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화
멜을 배려해 인적이 드문 골목길을 선택했다.
항구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예전에 자료 조사를 마친 골목이었다.
“저, 저저, 저기. 히히힉.”
하지만 골목에 들어선 순간, 어떤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구석에서 술을 마시고 잠들어 있던 노숙자였다. 우리의 발소리를 듣고 깨어난 듯했다.
골목길을 선택한 이상 이상한 사람을 만날 가능성을 염두에 두긴 했다.
하지만 멜과 나에게 위협이 되진 않을 테니 별로 걱정하지 않았었는데.
비척비척.
그는 홀린 듯이 눈을 부릅뜨고 이상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씻지 못한 썩은 내와 술 냄새가 훅 밀려들었다.
“이, 이름……이 뭐야……?”
“……저요?”
나는 기분이 더러웠지만 일단은 대답했다.
꽤 익숙한 일이었다.
낯선 행인이 젊은 여성만 보면 시비를 거는 일쯤이야, 너무 흔히 겪어서 세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핏발 선 눈은 오롯이 멜을 향하고 있었다.
남자가 부른 사람은 내가 아니라 멜이었다.
“너, 너 말이야……. 히히. 나랑 가, 가, 같이 가자.”
그가 덥석 멜의 손목을 잡았다.
주정뱅이의 손쯤이야 얼마든지 쉽게 털어 낼 수 있을 텐데 멜은 가만히 서 있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무표정한 것이겠지만 나는 알았다.
멜은 겁에 질려 있었다.
내 목숨을 위협하던 인간들은 너무나 쉽게 처리했으면서, 지금 이 남자에게는 겁을 먹어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 손 놔.”
분노가 치밀었다.
남자는 이제 멜의 손목을 잡고 당기고 있었다.
하지만 멜이 우뚝 선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아 못 끌고 가고 있었다.
“나는 분명 그 손을 놓으라고 말했어…….”
이성이 흐릿해졌다.
살면서 이토록 화가 난 적은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저택에 기사들이 닥쳤을 때도 시선에 기분이 나쁘더라니.
결국 내 가설이 맞았다.
멜은, 인어는 사람을 홀리게 했다.
성별은 관계가 없는 것 같았다.
“가자. 내, 내가…… 잘해 줄게. 히히히!”
멜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충격을 받은 건지 멍하니 바닥만 보고 서 있었다.
동시에 체념한 얼굴이었다. 그는 이 상황이 제법 익숙해 보였다.
나는 충동적으로 바닥에 굴러다니던 술병을 집어 들었다. 남자가 마시던 술병이었다.
쨍그랑!
갑자기 들린 날카로운 파열음 때문인지 멜은 고개를 들었다.
소음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퍼억!
하지만 내게는 그다음의 기억이 없었다.
* * *
“세르베인. 내가 처신을 잘할게. 그러니까 진정해!”
“녹시렐 공작님. 정신 차리십시오!”
눈을 떴을 때 멜은 나를 앞에서 끌어안고 있었고, 알테슈메그는 나를 뒤에서 포박하듯 팔을 잡고 있었다.
갑자기 두 사람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 버린 상황이 어리둥절했다.
나는 황당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뭐 하는 거야?”
“세르베인!”
멜이 안도한 얼굴로 나를 꽉 끌어안았다.
“윽…….”
상당히 갈비뼈가 아팠지만 참아 냈다.
내 신음 소리를 들은 건지 멜이 황급히 힘을 조금 풀었다.
알테슈메그도 곧 내 팔을 잡고 있던 손을 놨다.
그가 손을 뗀 곳에는 손바닥 모양으로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내 팔을 잡느라 오른손의 상처가 찢어진 모양이었다.
옷에 묻은 핏자국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알테슈메그가 말했다.
“불쾌하시겠지만 핏자국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내가 옷에 피가 묻은 걸로 자네를 탓할 거라 생각한 건가?”
“인상을 찡그리시기에…… 아닙니까?”
“내 인성을 얼마나 인간 이하로 봤기에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불쾌해서가 아니었습니까?”
아무리 첫인상이 나빴다지만 사람을 뭘로 보는 거지.
그리고 첫인상이 나빴던 것에는 그의 탓이 컸다.
사실 굳이 오해를 풀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멜의 앞에서 냉혈한으로 보이고 싶지는 않아서 구구절절 변명했다.
“경의 손이 아팠을 것 같아서 그런 거다. 멀쩡한 사람 팔은 왜 잡은 거지?”
“멀쩡한 사람…….”
알테슈메그가 아련하게 말을 흐렸지만 나는 무시했다.
멜이 나에 대해 가질지도 모르는 오해만 풀리면 끝이다.
내게는 멜의 상태가 더 중요했다.
“괜찮아? 그 남자가 해코지 안 했어?”
“……난 괜찮아. 네 손은 괜찮아? 찢어지진 않았어? 놀라진 않았어?”
서늘한 시선으로 알테슈메그를 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내 착각인지 멜은 곧바로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이런저런 질문을 해 왔다.
“나? 난 괜찮지…….”
그런데 정작 위험한 상황에 처했던 건 멜이었는데.
별개로 그의 걱정을 받는 게 조금 기뻐서 입꼬리가 올라가려 했다.
애써 입꼬리를 제어하는데 옆에서 황당하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멜 공자? 걱정해야 할 사람은 녹시렐 공작님이 아니라 저 남자 같습니다만.”
그 말에 시선을 돌리니 바닥에 쓰러진 어느 노숙자가 보였다.
멜에게 집적대던 부랑자였다.
“……내가 왜 걱정해야 하지?”
멜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남들은 멜이 그 남자를 혐오해서 한 말로 생각하겠지만…… 나는 멜이 정말로 몰라서 묻는 말임을 알았다.
역시나 멜을 오해한 알테슈메그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멜과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것이라 짐작했는지 이젠 내게 화살을 돌렸다.
“공작님. 저도 귀족이기에, 귀족이 평민을 때리든 죽이든 죄가 되지 않는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지금은 평민으로 위장한 상태 아니십니까? 도대체 사태를 어떻게 처리하려고 그러신 거죠?”
“내가 했다고?”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러자 알테슈메그는 나에게 미친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저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내가 한 짓이 맞는 것 같았다.
내가 무슨 정신으로 그런 짓을 벌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태부터 수습하는 게 우선순위 같았다.
저벅저벅.
“다행히 숨은 쉬어. 기절 상태야.”
뒷수습을 위해 남자에게 다가가 상태를 확인했다.
두피가 살짝 찢어졌는지 피가 흘렀지만 그 외에는 괜찮아 보였다.
“중간에 멜 공자와 제가 막아섰기에 그리 끝난 게 다행인 줄 아십시오.”
어지간히 공을 인정받고 싶었는지 알테슈메그는 말이 많았다.
왕과 왕의 친구에게도 대들던 이가 평민의 목숨을 소중히 여긴 것 같진 않고, 그저 약점을 잡았다는 게 기쁜 것 같았다.
멜은 알테슈메그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내 곁에 다가와 물었다.
“세르베인. 내가 뭘 도와줄까? 뭘 하면 돼?”
나는 손수건을 꺼내 손에 묻은 오물을 닦으며 말했다.
“걱정해 주는 거야? 괜찮아.”
멜의 뒤에 선 알테슈메그가 전혀 괜찮지 않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는 아무래도 사고를 어떤 식으로 수습하는지에 대해서는 문외한 같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 * *
나와 알테슈메그는 부랑자를 병원에 데려다줬다.
병원에는 사람이 많으니 멜은 함께 올 수 없었다.
나는 놀람과 슬픔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상황을 설명했다.
“골목을 지나다가 봤는데 취객끼리 싸움이 붙었더라고요. 나중에 가보니 이 아저씨가 쓰러져 있었어요.”
병원 관계자들은 처음에는 알테슈메그의 손을 보고 그를 범인이라고 의심하다가 이내 시선을 누그러뜨렸다.
그가 이틀 전에 손과 다리를 치료받으러 왔단 걸 기억한 탓이었다.
“일단 환자분을 데려오셨다니 정말 상냥하시네요. 하지만 저희 병원의 형편이…… 그리 좋지 못하답니다.”
의사는 난처한 기색으로 상황을 빙빙 돌려 설명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돈 없는 부랑자에게 치료를 해주는 건 어려울 것 같다는 뜻이었다.
예상한 재정 상태였다. 녹시렐 저택 주변의 땅은 신성 왕국 시절, 부정한 땅으로 지정받아 타 영지와의 교류가 불가능했다.
그 탓에 아주 가난했다.
‘재정적 지원을 많이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부족했나 보군…….’
프로셴이 왕이 된 이후, 녹시렐 저택 주변은 부정한 땅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났다.
금전적 보상도 꽤 지급했다. 하지만 여전히 타 영지만큼 재정 상태가 넉넉해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제가 이 사람의 치료비를 내주고 싶어요.”
“아니, 저…… 모르는 사람을 위해 아가씨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나요?”
“싸움을 말리지 않고 그냥 지나친 게 죄송해서 그래요.”
나는 몇 번 착한 척을 해주다가, 이내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병원에서 나갔다.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알테슈메그가 내게 물었다.
“이런 식으로 저 부랑자를 치료해 줄 거면 왜 그런 행동을 하신 겁니까?”
……나도 모른다. 그때 내가 그런 행동까지 한 기억이 없으니까.
하지만 짐작 가는 이유는 있었다.
“그가 멜을 건드리려 했거든.”
어차피 귀족이 성미가 나쁘다는 건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즉 약점거리도 되지 않는 일이기에 숨기지 않았다.
내 말에 알테슈메그는 어김없이 시비를 걸어오기 시작했다.
“혹시 분노 조절에 문제가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경이 살아 있었을까?”
“죄송합니다.”
꼬박꼬박 기어오르면서도 목숨은 아까운지 사과는 잘했다.
그나마 시키는 일은 빼지 않고 의외로 꿋꿋이 한다는 점에 가산점을 주기로 했다.
나는 시계를 흘깃 보고는 말했다.
“자네, 시중을 들겠다 했지?”
“그랬죠.”
“얼굴을 가릴 검은 베일을 사 와.”
“……그걸 제 손으로 사라는 말씀이십니까?”
알테슈메그가 질색했다.
고작 그런 것 가지고 과민 반응하는 게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