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 화 (58/132)

58 화

멜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세르베인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넌 왜 늘 나를 믿지 않아……?”

세르베인은 답이 없었다.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나를 불신해?”

저벅저벅.

세르베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화하는 걸 포기했는지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리고 지나쳐 걸어가기 시작했다.

멜은 그 뒷모습을 잡기 위해 다급히 일어섰다.

“멈춰! 같이-.”

그 순간, 세르베인의 뒷모습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말로 표현하지 못할 느낌이었다.

다시 한번 이질감을 느끼자 멜은 그 뒷모습을 분석하듯 바라봤다.

조금, 머리칼이 길었다. 색채 또한 제가 본 세르베인의 머리칼보다 더 붉어 보였다.

“……너, 오늘 그 옷을 입지 않았어.”

결정적으로, 오늘 세르베인은 흰색 드레스를 입지 않았다.

온몸에 소름이 끼치기 시작했다.

“누구야?”

멜은 멈춰 서서 물었다.

그가 있는 곳은 한 발자국만 더 다가가면 바다에 빠지게 되는 위치였다.

만약 조금만 더 늦게 정신을 차렸다면, 바다에 빠졌을 것이다.

“멜!”

덥석!

그 순간 누군가가 자신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뒤를 돌아보니 뛰어왔는지 땀에 젖어 있는 세르베인이 보였다.

“한참 찾았잖아. 위험하게 왜 그런 곳에 서 있는 거야.”

평민으로 가장한 평상복.

뒤로 높게 올려 묶은 머리.

다정한 황금빛 눈동자.

익숙한 산호빛 머리칼.

‘너는 여기에 존재하는데 나는 무엇을 본 걸까.’

멜은 다급히 고개를 돌려 바다를 바라봤다.

하지만 자신이 본 존재는 사라지고 없었다. 어쩌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미쳤다는 걸.

하지만 이렇게 다시 확인하게 되니 식은땀이 흐를 것 같았다.

“어디 아파? 왜 그래? 아…… 바다를 오랜만에 봐서 그러는 거구나.”

‘내가 미쳤다는 걸 알면 세르베인은 어떻게 반응할까?’

멜은 알고 있었다. 세르베인은 늘 자신을 버릴지 말지 저울질한다는 걸.

저택에 있는 동안,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자 자신을 버리려고 고민했던 사람이다.

여전히 세르베인은 제가 제정신이 아닐까 봐 때때로 불안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진실을 숨기고 말했다.

“……응. 바다를 너무 오랜만에 봐서 그랬어.”

“그럼 조금 더 있을까?”

“아니야. 괜찮아. 배 타러 가야 하잖아. 배에서도 바다는 볼 수 있어.”

멜은 세르베인의 손을 잡고 바다에서 등을 돌렸다.

제가 미쳤다는 사실을 들켜서는 안 된다.

세르베인은 뒤돌아 힐끔힐끔 바다를 보면서도 제게 끌려와 걸음을 맞췄다.

* * *

“세 명이 다라구?”

선장은 고작 세 명을 태우면서 이렇게 큰 배를 빌린 것에 의아해했다.

그는 두둑한 생명 수당을 받은 것에 대해 의문을 품었는지 두려운 얼굴을 했다.

“거…… 불법적인 일은 아니지?”

“선장님은 그저 배만 안전하게 몰면 됩니다.”

내가 싱긋 웃고 지나치자 그는 떨리는 눈동자로 우리 셋을 훑었다.

하지만 그 시선이 검은 베일을 쓴 멜에게 향하자 그는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어, 어흠. 나는 그럼 이만 선장실로 가야겠네.”

그는 후다닥 선장실로 돌아갔다.

멜과 알테슈메그는 배 갑판에 서서 풍경을 바라봤다.

나는 그 둘을 남겨 두고 선장을 따라갔다.

웬일로 멜은 따라오지 않았다.

“잠깐만요, 선장님.”

“왜 그러지?”

“지금은 날씨도 맑고 바다도 잠잠하지만…… 언제든지 바다가 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배를 운행하는 건 내 평생의 업이었어. 아가씨보다는 내가 잘 안다만?”

“압니다. 그래도…… 일단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았어요.”

처음에 늙은 선장은 내 말에 자존심이 상한 듯 보였다.

하지만 내가 끝까지 그를 존중하자 이내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미소를 지어 주고는 선장실에서 나왔다.

배가 전복해서 인명사고가 날 것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다.

아무리 내가 바다로 가면 재수가 없다지만, 배를 한 번도 타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날씨가 좋을 때마다 오기로 몇 번이나 탔었지…….”

그때마다 배가 심하게 흔들리고, 큰 파도가 덮쳤다. 하지만 한 번도 누군가가 죽는 일은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뱃멀미는 심하겠지만 괜찮으리라.

저벅저벅.

나는 일행들이 있는 갑판으로 돌아왔다.

항구를 바라보니 여러 사람이 우리 배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렇게 큰 배에 세 명만 타?”

“희한한 일이네…….”

“수도로 간다던데, 돈이 많은 집 자식인가 봐.”

“쉿……! 조용히 해. 저기를 봐.”

그들은 이렇게 큰 배에 세 명만 탔다는 걸 의아해했다.

그러다가 곧 멜의 얼굴을 가린 베일을 보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귀족의 정부와는 엮이기 싫은 거죠.”

알테슈메그가 말을 걸어왔다.

배가 출발하고, 사람들의 시선이 멀어지자 멜은 베일을 벗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알테슈메그가 물었다.

“그 베일의 의미는 알고 쓴 겁니까?”

“알고 있어.”

나는 그쪽으로 다가가려다가 숨을 멈췄다.

멜은 나와 똑바로 눈이 마주쳤지만 곧 피해 버렸다.

땅으로 향한 그 시선은 구슬퍼 보였다.

나는 멜에게 베일의 의미에 대해 설명해 준 적이 없었다.

당연히 귀족의 정부라는 의미로 준 게 아니니까.

그저 얼굴만 가리라는 의미에서 건네준 것이었는데.

“잠깐만……!”

황급히 다가가 변명하려 했다.

뒤늦게 나를 발견한 알테슈메그는 당황했다가 곧 무표정을 가장했다.

본인은 잘못한 게 없다고 부러 당당한 척하는 모양새였다.

내가 다가가기 전, 멜은 생기 없는 눈을 치뜨며 알테슈메그를 바라봤다.

입이 움직이는 걸 봐선 뭐라고 말한 것 같지만 들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네가 의미 부여할 주제는 못 되니 입 다물어.”

“아니, 무슨……! 공작님. 방금 들으셨-.”

멜의 말을 들은 알테슈메그를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그는 내게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무시하고 멜에게 곧장 다가갔다.

“오해하지 마. 나는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 그냥 네가 위험하게 휘말리는 게 싫어서 잠시 얼굴만 가리게 하려고 한 거야.”

“알고 있어……. 괜찮아. 나는 다 이해해.”

멜이 내 두 손을 붙잡아 왔다. 희고 고운 손이 단단하게 깍지를 잡아 왔다.

하지만 수심에 잠긴 얼굴은 여전히 구슬펐다.

“설령 네가 나를 정말 그런 의미로 여긴 것이라고 해도 나는 괜찮아.”

나는 희게 질린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나의 실수였다. 내가 무심코 한 행동이 그에게 상처를 준 것 같았다.

“아니야. 절대 아니야. 미안해. 사람들이 널 쳐다봐서 문제가 생긴 건 네 잘못이 아닌데…… 내가 잘못 생각했어. 얼굴 가리지 마.”

“정말……? 하지만 그러면 세르베인이 곤란해지잖아.”

“그땐 네 얼굴이 아니라 사람들 눈을 가리면 되는 거 아닐까?”

나는 제법 현명한 답안이라 생각해서 물었다.

멜은 감동받은 얼굴을 했다. 그의 푸른빛 눈동자가 기쁨으로 일렁였다.

“맞아. 넌 그렇게 말해 줄 거라고 생각했어.”

그 반응을 보니 내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명확해진 것 같았다.

나는 확신을 얻기 위해 알테슈메그에게도 물었다.

“경도 그리 생각하지?”

바로 옆에서 잠시 잊혔던 알테슈메그는 오만상을 찡그린 채 억지로 웃었다.

“진짜 끼리끼리……가 아니라, 참 어울리는 한 쌍이시네요.”

어딘가 찝찝한 대답이었다.

* * *

배가 출발한 지 30분도 안 되어서 알테슈메그는 엄살을 부렸다.

기사라는 위치가 부끄러운 체력이었다.

“저는 다리가 쑤셔서 안으로 가보겠습니다.”

“시중을 들겠다더니 상전이 따로 없군.”

“제가 다리만 멀쩡했다면 얼마든지 서 있었을 텐데 죄송합니다.”

저 남자는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건가, 아니면 사람을 무시하는 건가.

나는 알테슈메그의 뻔뻔한 낯짝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그는 흠칫, 움츠러들었지만 다시 ‘나는 잘못이 없다.’라는 표정을 부러 지어냈다.

그와 함께 있은 지 반나절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도 지켜본 결과, 알테슈메그는 은근히 소심하다.

처음 만난 날 저택에서 왜 그렇게 오만방자하게 굴었는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그래. 들어가 봐.”

나는 휘적휘적 손을 저었다.

애초에 비꼰 것도 그냥 장난으로 한 거지, 아파도 참으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어지간히도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게 좋은지 알테슈메그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그는 웬일로 멜에게도 인사했다.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멜 공자도 바다 구경 잘하십시오.”

“…….”

멜은 그 말을 무시하고 계속 바다를 바라봤다.

알테슈메그는 무시당했지만 언짢은 기색도 없었다.

멜이 인사를 무시하는 게 익숙해서 그런 것일 리는 없었다.

그가 얼마나 착한데.

‘혹시 멜에게 홀려서는 아닐까.’

동공이 열린 눈으로 알테슈메그를 관찰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알테슈메그는 또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 내가 서러워서.”

내가 뭐라 말을 걸기도 전에 그는 휙 뒤돌아 절뚝거리며 갑판을 벗어났다.

다행히 멜에게 홀린 기색은 없는 것 같았다.

배는 순조롭게 운행되는 것 같았다.

그저 푸르기만 한 수평선을 멜은 끝도 없이 바라봤다.

그 모습에서 객실로 돌아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계속 그의 곁에 있고 싶었지만, 날씨가 조금씩 추워지고 있었다.

나는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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