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 화 (57/132)

57 화

나는 뭘 당연한 걸 묻냐는 식으로 말했다.

“그럼 자네 말고 누가 사러 가지?”

“……예. 사 오겠습니다.”

알테슈메그는 이를 악문 채 억지로 웃고는 휙 뒤돌았다.

빠르게 걷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절뚝거리는 다리 탓에 그럴 수 없는 뒷모습이 보였다.

저건 다 자업자득인 걸 알아도 사람 심리라는 게…… 모질게 굴 수가 없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고 그를 붙잡았다.

“잠깐.”

그가 명백히 삐친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나는 그의 다친 다리를 보다가 일부러 비웃어 주며 말했다.

“느려 터진 걸음걸이를 보니 내가 가는 게 빠를 것 같군.”

울컥, 그가 울분을 토해 내려 했지만 나는 그를 지나쳐 걸어갔다.

“멜을 지키고 있어. 곧 갈 테니.”

그나마 다행인 건, 그는 멜에게 홀린 기색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그건 처음 저택에서 그를 봤을 때부터 그랬다.

‘그런데 멜에게 홀리지 않는 기준은 뭘까?’

나는 그 사안에 대해 고민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 * *

알테슈메그는 헛웃음을 삼켰다.

기껏 최선을 다해 빠르게 돌아왔는데, 멜이라는 남자의 반응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왜 경 혼자 돌아왔지? 세르베인은?”

첫인상부터 소름 끼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덜떨어진 애 같은 말투를 쓰더라니.

녹시렐 공작이 없자 남자는 평범한 귀족의 말투를 사용했다.

결국 그 앞에서 어린애처럼 군 것은 내숭이란 뜻이었다.

알테슈메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멜을 바라봤다.

하지만 멜은 조금의 민망해하는 기색도 없이 싸늘하게 말했다.

“그 쓸모없는 혀가 사라지기 전에 입 여는 게 좋을 거야.”

말투가 험악하기까지 했다.

누구에게서 배운 것일지는 안 봐도 뻔했다. 녹시렐 공작이겠지.

‘그래 봤자 잘난 얼굴을 믿고 권력 있는 여자에게 빌붙어 사는 별 볼 일 없는 인생이다.’

공작이 검은 베일을 사러 간 것 자체가 그 증거였다.

얼굴을 가리는 검은색 천. 성직자에게 죄를 고하는 죄인이 쓰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신성이 무너진 지금, 그 천의 의미는 달라졌다.

‘신분이 미천한 자가 귀족의 첩이 될 때 쓰는 물건이지.’

내가 참자. 급이 안 맞는 자에게 진심으로 열을 올리는 건 자신의 격만 낮춘다.

그리 생각하며 알테슈메그는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너무 공격적으로 말하지 마시죠, 멜 공자. 수도로 가면 어차피 자주 얼굴을 보고 지낼 사이 같은데 말입니다.”

“귀도 쓸모없는 것 같군.”

남자의 새파란 눈동자는 어느새 구렁텅이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초점이 흐트러진 듯한 그 시선은 분명 제정신이 아니었다.

조금 더 말을 빙빙 돌렸다가는 또 유혈사태가 벌어질 것 같았다.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려 봤을 때 멜이란 남자는 괴물 같은 힘을 갖고 있었다.

알테슈메그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공작님은 검은 베일을 사러 잠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곧 올 겁니다.”

“…….”

“제게 공자를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기다리시죠.”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덧붙였건만 멜의 얼굴은 더더욱 싸늘해졌다.

핏기조차 보이지 않던 흰 얼굴 위로 조소가 드리웠다.

“그녀가 나를 네게 맡겼다고?”

왠지 저기에 수긍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알테슈메그는 변명했다.

“아마 제 다리가 불편해서 어쩔 수 없이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웬일로 호의를 베풀더라니. 공작은 제게 엿을 먹이고 싶어서 손수 베일을 사러 떠난 게 분명했다.

악독한 녹시렐 공작다운 짓이었다.

속으로 녹시렐 공작을 욕할 때 알테슈메그는 오한을 느꼈다.

자신의 다리에 달라붙는 싸늘한 시선 때문이었다. 그는 시선을 의식하고 말했다.

“……여기서 더 다친다면 일행에 더욱 폐를 끼치게 되겠지요.”

“자네가 없어지면 해결될 일이군.”

과연 저기서 ‘없어지다’의 의미는 어떤 걸까.

일행에서 떨어진다는 의미일까, 죽는다는 의미일까.

“따라오지 마.”

멜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 매몰찬 뒷모습에 알테슈메그는 차마 ‘공작님께서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남자가 골목을 벗어나 사람이 많은 길거리로 나가는 게 보였다.

알테슈메그는 그가 걸을 때마다 인형처럼 일제히 돌아가는 사람들의 고개에 소름이 끼쳤다.

“……정상이 아니야. 아무리 잘생겼다고 해도 저게 일반적인 반응인가?”

알테슈메그는 멜이란 남자에 대해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분명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일단 그는 멀어진 멜을 쫓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아무렇지도 않게 걸음을 옮기던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이내 조금씩 절뚝거리기 시작했다.

* * *

쏴아아-.

“바다다.”

멜은 세르베인을 찾으러 시장에 가려 했다.

하지만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이끌리고 말았다.

그는 홀린 듯이 바닷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곧 아주 조금만 걸어갔을 뿐인데 세상을 반으로 가로지르는 푸른 물결을 만날 수 있었다.

“여기에 있었어…….”

허탈한 중얼거림이 튀어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바다는 저택과 그리 먼 곳에 있는 게 아니었다.

아주, 아주 가까운 곳에 바다가 있었다.

“고작 몇 걸음 걸어 나오면 바다가 있었어…….”

그걸 깨닫자 멜은 울컥,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이젠 까마득하게만 느껴지는 과거.

처음 다리가 생긴 순간,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어땠을지를 저절로 상상하게 됐다.

“어떻게든 숲을 벗어나 바다로 가려고 노력했다면 그런 일을 겪지 않을 수 있었을까?”

무의미한 가정을 떠올리게 되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자칫하면 그녀를 원망하게 될 테니까.

“……괜찮아. 너 결국 돌아왔잖아. 날…… 그 저택에서 꺼내 줬잖아.”

쏴아아-.

“그러니까 원망해야 하는 건 나야. 내가 멍청해서, 그래서 그래.”

바닷물을 앞에 둔 채 멜은 제 다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파묻었다.

어차피 이제는 상관없다.

아무리 바다를 원해도 제 몸은 돌아갈 수 없을 테니까.

그 순간, 뒤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후회돼?”

휙!

멜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정신을 놓고 있느라 세르베인이 다가오는 기척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세르베인은 자신을 싸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옛날의 일이 어제처럼 선명히 떠올랐다.

“왜? 바다가 아니라서 실망했어?”

수조에 있던 자신의 진심을 의심하던 세르베인.

“그 좁은 수조에서 네 몸을 망쳐 가며 내 비위를 맞추려 노력해도 바다로 갈 일은 없어. 그러니 호수로 가. 그게 네게도 좋은 일이잖아.”

매몰차게 말하며 끝내 자신을 호수로 보냈던 세르베인.

그때와 같은 눈빛이었다.

덜컥 심장이 멈추는 기분이 들었다.

방금 전에 ‘그랬다면 바다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 같은 생각을 했으면서. 멜은 정작 그녀를 보니 버림받을까 봐 두려웠다.

그 입에서 ‘바다로 돌아가.’라는 말이 나올까 봐 무서워졌다.

“멜.”

흰 드레스를 입은 세르베인은 웃지 않는 눈으로 상냥하게 저를 불렀다.

그 애는 늘 자신을 시험할 때 그런 식으로 말했다.

“바다로 갈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싫어.”

예상했던 질문에 멜은 고개까지 흔들며 부정했다.

울음으로 얼룩진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나는 어차피 바다로 갈 수도 없는 몸이야.”

“왜 그렇게 생각해?”

“그건…… 너도 알잖아. 내가 전과 같았다면 뭔가를 먹지 않았겠지. 하지만 아니잖아.”

“왜? 너는 이제 저택 밖으로도 나오게 되었잖아.”

세르베인은 허리를 살짝 숙여 자신과 시선을 맞춰 왔다.

멜은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 뱀의 속삭임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제 어깨를 잡고 귓가에 속삭였다.

“게다가 음식 먹은 지 오래되지 않았어?”

멜은 애써 떠오르는 생각을 밀어내며 부정했다.

“그건 그냥 식욕이 없어서 그랬던 것뿐이야. 좀 있으면…… 또 배가 고플 거야.”

“인간은 하루만 굶어도 배가 고픈 게 정상이야.”

“아니야. 네가 괜찮다고 했잖아. 기억 안 나?”

멜은 똑똑히 기억했다.

세르베인에게 식사를 차려 줬을 때, 그녀는 제게 배가 고프진 않냐고 물었었다.

고프지 않다고 말하니, 그러면 됐다고 말했었다.

“그러면 문제없는 거야. 왜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는 거야.”

그 말에 세르베인은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멜은 문득 그 노란 눈동자가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눈에는 애정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면 이건 어때?”

이윽코 세르베인의 산호빛 머리칼처럼 붉은 입술이 열렸다.

“혹시 모르잖아. 바다로 들어가 봐.”

그 제안은 너무 유혹적이었다.

“별거 아니잖아. 잠깐 들어갔다가, 못 견딜 것 같으면 나오면 돼.”

멜은 홀린 듯이 바닷물을 내려다봤다.

그 제안은 정말로…… 괜찮게 들렸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감이 왔다.

한번 저 물에 발을 담그는 순간, 세르베인의 곁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직감이 있었다.

“그런 말 하지 마. 네 곁에 있겠다고 말했잖아.”

“거짓말하지 마. 네가 나한테 그럴 이유가 없다는 걸 알아.”

옛날에 나누었던 대화가 반복됐다.

그때, 곁에 있고 싶어서 말하지 못하는 척을 했다고 말했지만 세르베인은 믿어 주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세르베인은 자신을 믿어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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