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 화 (53/132)

53 화

미나엘은 제 손바닥을 바라보며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한 그 얼굴은 평화롭게도 내게 되물었다.

“세르베인. 아무래도 너는 인복이 없는 것 같다.”

인어랑 엮인 게 그런 말을 들을 정도로 엉망인 일일까.

나는 내심 바깥에서 이 대화를 듣고 있을 멜을 신경 쓰며 답했다.

“글쎄. 나는 살면서 인복은 꽤 있다고 자신했는데 말이지.”

“그런가…….”

미나엘은 조금 기쁜 듯, 쑥스러운 듯, 갈피를 못 잡다가 일어섰다.

이제 정말로 할 말이 끝났는지 그녀는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럼 수도에서 보도록 하지.”

달칵.

미나엘이 방문을 열었을 때 밖에는 멜이 서 있었다. 예상대로였다.

나는 그가 미나엘을 지나쳐 곧장 내게로 올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멜은 미나엘의 앞을 가로막고 다짜고짜 물었다.

“네가 치웠구나. 그건 어디에 놔뒀어?”

미나엘은 갑작스러운 멜의 물음에도 놀란 기색이 없었다.

다만 서늘한 얼굴에 조소를 올리며 말했다.

“역시 대화를 듣고 있었군.”

“어디에 두었냐고 물었어.”

“그건 왜 묻는 거지? 허기가 져 미치기라도 했나?”

미나엘이 무표정한 얼굴로 멜을 도발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에 나는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가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둘 다 진정해.”

미나엘은 시선을 돌렸고, 멜은 온순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멜이 소름 끼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걱정하며 물었다.

“멜. 왜 그래? ……혹시 배가 고파서 그래? 먹을 거라면 얼마든지 구해 올게. 그러니까 그건 신경 쓰지 마.”

“……세르베인. 나, 그거 찾아야 해.”

멜은 애처로운 얼굴을 하고서 나를 바라봤다.

미나엘이 기가 찬다는 듯 짧게 헛웃음을 지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왜……?”

“그야…… 너를 해쳤잖아.”

멜은 칭찬을 바라는 듯 순진무구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신체 조각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범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잠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서 가만히 서 있었다.

하긴. 내 눈에는 애처롭기만 하지만 멜은 엄연히 복수를 품고 살던 이였다.

그는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는 보복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떻게 말해야 그가 복수할 마음을 잠재우지?’

온갖 생각을 쥐어짜 냈지만, 결국 설득력 없는 말만이 나왔다.

“신경 쓰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내 일이잖아.”

“거짓말하지 마. 세르베인은 저택에 돌아왔을 때 화난 기색도 없었잖아. 그건 복수할 생각이 없었던 거야.”

“……어차피 그들도 의뢰를 받은 것뿐이야. 게다가 이미 죽었는데 배후를 어떻게 찾겠어. 나는 네가 무의미하게 잔혹한 일을 하지 않길 바라.”

“그러면 너는 어떻게 알아서 할 생각이었는데?”

할 말이 없었다. 알아서 하겠다고 말했지만 사실 나는 이 일에 대해 딱히 배후를 알아내 복수를 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어떤 거짓말을 해야 상황을 풀어 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 순간, 멜이 떠올랐다.

죽으면 저택으로 돌아온다고 믿던, 인간은 100세까지도 살 수 있다고 믿던 순진한 그 모습이.

그걸 떠올리자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진실을 말했다.

“멜. 사실 나에게 이런 일은…… 너무 흔해.”

그러다 보니 내가 죽을 만큼 다치면 그건 내 탓이라고 여기는 게 일상이 되어 버렸다.

차라리 그게 마음이 편했으니까. 하지만 이것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다.

“하나하나 배후를 밝히기가 무의미할 정도로 많아. 게다가 그들이 그러는 건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함이라는 명백한 목표가 있어. 그 목표가 건재하는 한, 내가 무슨 수를 써도 나를 향한 암살 위협은 사라지지 않을 거야.”

내 딴에는 멜을 설득하겠답시고 꺼낸 말이었다.

하지만 고개를 작게 젓는 미나엘을 보니 아무래도 말을 잘못 꺼낸 것 같았다.

멜은 울 것 같은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정말 복수할 생각이 없었던 거라고?”

멜은 점점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이 상황에서도 나는 그의 정신이 불안정해질까 봐 걱정됐다.

내가 안절부절못하자 미나엘이 상황 중재에 나섰다.

“세르베인. 인어의 말도 일리가 있다. 시체라도 단서가 될 수 있지.”

미나엘이 내게 눈빛을 보냈다. 그녀는 한낱 암살자의 시체로 배후 귀족이 누구인지는 알아내지 못한단 걸 알고 있었다.

즉 그냥 적당히 미끼로 던지고, 화풀이를 끝내게 하라는 의미였다.

나는 그 뜻을 읽어 내곤 순순히 수긍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

“따라와라.”

미나엘은 멜을 스쳐 지나갔다.

멜은 입술을 깨문 채 나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곧 미나엘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반쯤 오기에 찬 걸음걸이였다.

저벅저벅.

텅!

1층에 있던 지하실을 향하는 문이 거칠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관자놀이를 누르며 눈을 감았다.

‘멜이 이 일로 얼마나 토라질까.’

그런데 토라져도 상관없으니, 제발 여기서 상태만 더 나빠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가까운 곳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니 열린 문으로 프로셴이 보였다.

“세르베인.”

프로셴이 작게 나를 불렀다. 그러면서도 계속 문밖을 살폈다.

마치 지하실에 있는 미나엘과 멜을 경계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너는 또 왜 그래.”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프로셴은 나의 귀찮아하는 태도에 쓰게 웃다가 쪽지 하나를 던졌다.

투욱.

달칵.

그는 쪽지만 방 안으로 던져 넣은 후 문을 닫았다.

나는 눈치껏 프로셴을 부르지 않고, 곧바로 쪽지를 주워 내용을 확인했다.

사락.

미나엘을 조심해.

“……이거는 또 뭐 하자는 상황인 걸까.”

돌고 도는 불신의 관계에 머리가 아파 왔다.

* * *

그날 밤. 나는 멜이 내 방에 돌아오거나, 내 방 앞을 지키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멜이 내 방 근처로 돌아오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저택 어딘가에 있을 멜을 찾아 나설 마음이 들진 않았다.

미안하지만 내게는 당장 신경 써야 하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도대체 수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둘 관계가 저 모양이 된 거지?”

미나엘과 프로셴은 나를 가운데에 끼고 서로 ‘쟤를 믿지 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두 사람 다 문제가 없어 보였다.

수도에서 무슨 문제가 생겼다기에는, 둘 다 내게 딱히 말해 주는 일이 없었다.

결국 프로셴이 낯선 기사들을 데리고 온 것도, 미나엘과 내게 자신의 피를 먹인 것도 다 이유 있는 일들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배를 타는 게 맞아. 빨리 수도에 가봐야겠어.”

미나엘과 프로셴은 새벽에 배를 타고 수도로 돌아가기로 했다.

빨리 돌아가기 위함도 있었고, 내가 배를 타는 시각과 겹치지 않기 위함도 있었다.

나는 그들이 출발한 다음 날에 배를 타기로 했다.

아무래도 내가 바다에 있을 때는 배를 타기 위험하니까.

물론 프로셴과 미나엘은 나의 결정을 몇 번이나 말렸었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시험하고 싶은 게 있었다.

“멜이 저택에서 나오게 되면 내가 배를 타도 바다가 잠잠할지 몰라.”

배를 타지 못하는 건 즈레이카 왕국의 귀족으로 살아가는 데에 불편함이 컸다.

이번 일로 그 문제가 해결된다면 내게 이득이 될 것이다.

끼익.

“아직 출발 안 했을 테니 배웅이나 나갈까.”

나는 방 밖으로 나와 미나엘의 방으로 향했다.

새벽이라 그런지 복도는 한 치 앞을 볼 수 없게 어두웠다.

“-----던데.”

멈칫.

그런데 복도를 걷다 보니 비어 있어야 할 방에서 대화 소리가 들렸다.

멜과 프로셴의 목소리였다.

‘멜이 프로셴과 대화하느라 내 방으로 오지 않았구나.’

그런데 저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 만한 거리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나는 문에 조심스레 귀를 가져다 댔다.

평소와 달리, 건조한 프로셴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을 설쳤는지 목소리가 유독 까슬해져 있었다.

“……세르베인이 보낸 편지에 의하면, 네가 지위를 넘겨주겠다고 했다더군.”

“원래 세르베인의 것이었으니까.”

“넌 아무것도 없어도 된다는 뜻인가?”

“난 세르베인만 있으면 돼.”

멜의 대답은 조금의 주저도 없었다.

나는 그 말들에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멜이 맹목적으로 굴어도 나는 그에게 그대로 돌려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사실 이런 고민은 웃긴 걸지도 모른다.

어차피 멜이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세르베인’이니까.

그 말을 들은 프로셴의 목소리는 싸늘해졌다. 조금 비꼬는 듯한 음성이었다.

그가 누군가를 앞에서 비꼬는 것은 내게 굉장히 낯선 모습이었다.

“그거 불가능한데? 넌 저택 밖으로 못 나간다며. 그녀는 나와 함께 수도로 갈 거야.”

그러고 보니 둘은 구면이었다.

오늘 둘이 대화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프로셴은 처음 만났을 때 이미 멜이 저택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건가.’

그냥 넘기려는 찰나에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왜 그런 사람에게 녹시렐 공작 지위를 넘겨주겠다고 말한 거지?’

저택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사람.

아무리 프로셴이 멜을 내 친척으로 착각했어도 이건 말이 안 되는 결정이었다.

그런 사람은 가주로서 자격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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