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 화 (52/132)

52 화

프로셴의 얼굴에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사람이 저렇게 순식간에 창백해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저게 연기라면 프로셴은 엄청난 능력자일 것이다.

처음에는 그를 의심했지만 아무래도 미나엘의 가설이 틀린 것 같았다.

‘하긴. 그와 나는 목표하는 바가 같지.’

그런데 그가 내 목표, 녹시렐 공작가를 되찾는 걸 망칠 이유가 없어 보였다.

프로셴은 당황하며 내게 물었다.

“세르베인! 너희 가문의 단체는 무슨 짓을 하고 있었어? 어째서 널 다치게 둔 거야? 도대체-.”

“널 호위하게 붙인 기사들이 그들이야.”

사실 이건 밝히지 않았지만, 녹시렐 가문의 비밀 단체는 거의 해체 직전이었다.

현재 거기에 남은 인원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나마 개개인이 실력자라는 게 다행이었다.

“그들은 이제 해체 직전이야. 인원이 많지도 않지.”

증조할아버지 때 만들어진 단체였기에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지된 게 기적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수도로 돌아가면 그들과 다시 협상할 생각이었다.

“절반은 부모님을 호위하도록, 그리고 남은 절반은 네게 붙였어. 금방 수도로 돌아갈 줄 알아서 여기에는 나 혼자 왔거든.”

지금 생각하면 미친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무모한 짓이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걸 몰랐다.

그저 미친 듯이 이 저택에 빨리 와야 한다고 생각했고, 정신을 차려 보니 저택에 도착한 뒤였으니까.

“…….”

프로셴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거기에는 미안함과 죄책감이 어려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미나엘이 입을 열었다.

“암살자를 보낸 귀족들은 세르베인이 공작 지위를 받기 전에 제거할 속셈이었겠지. 그러니 더는 미루지 마라.”

무엇을 미루지 말라는 건지는 직접 말하지 않아도 분명했다.

프로셴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가 작위 수여식을 의도적으로 미루고 있었단 건 적어도 사실임이 증명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는 순순히 미나엘의 말에 응하지 않았다.

“미안한데, 내가 작위 수여식을 늦춘 거에는 이유가 있어. 그리고 수도로 돌아가자마자 진행 시킬 수도 없어.”

“더 수작질을 부린다면-.”

미나엘이 음산하게 말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할지는 이미 계획을 끝냈다.”

그 말에 프로셴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는 무엇 때문인지 지나치게 창백해진 얼굴로 반발했다.

“계, 계획하지 마!”

“그럼 이유를 말해라.”

프로셴의 불안한 자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나 외에 다른 왕족이 있다면 어떻게 할 거야? 게다가 귀족들이 그의 신병을 확보하고 있다면?”

미나엘과 나는 시선을 교환했다.

미나엘의 찡그린 표정을 보니, 수도에 지내면서도 저 소식을 전혀 몰랐던 것 같았다.

프로셴은 쐐기를 박듯 말했다.

결국 그 모든 행동의 이유는 하나였다.

“나는 그 문제가 해결되기까지 작위 수여식을 진행할 수 없어. 너희가 날 배신할 수도 있으니까.”

배신? 우리 사이에 신뢰가 겨우 그 정도뿐이었던가?

물론 프로셴과 나는 서로의 행보에 대해 복잡한 계약으로 얽혀 있었다. 그렇긴 해도, 나는 우리가 꽤 친하다고 생각했기에 그 말이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모인 셋중, 충격을 받은 건 나뿐인 것 같았다.

미나엘은 조금의 동요 없이 냉정하게 프로셴을 추궁했다.

“난 수도에 있으면서 그런 소식을 못 들었다. 넌 그걸 어떻게 알았지?”

“알잖아, 내가 왕이 되기 전에 어디서 살았는지.”

프로셴은 쓰게 웃다가 자신의 금발을 쓸어넘겼다. 그 말에 미나엘과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내가 프로셴을 처음 발견한 곳은, 귀족들이 음지에서 잘생긴 소년, 소녀들을 데리고 향락을 즐기던 사교 클럽이었다.

“이상한 낌새가 돌기에 최근에 잠입했다가 소식을 들었어.”

프로셴의 냉정한 자안이 반짝였다. 그는 얼굴에 드리웠던 불안감, 걱정, 머뭇거림을 지워 버리고 무표정하게 말했다.

“나는 그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작위 수여식을 진행할 거야.”

* * *

“나는 이렇게 될 거라 짐작했다.”

미나엘이 보기 드물게 화를 냈다.

그녀는 내 방을 씩씩거리며 돌아다니다가 결국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외쳤다.

“프로셴이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거라고 예상했다! 수도에 있는 동안 줄곧 이상했어.”

“……그래도 이해가 되긴 해. 오죽 불안했으면 그러겠어.”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라. 우리가 작위를 가지고 있는 게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데에 더 이득 아닌가?”

“나도 그쪽이 낫다고 생각하는데 프로셴이 우리에게 가진 신뢰가 아주 바닥인 모양이지.”

나는 마치 남의 일처럼 어깨를 으쓱이며 차분히 답했다. 그동안 내 시선은 멜의 팔찌에 있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지금, 팔찌를 고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조개나 소라 껍질이 부서졌기에 실을 끼울 마땅한 구멍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그냥 새 걸로 사주면 안 되겠지……. 재종조할머니가 남긴 물건일 테니까.’

나는 노안이 올 것만 같은 눈을 몇 번이나 감았다 뜨길 반복했다.

내일 수도로 돌아갈 테니 그전까지는 팔찌를 원상 복구하고 싶었다.

그때 미나엘이 갑자기 차분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넌 아무렇지도 않나?”

“어……?”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 난 남작으로서 사는 지금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작위에 큰 욕심이 없었어. 하지만 너는 다르지 않나?”

성큼성큼 걸어온 미나엘은 나와 코끝이 닿을 만큼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그녀의 재색 눈동자를 이렇게나 가까이에서 본 건 처음이었지만, 나는 마치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다는 데자부를 느꼈다.

‘아직도 죽고 싶으십니까?’

머릿속 음성과 비슷하지만, 하지만 다른 말이 들렸다.

“혹시 지친 건가?”

미나엘이 걱정스럽고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그냥 잘생긴 남자 한 명 데리고, 이런 갈등 없이 한적한 곳에서 살고 싶어진 건가……?”

나는 멍한 얼굴로 미나엘을 바라봤다.

너무 황당해서 웃어 주려고 했는데, 미나엘이 너무 진지했기에 웃음이 안 나왔다.

“아니, 왜…… 그런 오해를……하냐. 절대 아니야.”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얼마든지 그런 삶을 원할 수도 있지. 내겐 솔직히 말해도 좋다.”

“진짜 아니라니까…….”

더듬더듬 오해를 풀어 보려 노력했지만, 미나엘은 전혀 듣지 않는 기색으로 말했다.

“……아까 주방에 물을 마시러 갔을 때 이상한 걸 발견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들었다.

미나엘이 말하는 ‘이상한 것’에 대해 짐작 가는 게 있었다.

하지만 멜이 정상적인 식재료를 사용하면서 저택에 있던 그것들은 다 치워 버린 걸로 아는데.

팽팽 돌아가던 사고는 이내 내가 암살자들에게 습격당했던 일로 도달했다.

아주 좋지 않은 생각이 들었다.

‘혹시 아까 나를 주방으로 못 들어가게 막으려 했던 게…….’

생각이 미처 마무리되기 전에 미나엘이 여전히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본 채 입을 열었다.

“여기에 먼저 도착한 너라면 이미 알고 있겠지.”

“아니야.”

“널 심문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너를 위한 것이니, 솔직해지는 걸 추천하지.”

끼익-.

풀썩!

미나엘이 너무 가까이 다가왔기에 점점 뒤로 기울던 상체가 결국 침대 위로 눕고 말았다.

하지만 미나엘은 멀어지지 않고 내 몸 위로 올라왔다.

그녀는 내 얼굴 양옆을 팔로 지탱한 채 나를 내려다봤다.

그 의중을 알 수 없는 얼굴을 나는 가만히 바라봤다.

나는 변명이 통하지 않을 걸 알았기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미나엘은 특유의 무감각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버리라고 한다면 들을 건가?”

“못해. 이미 약속했어. 내가 책임지겠다고.”

고집스러운 말이 나왔다.

그 순간 미나엘이 조금 웃은 것 같기도 했다. 꽤 자조적인 듯, 혹은 예상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래.”

“…….”

“넌 그럴 것 같았다.”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던 미나엘은 내 위에서 몸을 치웠다.

“어차피 정체는 암살자들이겠지. 네가 좋아하는 게 너무 눈에 보이니 그걸로 문제 삼지는 않겠다. 이미 증거도 내 손으로 다 처리했으니 걱정 마라.”

미나엘은 방 밖으로 나가기 위함인지 뒤돌았다. 그때까지도 충고는 계속되었다.

“다만 수도에서도 그러면 곤란하다. 네가 그를 개선시키도록 해.”

“……개선할 필요도 없어. 그동안은 밖으로 나가지 못하니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것뿐이야.”

“그렇다면 다행이고.”

미나엘은 이제 용건이 없다는 듯, 문고리를 잡았다.

하지만 잠시 문 앞에 선 채 가만히 있었다.

“미나엘?”

내 물음에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시 돌아와 내 옆에 털썩 앉았다.

영문을 몰라 멀뚱멀뚱 미나엘을 바라봤다.

곧 미나엘이 입으로는 다른 말을 하며 내 손바닥 위에 글자를 적었다.

“그런데 정말 배를 타도 괜찮겠나? 조금 시간이 걸려도 육로를 통해 수도로 오지 그래.”

밖에 인어가 서 있다. 알고 있나?

나는 멜이 그나마 대화 중에 방 안으로 뛰쳐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에 의의를 둬야 하는지 고민하며 답했다.

“괜찮아. 너랑 프로셴을 먼저 보내려니 미안해서 빨리 가야겠는걸.”

원래 그랬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