로 지정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먹고사는 게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

“부정한 땅으로 지정된 이상 누가 우리를 도와주겠어.”

그 어떤 귀족에게서도 도움받을 수 없는 땅의 주민.

그게 이곳의 현실이었다.

어른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허덕였고, 어떻게든 자급자족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녹시렐 가문이 망한 지 65년.

얼마 전, 교황이 바뀌었다.

“새로운 교황은 우리를 구원해 주지 않을까?”

주민들은 기대에 차올랐다. 그래서 막대한 헌금을 내서 교황청에 상소문을 올렸다.

하지만 그는 녹시렐 저택 부근의 땅을 부정한 땅에서 해방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한번 이곳이 부정한 땅임을 쐐기 박았다.

오기로 버티던 주민들이 무너져 내리는 건 한순간이었다.

이 상황에서 고아인 나를 누군가가 도와주는 건…… 불가능했다.

“이렇게나 잔인하게 구는 사람이 어떻게 신의 아들일 수 있어.”

“신의 아들이라고? 마귀의 아들일 것이다!”

그 탓에 우리는 교황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궁핍하게 살고 있는 내가 전생에 녹시렐 공작가의 후계자였다니.

그 시절, 호화롭게 살던 삶을 기억해 내니 현실이 더욱 잔인하게 느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