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화
‘움직임이 매끄럽지 않아. 실력도 미나엘보다 아래야.’
그는 멜에게 검을 휘둘렀지만 그런 느린 검에 멜이 당할 리 없다.
멜은 맨손으로 인간의 신체를 분리할 수 있었다.
인간인 이상, 그를 이길 수 없다.
쾅!
“어, 언제…….”
멜이 기사를 벽에 밀치고 검을 빼앗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인간의 속도가 아니었기에 기사가 창백한 얼굴로 떨었다.
하지만 멜은 아무런 감흥도 없이 기사의 손바닥에 검을 찔러 넣었다.
푹!
“아아악!”
“다시는 세르베인을 욕보이지 마.”
찔꺽!
멜이 서늘한 얼굴로 찔러 넣은 검을 비틀었다.
그쯤에 나는 결론을 내렸다.
‘그저 가문의 뒷배로 기사가 된 자다.’
그는 고작 손바닥이 뚫리는 정도의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나약해 빠진 정신머리였다. 이젠 제 손에서 흐르는 피에 거품까지 물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젓다가 멜을 말렸다.
“멜, 그쯤 해. 죽이는 건 곤란해.”
그 말에 멜은 곧장 검을 뽑았다.
촤악-!
피가 사방에 튀었다.
일부러 그걸 노리고 멜이 검을 비틀어 뽑은 탓이었다.
“…….”
멜은 잠시 청소할 일이 걱정되었는지 후회하는 얼굴로 핏자국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내 눈에나 귀엽지, 다른 사람의 눈에는 어떤 잔혹한 생각을 하는지 두려워할 모양새였다.
“지, 지혈하겠습니다.”
“으윽!”
다른 기사가 그 기사의 손을 천으로 둘러싸 지혈하는 모습이 보였다.
제 손도 스스로 지혈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 저게 기사가 맞는지 의문스러웠다.
“이번에는 내가 방심했지만-!”
그는 여전히 나와 멜을 적대적인 시선으로 보며 소리쳤다.
나는 소매로 멜의 얼굴에 튄 피를 닦아 주고, 기사에게 말했다.
“자네의 행동 때문에 조만간 또 한 가문이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기겠군.”
스릉-.
나는 프로셴이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그가 했듯, 그저 겁을 주기 위한 용도였다.
“세르베인……?”
장식으로 달고 다니던 검이지만, 갑자기 빼앗기자 프로셴은 당황한 얼굴을 했다.
내가 정말로 살인이라도 저지를까 두려워하는 얼굴이었다.
마찬가지로 점점 흔들리기 시작하는 기사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그를 향해 옅게 웃고는 낮게 말했다.
당사자가 아니라면 이 시기에 절대 꺼낼 수 없는 말이었다.
“일가가 몰살된 두 번째 가문으로 말이야.”
“녹시렐 공작……!”
“그 나이가 되도록 혀가 짧군. 더 짧아지길 바라나?”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철그럭!
갑옷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날 만큼 기사가 빠르게 무릎을 꿇었다.
녹시렐 공작이 돌아오리라는 소문이 암암리에 귀족들 사이에 퍼져 있었는지 추측이 빨랐다.
‘……애초에 녹시렐 저택에 와놓고, 이 중에 녹시렐 공작이 없을 거라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순간 이 상황이 조금 작위적이라고 느꼈다.
나는 이상하리만치 쉬운 굴복을 비꼬았다.
“왕의 기사라면 이리 쉽게 굴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세르베인.”
그 순간 들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창백한 얼굴을 한 프로셴이었다.
“그만해.”
여태껏 가만히 있었던 프로셴이 이제야 나섰다.
점점 미나엘이 내게 말해 준 가설이 힘을 얻어 갔다.
프로셴이 지금껏 나서지 않은 건 미나엘을 찍어누르거나, 나를 찍어누르기 위함일 것이다.
프로셴은 늘 내가 순진해 보인다고 걱정했던 미소를 지으며 긴장감 없이 말했다.
“용서해 줄 거지? 그래도 내가 뽑은 기사인걸.”
“용서?”
나는 부러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 들었다.
평소와 다른 나의 웃음에 프로셴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나는 기사를 더 벌주기로 했다.
이건 그가 저지른 무례뿐만이 아니라, 프로셴에게 경고를 주기 위해서였다.
“3층에서 떨어져도 죽진 않더군.”
설마 하는 시선으로 프로셴과 기사가 나를 바라봤다.
나는 기사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프로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마치 그에게 명령하는 것처럼.
“그대의 죄를 용서해 주지. 올라가서 창문 열고 뛰어내려.”
* * *
멜이 내 행동에 정이 떨어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제법 성격이 안 좋게 보일 만한 행동이었으니까.
나도 살면서 들은 말이 많았다.
성격이 독하다, 여자답지 않다, 포용력이 없다. 여자가 고분고분한 맛이 있어야지, 남자에게 대들면 안 되지, 집안에서 가정을 살필 줄 알아야지, 그런 말들.
‘멜도 그런다면 마음은 아프겠지.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나는 생각보다 다정한 성격이 아니었다.
오늘 보여 준 모습은 지극히 약과였다. 그리고 그 성격을 고칠 생각도 없었다.
멜이 나를 불렀다.
나는 창문 밖으로 그 기사가 다른 기사들에게 부축받으며 마을로 향하는 모습을 보다가 커튼을 쳐버렸다.
“왜?”
일부러 평정심을 가정해 대답했다.
그의 입에서 들려올 말이 두려우면서도 궁금했다. 하지만 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실제 경험이야?”
“뭐가?”
“3층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는다는 거.”
멜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의외의 것에서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 문득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나는 실실 웃으며 멜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게 걱정됐어?”
“응.”
“걱정하지 마. 그런 적 없었어.”
내 말에 멜의 얼굴에서 긴장이 탁 풀렸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궁금한 걸 그에게 물었다.
“멜. 내가 무섭진 않아?”
“……왜 무서워?”
“내가 네 생각처럼 사려 깊은 사람이 아니라서.”
“…….”
“정확히는, 사람에게 3층에서 뛰어내리라고 명령한 사람이라서.”
마치 호수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느낌이었다.
푸른 물빛 아래, 홍채 주름 하나하나를 다 세어볼 수 있을 것처럼 투명한 눈동자가 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어떤 다정한 말로 내 행동을 포장해 줄까. 넌 어떤 식으로 내 행동을 합리화해 줄까.’
은근히 기대했지만, 그 입에서 나온 말은 맹세코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멜은 진심을 담은 듯 주저하다가 말했다.
“그…… 세르베인. 넌 원래부터 사려 깊은 사람은 아니었어.”
“뭐?”
“그래서 놀랍지 않아. 걱정 마.”
그는 나름대로 나를 위로하기 위한 말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멜을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자 뒤에서 찻물을 뿜는 소리가 들렸다.
“푸흡!”
“…….”
“……나, 난 못 들었다.”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미나엘이 딴청을 부렸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그녀가 찻물을 뱉어내고, 말까지 더듬는 걸 들었다.
나는 괜스레 억울해져서 다시 멜을 바라봤다.
‘도대체 왜? 내가 얼마나 잘해 주……지는 못했나.’
일부러 접시 조각을 밟고, 그를 몰아붙인 적이 있었다.
아마 그 외에도 몇 번 못된 짓을 했던 것 같다.
내심 반성의 시간을 갖고, 이 건에 대해서는 더 묻지 않기로 했다.
저벅저벅.
그때 기사들을 밖으로 보내고 이런저런 명령을 내리던 프로셴이 돌아왔다.
그는 응접실로 돌아와 내게 곧장 말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잖아.”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손을 못 쓰게 한 것만으로 충분했다고 생각해.”
순순히 3층으로 올라가 뛰어내려 버린 기사의 모습에 조금 양심의 가책을 느끼긴 했다.
물론 나중에 확인한 그의 얼굴은 오기로 가득 차 있었기에 금방 사라져 버렸지만.
내가 여전히 싸늘한 안색이자 프로셴이 변명했다.
“진작에 나서지 않은 건 미안해. 하지만 그는 최근에 우리 쪽으로 넘어온 가테 백작의 외동아들이었어.”
“…….”
“그러다 보니 적당히 제멋대로 굴던 걸 봐줬던 것뿐이야. 오늘은 선을 넘어 버렸지만…….”
가테 백작가라면 교황이 몰락하자 곧바로 국왕파에 붙은 가문이었다.
‘박쥐 같은 모양새가 마음에 들진 않지만…… 끝까지 교황파에 충성을 바치던 것보단 낫겠지.’
그들은 몇몇 귀족들을 밀고까지 했기에, 이제 와 몰락한 교황파에 붙을 가능성은 없었다.
귀족파가 배신자를 받아 줄 리 없다.
“이렇게까지 굴었던 건 처음이라서 미처 막지 못했어. 너무 당황스러웠거든……. 다음에는 이럴 일 없을 거야.”
내 성에 차는 변명은 아니었지만 넘어가고, 다른 것에 대해 묻기로 했다.
“그건 그렇다 치지. 그런데 내가 붙여 준 기사들은?”
“네 부모님께 붙였어. 내가 수도를 비운 동안 위험해질까 봐 걱정돼서.”
……그런 이유였다면 할 말이 없었다.
부모님은 내가 가문의 명예를 되찾는 것을 반대했었다. 너무 위험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래서 대외적으로 부모님의 존재를 숨기고 있었다.
앞으로도 부모님은 녹시렐의 성을 갖지 않고 살 계획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프로셴도 내 부모님을 걱정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제 오해는 풀렸지?”
“……그래.”
나와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것 같자, 프로셴은 제 눈가를 꾹꾹 누르더니 이번에는 미나엘에게 다가갔다.
“미나엘. 말없이 피를 먹인 건 미안해. 그런데 그건 정말 나쁜 의도가 없었어.”
프로셴은 여전히 미나엘이 그 문제 때문에 수도를 탈출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게 다가 아닌데.
미나엘은 복잡한 시선으로 프로셴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건 넘어가기로 했다. 네 덕에 세르베인이 살았으니.”
“무슨 말이야?”
“세르베인은 암살 위협에 당했다. 그리고 오늘 퇴원하고 돌아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