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화
“사실 거짓말이야, 세르베인. 나는 절대 네게 의미 없는…… 있어도 없어도 되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아.”
그는 줄곧 고민했던 듯,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불안해하는 걸 숨기지도 못하고 말을 꺼냈다.
“수도로 가지 말자, 세르베인. 그곳에서는 내가 없어도 넌 잘 지낼 거잖아. 그곳에서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거잖아.”
그는 내가 처음 수도로 가자고 말을 꺼냈을 때부터 이런 고민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나는 네가 없으면 정말로 견딜 수 없단 말이야…….”
“아니야, 멜. 불안해하지 마. 널 혼자 두지 않을게.”
그는 여태껏 너무 힘들게 살았으니까.
그래서 멜을 수도로 데려간다면 내가 베풀 수 있는 모든 걸 베풀려고 했다.
그에게 치료사를 붙이고, 그가 음식을 먹는다면 온갖 맛있는 음식들을 대접할 것이라 다짐했었다.
100년 전, 고인의 옷이 아닌 그에게 어울리는 아름다운 의복을 맞출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가 고생하는 일이 없도록 호화로운 저택에 머물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생각 속에서 멜은 혼자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어떤 역할도 부여받지 못한 채, 존재하기만 했다.
그건 진정으로 멜을 위한 게 아니다.
나는 그를 끌어안은 채 귓가에 다정히 속삭였다.
“수도로 가면 나랑 같이 있자. 늘 함께 있자.”
“……정말?”
“그래. 너무 기뻐하진 않는 게 좋을 거야. 널 잔뜩 부려 먹을지도 모르니까.”
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
제발 쉬게 해달라며 애원하게 될지도 모를 거라고 장난을 쳤다.
하지만 멜은 웃음기 없이 답했다.
“뭐든지 할게. 나를 필요로 해줘.”
“…….”
“내가 사라지면 네가 아무것도 할 수 없게끔, 내게 의지해 줘.”
이미 의지하고 있는데 그걸 본인만 몰랐다.
지금도 그랬다. 멜이 없었다면 프로셴과 미나엘은 먼저 배를 타고 출발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멜이 존재하기에, 그가 나를 지켜 줄 수 있다고 확신하기에 가능한 계획들이었다.
그들은 내게 충성도가 걱정되는 기사를 붙일 염려를 피했으며, 안심하고 먼저 수도로 갈 수 있었다.
“비록 나는 귀족도 평민도 아니야. 너의 세상에서는 내가 가장 천한 존재란 걸 알아. 그러니 내가 널 걱정할 위치가 되지 않는단 걸 알아. 그래도 널 지키게 해줘.”
내가 대답이 없자 불안했는지 멜이 다급히 말을 붙여 왔다.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더해질수록 그가 안타까워졌다.
“아니야……. 귀족이든, 평민이든, 그런 게 뭐가 중요해. 너는 신경 쓰지 마. 넌…… 그런 인간의 관습에 얽매일 이유 없어.”
누가 감히 그를 천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단순히 그가 인어기에 인간의 관습과 상관이 없다는 뜻이 아니었다.
멜은…… 그 자체로 내 세상에서 봐왔던 이들 중 가장 애처롭고, 사랑스럽고,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였다.
어떤 존재의 가치는 신분으로 매길 수 없다.
누구든 멜을 만나면 그리 생각할 것이다.
“사실 어릴 때부터 줄곧 생각해 왔던 게 있어.”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건 나와 뜻을 함께한 프로셴만이 아는 나의 계획이었다.
그만큼 입단속을 해왔다. 왜냐하면 세간의 눈으로 보기에 파멸적인 일이니까.
또한 나의 조부모를 죽음으로 치닫게 한 죄의 시작이기도 했다.
“……증명할 수도 없는 핏줄로 사회의 계급이 결정되는 이 세상이 정말 합리적인 걸까?”
내가 녹시렐 공작이 되려는 건, 단순히 내가 그들의 후손이기에,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 싶다는 생각에 벌인 일이 아니었다.
“미천한 존재로 살아가다, 흐르는 피가 귀하다는 말 한마디에 세상의 꼭대기에 앉도록 하는 그 법도가 정말 타당할까?”
그것들은 고작 도구일 뿐이다.
정말로 바라는 것을 위해 이용할 뿐인, 그 자체로 목적이 되지 못하는 하찮은 것이다.
“나는 너와 동등하게 여겨지는 세상을 만들 거야.”
실행을 코앞에 두고 망설였던 일들이었다.
하지만 오늘로 마음이 확실히 정해진 기분이 들었다.
여태껏, 이유도 모른 채 달려왔던 길들의 목적을 이곳에서 찾았다.
“나는 너와 그런 세상에서 살아 보고 싶어.”
* * *
저택에서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멜과 나는 프로셴이 떠나기 전에 마련해 준 옷으로 갈아입었다.
오늘은 멜이 새로운 세상으로 한 발짝 나아가는 첫날이다.
드디어 그를 데리고 마을로 나가게 됐다.
물론 그 사실에 들뜨기 전에 확인할 게 있었다.
나는 멜이 저택을 나가지 못한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물었다.
“멜. 그런데 나갈 수 있겠어? 네가 저택 밖으로 나가면 아프다고 했었잖아.”
나를 호수에 빠뜨린 사람이 멜이었기에, 나는 그가 저택 밖으로 나갈 수 있단 걸 알았다.
하지만 호수보다 더 먼 곳은 가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내 물음에 멜은 흐리게 웃었다.
그는 많은 이야기를 숨긴 듯한 얼굴로 말했다.
“응…….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갈 수 있어.”
“어떻게?”
“너랑 함께면 나갈 수 있었거든.”
나는 그 말을 비유적 표현이라고 여겼다.
혼자 저택을 나가는 건 무서워서 못 했던 것이겠지.
멜은 환히 웃으며 내 손을 잡고 저택 밖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는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채,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모습에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되어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멜은 그런 내 시선에 당황하다가 무슨 의미로 받아들인 건지 서서히 얼굴을 가까이 붙여 왔다.
“녹시렐 공작님. 보필하러 왔습니다.”
그 순간에 불청객이 나타났다.
프로셴이 데리고 왔던, 나와 한차례 갈등을 빚었던 기사였다.
그는 마치 우리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사교계 특유의 가식적 웃음을 띠고 인사해 왔다.
“접때는 미처 소개하지 못했습니다. 알테슈메그 가테입니다.”
“……경이 왜 여기 있지?”
인상을 찌푸릴 뻔한 걸 간신히 참아 내고 물었다.
원래대로라면 프로셴이 데려온 기사들은 그와 함께 수도로 떠나야 했다.
갑옷이 아닌 평민의 의상을 입은 알테슈메그는 오른손에 붕대를 감고, 왼발에는 부목을 대고 있었다.
퍽이나 타인을 보필할 수 있을 만한 몸 상태였다.
“폐하께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무례를 저지른 것에 대해 꼭 만회하고 싶어서 좋지 않게 보실 걸 알지만 간곡히 부탁드렸습니다.”
예상대로 프로셴이 또 사고를 쳤다.
나는 매일매일 새로운 문젯거리를 던져 주는 그가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싫어.”
멜은 나와 단둘이 처음으로 저택에서 나왔는데 이 기사가 끼어든 게 마음에 들지 않은 기색이었다.
나 또한 그랬다.
“필요 없으니 저리 가. 보기 싫어. 세르베인한테 질척이지 마.”
싸늘한 인상의 미남이 하기에는 귀여운 투정처럼 들리는 말투였다.
보통의 귀족 가문 소생이 쓸 법한 거절의 언어는 아니었다.
알테슈메그 역시 그 점이 의아했는지 멜을 찬찬히 훑었다.
“멜…… 공자라고 하셨지요. 독특한 말투를 사용하시는군요.”
뒷일이 걱정되니 내 앞에서 설설 기는 체하지만 아무래도 연기가 서툴렀다.
알테슈메그는 멜의 신분이 의심된다는 비꼼을 잔뜩 드러냈다.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대화를 잘랐다.
“그런데 날 보필한다니. 그 몸 상태를 보면 오히려 짐이 될 것 같은데?”
“시중 정도는 얼마든지 들 수 있습니다.”
“기사가 할 수 있는 게 고작 시중드는 것뿐이라. 참 자랑스러운 말 아닌가.”
“……몸 상태가 이런 탓에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알테슈메그는 웃는 얼굴로 이를 악문 채 말했다.
이 정도 비아냥거림에 못마땅함을 드러내는 걸 보니 어지간히 곱게 자란 모양이었다.
“경은 딱히 내게 무례를 저지른 것에 대해 만회하고 싶은 게 아닌 것 같은데.”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그는 고개를 조아렸다. 그래도 여전히 기분은 찝찝했다.
이렇게나 성질을 긁어도 물러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멜을 데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경의 시중 따위 관심 없으니 알아서 따라오도록 해.”
알테슈메그가 절뚝이면서 우리를 따라왔다.
……괜히 양심에 가책을 주는 움직임이었다.
* * *
멈칫.
사람들이 많은 마을의 모습이 보인 순간 멜이 걸음을 멈췄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잡은 손은 차가웠다.
“왜 그래?”
심상치 않은 예감에 물었다.
그는 여태껏 저택에서만 지냈으니 탁 트인 공간이 낯설 수도 있었다. 심한 경우에는…… 공포증이 있을지도 모르지.
멜은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가 닫으며 머뭇거렸다.
하지만 뒤를 따라오던 알테슈메그가 가까워짐을 느끼고는 더 미루지 않았다.
“나는…… 사람이 무서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제거할 수 있는 그가 할 만한 말일까…….
솔직히 처음에는 황당함을 먼저 느꼈다.
나는 마을 사람들을 바라봤다. 짐을 옮기고 물건을 파는 사람들. 이리저리 심부름거리를 들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아이들…….
그저 평화롭고 온순하게만 보이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때까지 지켜본바, 멜의 반응에는 뭐든지 이유가 있었다.
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손을 잡았다.
“걱정 마. 아무도 널 해치지 못할 거야.”
“……그래. 넌 항상 날 지켜 줬으니까.”
멜은 여전히 희게 질린 얼굴을 했으면서 웃었다.
그저 내가 손을 잡아 주는 게 좋다는 듯이 굴었다.
그걸 보며 그의 불안을 쉽게 생각해 버렸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에 조금 더 귀 기울여야 했다.
왜 사람이 무섭느냐고, 명확한 이유를 들어야 했다.
“그렇다면 사람이 드문 길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