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화
나는 집중하고 둘의 대화를 들었다.
멜은 프로셴이 비꼬는 걸 꿋꿋이 이겨 내곤 말했다.
“응. 그랬었지. 하지만 이젠 달라. 난 이제 세르베인이 어딜 가든 함께 갈 거야.”
“네가? 무슨 권리로?”
“나랑 세르베인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거든.”
“……뭐?”
목소리만 들어도 프로셴이 당황했단 걸 알 수 있었다.
바깥에서 듣고 있던 나도 저절로 골치가 아파서 머리를 감쌌다.
‘제대로 코가 꿰이겠군.’
프로셴이 아는 건 곧 모두가 알게 된다는 의미였다.
내 혼삿길이 아주 꽉 막힐 예정이었다.
한 달 동안 못 봤던 친구의 갑작스러운 연애 소식 때문이었을까.
프로셴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꽤 긴 침묵이 유지된 후, 그는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세르베인이랑 합의된 사항이야……? 아무리 좋아도 친척끼리 혼인은…… 그 이전에 세르베인이 누군가를 좋아할 리가…….”
프로셴은 마치 고장 난 것 같았다.
그 말에는 황당한 요소가 너무 많았다.
나를 사랑도 모르는 냉혈한으로 취급하는 것도 황당했고, 아직도 멜이 내 친척일 것이라고 믿는 것도 황당했다.
처음부터 저 환장할 오해가 나를 이 저택에 직접 오게 한 원흉이었다.
아직도 그걸 믿고 있다는 것에 혈압이 올라서 문을 벌컥 열며 소리쳤다.
“친척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믿을 셈이지?”
“악!! 자는 거 아니었어? 언제부터 듣고 있었어?”
“네가 친척이라고 말하는 부분부터.”
프로셴이 기겁했고, 멜은 놀란 기색이 없었다.
그저 무표정하던 얼굴에서 반가움이 피어났지만, 곧 내 시선을 피해 버렸다.
명백히 토라진 게 보였다.
프로셴은 순식간에 낯빛이 변한 멜을 잠시 질린다는 듯이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진정하고 내게 물었다.
“하지만 친척이 아니면 이 사람이 너를, 그것도 하필 녹시렐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을 이유가 뭐야?”
그러고 보니 풀어야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 미처 프로셴에게 설명하지 못했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인데도.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미나엘에게 말했을 때와 비슷한 상황을 겪을 거라는 강력한 예감이 들었다.
“미처 설명을 못 했네. 그거 말인데……”
“?”
“멜은 인어야.”
“……밖에 누구 있나?!”
“야!”
한참 동안 프로셴을 붙잡고 그동안의 일을 설명했다.
도중에 프로셴은 몇 번이나 의사를 부르러 떠나려 했지만 겨우 막아 냈다.
그는 서서히 진정하는 듯했고, 이내 멜을 꺼림칙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이자가 인어라고……?”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멜에게 홀린 기색은 전혀 없어 보였다.
‘정말 미나엘의 말대로 내 눈에만 예뻐 보였던 건가.’
자각도 못 한 사이에 콩깍지가 씌어 버린 것에 자책할 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어느덧 배를 타러 갈 시간이 가까워졌는지, 미나엘이 프로셴을 찾아 나서는 중인 것 같았다.
달칵.
“여기 있었군.”
미나엘이 피곤한 얼굴로 이 방에 들이닥쳤다.
우리의 목소리를 듣고 이 방을 찾아낸 것 같았다.
미나엘은 이 방에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있다는 걸 알아채고는 곧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
“세르베인. 안 자고 있었나. 그런데 나 빼고 모여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지?”
“마침 잘 왔어, 너도 들었어? 이 남자가 인어래. 말이 돼?”
여전히 믿음이 가지 않았는지 프로셴이 외쳤다.
내게 미나엘을 믿지 말라고 한 것치고는 너무 친근한 태도였다.
하지만 미나엘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나도 이미 들었다.”
“정말 말도 안-.”
“그나저나 배를 놓치기 싫다면 빨리 나오도록 해라.”
미나엘은 프로셴을 쫓아내듯 방 밖으로 보내 버렸다.
시계를 보니 그 정도로 급박하긴 했다.
프로셴은 기함을 하더니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타다다닥!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니 드디어 수도로 가게 된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때 미나엘이 내 옆에 선 멜에게 말했다.
“인어니까 바다에 빠져 죽을 일은 없겠지.”
“…….”
당연한 말일 텐데 멜은 수긍하질 못했다.
하지만 미나엘은 그저 멜이 낯을 가리는 거라 생각하곤 말했다.
“원래라면 세르베인을 절대 배에 타게 하지 않았을 거다. 이건 온전히 네 존재를 믿고 맡기는 거다. 그러니 네 쓸모를 다해라.”
“세르베인이 물에 빠지게 되는 일은 절대 없어.”
“그럼 됐다.”
미나엘은 다시 나를 바라봤다.
이미 어제 작별 인사를 끝냈기에 조금 어색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먼저 말을 꺼낸 건 미나엘이었다.
“배에 탔는데 바다가 너무 험악하면 곧바로 돌려서 육로로 와라.”
“그러기엔 시간이 급하지 않겠어?”
“그 정도 시간은 벌 수 있다.”
그 당당한 선언에 나는 바람 빠진 듯 웃을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불안감이 잠재워졌다.
“미나엘, 어서 나와!”
“나는 가야겠군. 그럼 수도에서 보도록 하지.”
곧 프로셴의 부름에 미나엘이 밖으로 나갔다.
저택을 둘러싸고 보초를 서던 기사들이 그들을 에스코트했다.
곧 저택은 내가 처음 발을 들였던 날처럼 조용해졌다.
나는 다시 이 저택에 멜과 단둘이 남았음을 느꼈다.
시계를 봤다. 새벽 4시였다.
나는 서둘러 멜에게 인사했다.
“멜. 나는 아직 한숨도 못 자서 지금이라도 자러 가야 할 것 같아.”
“…….”
“너도 아직 새벽이니 더 자도록 해.”
사실 잔다는 건 거짓말이고, 그와 함께 있는 게 조금 어색해서 그랬다.
멜 역시 지금은 나와 함께 있는 게 어색할 테니 나를 따라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스쳐 지나가려던 나를 붙잡았다.
“세르베인.”
“왜?”
“……그.”
멜이 좀처럼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푸른 바다가 일렁이는 시선은 또다시 절박함을 담고 있었다.
“같이 자면 안 돼?”
* * *
남들이 하는 부탁은 아주 쉽게 거절하면서, 멜의 부탁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건 다 그의 얼굴 탓이라고 생각하며, 오늘도 나의 물러터짐을 욕했다.
새액- 색-.
멜은 아주 잘 잤다.
때때로 나를 끌어안은 그의 팔이 불편해 치우려고 하면 발작하듯 소스라치게 놀라긴 했지만, 가만히 두면 정말 잘 잤다.
“천사가 따로 없네.”
상투적인 표현이긴 했지만, 딱히 대체할 표현이 없었다.
얌전히 잠든 그의 얼굴은 순진했고, 사랑스러웠으니까.
특히나 손에 감겨 오는 그의 곱슬머리가 좋았다.
나는 이 온기 있는 불편함을 감내하기로 했다. 그러다 무심코 속마음을 중얼거리고 말았다.
“어차피 이렇게 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테니까.”
“……왜 마지막이야?”
어둠 속에서 멜이 눈을 떴다. 너무 놀라서 비명을 지를 수도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잠든 적 없었다는 듯 깨끗했다.
이제껏 잠든 척 연기했다고 하는 게 더 신빙성이 있어 보였다.
“세르베인. 대답해. 왜 마지막이라고 말했어?”
그는 어딘가에 홀린 듯 탁해진 눈빛을 했지만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또 나를 버릴 거야? 그런 계획을 짜고 있었어?”
왜 단둘이 남으면 그의 정신은 불안정해지는 걸까.
나는 서둘러 멜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그런 거 아니야. 내 말은 수도로 돌아가면 내 일이 너무 많아져서, 같이 보낼 시간이 줄어든다는 의미였어.”
“싫어. 일하지 마.”
“그건 곤란한데…….”
“……곤란해?”
버린다는 의미가 아님을 알자 멜은 아이처럼 칭얼거렸다.
그러다가도 내가 곤란하다고 말하니 그게 뭐 그리 큰 의미라고, 겁을 잔뜩 집어먹었다.
“곤란하면, 그러지 않아도 돼.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
“네, 네가 나를 장식품이나 애완동물처럼 여겨도 괜찮아. 기다리라면 기다릴게. 네가 보고 싶을 때만 얼굴을 비춰 줘도 돼……. 그러니까 버리지만 마.”
“……왜 너를 그런 것과 비교하는 거야?”
나는 곧 울음을 터뜨릴 듯 서러움을 품고 있는 두 뺨을 손으로 감쌌다.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는 절대로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주입시키듯 말했다.
“멜. 너는 장식품이나 애완동물이 아니야.”
“세르베인…….”
그 말이 기폭제인 것처럼 멜은 내 품에 고개를 묻고 울기 시작했다.
그는 더듬더듬, 과거를 회상하는 듯이 정리되지 않은 문장으로 말했다.
“난…… 줄곧 생각했어. 어떻게 해야 네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 네 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나도 그들처럼 되고 싶었어.”
미나엘과 프로셴의 이야기를 하는 걸까. 그리 생각했지만 이어 들려오는 말에 생각을 고쳤다.
그의 말은 조금 더 과거를 지칭하고 있었다.
“네가 아프면 의사가 되고 싶고, 네가 공부를 할 때면 선생이 되고 싶었어. 네가 위험할 때면 널 지키는 기사가 되고 싶었고, 늘 네 곁에서 시중을 드는 하녀들이 부러웠어.”
숨이 턱 막혔다.
그가 말하는 사람이 재종조할머니라는 것에 새삼스레 놀란 건 아니었다.
다만 내 마음이 아픈 건, 그가 그런 ‘생각’을 할 것이라고 짐작하지 못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나는 여태껏 멜의 정신이 불안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멜에게 치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뿐, 그가 ‘어떤’ 생각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게 장식품이나 애완동물 취급이 아니라면 무엇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