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 화 (50/132)

50 화

멈칫.

순간 덜컥 심장이 멈추는 느낌이 들었다.

미나엘이 저 말을 내게 했을 리 없다.

그렇다면 그 말을 들은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나는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예상대로 내 뒤에 서 있는 남자에게 어색하게 말을 걸었다.

“……왔어?”

멜이 내 뒤에서 표정 없이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나를 향했고, 때때로 미나엘을 향했다.

나는 지금이라도 미나엘의 손을 잡고 이 저택을 탈출해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미나엘은 태연했고, 멜도 곧 탁자 위에 찻잔들을 놔둘 뿐이었다.

달칵.

“차 가져왔어.”

“…….”

“나 잘했지?”

멜이 내게 사르르 눈을 접어 웃으며 물었다.

그 얼굴에는 화가 난 기색 따위 보이지 않았다.

못 들었을 리 없는데 내 말을 못 들은 것처럼 굴었다.

“응…… 고마워.”

혹시 이 차에 무슨 짓이라도 한 건 아니겠지.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잡았고 그걸 마셨다. 다행히 차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나는 맞은편에 앉은 미나엘에게 원망의 눈빛을 보냈다.

눈치가 빠른 그녀가 왜 멜을 자극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미나엘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차를 마시며 내게 말했다.

“남은 이야기는 수도로 가서 하도록 하지. 당장 짐을 챙기도록 해.”

“수도?”

그 말에 먼저 반응한 건 멜이었다.

그의 동공이 열렸다. 가뜩이나 맑은 물빛의 눈동자 탓에 그 변화가 도드라져 보였다.

멜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세르베인. 수도로…… 갈 거야?”

말투만큼은 천진했지만, 목소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방금 전 겨우 넘긴 고비가 또 찾아왔다.

“내가 전에 말했었잖아. 같이 가자고. ……잊었어?”

나는 미나엘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 멜의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는 것을 들키면 미나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멜을 내게서 떼어 놓을 걸 알아서 그랬다.

“……아니. 기억해.”

다행히 멜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그래. 수도로 가자. 네가 바라는 대로 할게.”

비록 멜의 표정이 굉장히 우울해 보였지만 그것까지 고려해 줄 수는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조금 여유가 생기는 걸까.’

마른세수를 하려는 찰나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쾅쾅!

“내일 도착할 줄 알았는데 벌써 왔군.”

미나엘이 놀라는 기색 없이 혀를 찼다.

그 말에 나 역시 저들이 누구일지 짐작했다.

이윽고 늘 잠겨 있지 않았던 녹시렐 저택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벌컥!

눈에 익은 복장을 한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들 중 가장 앞에 선 사람의 얼굴은 익히 아는 것이었다.

“다가오지 마.”

상황을 모르는 멜이 곧바로 내 앞을 막아섰다.

그 말에 가장 선두에 선 사람이 순순히 멈춰 섰다.

“멜, 걱정하지 마. 아는 사람이야.”

나는 멜을 안심시키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쇠로 된 투구 탓에 눈매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누군지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철컥.

그가 투구를 벗었다.

태양 같은 금발이 사뿐히 흩날렸다. 나른한 듯 길쭉한 눈매로 보랏빛 눈동자가 빛을 냈다.

화려한 외모의 남자는 투구를 한쪽 손에 든 채, 어울리지도 않게 발랄한 말투로 외쳤다.

“모두들 안녕. 너무 보고 싶었어!”

비어 버린 왕궁, 지금도 쌓여 갈 업무들.

그것들을 떠올리니 저절로 머리가 아팠다. 하지만 나를 보러 온 사람을 다짜고짜 구박할 수는 없어서 인사라도 하려고 했다.

“그래. 오랜만-.”

멈칫.

하지만 나는 다가가던 것을 멈췄다.

평소와 달리 이쪽을 향한 수많은 시선이 붙은 까닭이었다.

시선의 출처는 프로셴이 대동한 기사들이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나와 안면이 없는 이들이었다.

‘내가 붙여 준 기사들은 전부 어디에 두고 온 거지?’

그 순간, 미나엘이 말해 준 가설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프로셴에게 더 다가가지 않았다.

“하하. 세르베인, 왜 그러는 거야?”

프로셴이 여전히 웃음기를 띤 채 물었다.

예전이라면 멍청해 보인다고 생각할 웃음이었는데, 이번에는 그리 넘길 수가 없었다.

“일단 기사들을 내보내.”

“그건 안 돼. 이 저택이 위험할 수도 있잖아.”

“정 그렇다면 두세 명만 남기고 내보내.”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우리가 나눌 대화가 일반적인 왕과 귀족의 대화가 아니라는 걸 몰라서 묻는 걸까.

하지만 사실 더 신경 쓰이는 건 기사들의 시선이 서서히 멜에게 고정되기 시작한다는 점이었다.

“네 바로 옆의 기사랑 그리고 저쪽에 선 두 명. 그 외에는 나가게 해.”

나는 그나마 멜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 기사들을 지목했다.

내 말에 프로셴은 평소답지 않게 굳은 얼굴을 했다.

하지만 내가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기사들에게 지시했다.

“들었지? 그 세 명을 제외하곤 나가서 대기해.”

기사들은 어쩔 수 없이 저택에서 나가면서도 ‘네가 뭔데.’라는 시선을 내게 보냈다.

아직 내가 녹시렐 공작가의 후계라는 건 모르는 이가 더 많으니 그 정도는 참기로 했다.

“이제 됐지?”

프로셴은 물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를 추궁할 생각이었다.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고민할 때 나 대신 말을 꺼낸 건 미나엘이었다.

“이 시기에 왕궁을 비우다니. 제정신이 아니군.”

말을 꺼낸 미나엘의 태도는 심상치 않았다.

여태껏 몰랐는데 미나엘은 여전히 의자에 앉은 채, 시선을 찻잔에 두고 있었다.

프로셴은 그 서늘한 말에도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너희 둘이 동시에 사라졌는데 당연히 찾으러 오지. 많이 걱정했잖아. 그동안 잘 지냈어?”

“변명이 하찮군. 직접 온 건 우리를 감시하기 위해서잖나. 어지간히도 찔리는 게 많은 모양이지?”

미나엘의 얼굴에는 조금의 웃음기도 없었다.

그 순간 저택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저벅저벅.

그때 기사들 중 가장 구석에 있던 한 명이 미나엘에게 위협적으로 다가갔다.

멜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기에 골랐건만, 아무래도 잘못 고른 것 같았다.

“폐하께 예의를 갖춰라.”

이번에 프로셴이 데려온 기사들은 전부 나와 안면이 없는 이들이었다.

즉, 우리들의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았다.

스릉-.

그렇다고 해도 국왕이 사석에서 만나 편하게 인사를 나눈 사람에게 저런 식으로 구는 건 예의가 아니지만.

기사는 검의 손잡이를 잡고 과시하듯 검을 조금 뽑았다.

미나엘에게 보란 듯이 그 앞에 가까이에 선 채 한 짓이었다.

“…….”

미나엘은 심정의 변화도 없이 무표정하게 그를 올려다봤다.

하지만 그 기사에게 말을 걸진 않았다. 대화에 끼어든 것 자체가 주제넘은 짓임을 알려 주기 위해 무시한 것이었다.

“세르베인이 붙여 준 기사들은 전부 어디로 내버렸지?”

“지금 왕의 기사의 말을 무시하는 건가?”

화난 기사의 음성에도 미나엘은 무심하게 차를 마시며 대꾸했다.

이제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이자는 교육을 다시 받아야겠군.”

“뭐?”

“주인에게 눈도장이라도 찍히고 싶었던 모양인데, 눈치껏 굴었어야지.”

“이 미천한 여자가 어디서 감히!”

기사가 소리치며 검을 완전히 뽑았다.

단순히 겁을 주기 위해 검을 뽑은 것일 테다.

물론 기사의 신분으로 해서는 안 될 짓이지만 어느 단체에나 평균 이하의 인물은 존재하는 법이니까.

그 사실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별개로 이해심이 바닥났다.

내가 그 모욕을 참을 수 없었다.

“뭐 하는 짓이지?”

작위 수여식 전이라 미나엘의 정확한 신분을 모른다는 것은 변명이 되지 않았다.

그녀가 남자였다면 저 기사는 국왕 폐하와 오랜 친구 사이라 그렇다며 구석에서 가만히 대기하고 있었을 테니까.

검을 뽑지도 못했을 것이다. 귀족 남성에게 검을 들이대면 진짜로 결투가 될 수도 있다.

게다가 무장하지 않은 상대에게 검을 들이대는 건 용납되지 않는 짓이다.

“당장 그녀에게 사과해라.”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그런 걸 감히 요구하지?”

기사가 거만하게 말했다.

너무 멍청해서 반박할 의지도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아무런 자격 없이 왕과 사담을 주고받을 인간이라고 생각한 건가?

그건 프로셴에 대한 모욕이기도 했다.

왕이 밑바닥에서 구르던 존재였으니 그의 지인도 천할 것이다.

그런 생각이 근간에 있는 발언이었다.

“지금 그 말이 왕을 모욕한 건지도 모르는 건가?”

기사의 표정이 설핏 굳었다.

하지만 그는 프로셴의 눈치를 살피다가 다시 의기양양한 얼굴을 했다.

그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었다.

당장 이 상황에 개입해 기사를 벌줘야 할 프로셴은 가만히 상황을 방관하고 있었다.

“…….”

이제야 미나엘이 수도를 탈출해 내게 온 이유를 납득했다.

확실히 이상한 태도였다.

하지만 프로셴의 중재 따위 필요 없었다.

갓 기사가 되었다는 사실에 도취된 꼬맹이 하나를 말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여태껏 살아 있을 자격이 없지.

“세르베인.”

그때 멜이 내 팔을 잡았다.

그는 기사가 든 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검은 위험해. 화가 나서 그래? 내가 저걸 죽일게. 그러면 되잖아.”

“감히 나를 어쩌겠다고?”

그 말에 기사가 부들부들 떨더니 검을 휘둘렀다.

아무리 봐도 기사가 할 법한 움직임은 아니었다.

기사들에게 검은 목숨과 같은 것이다.

제 분에 못 이겨 검을 휘두르는 건 기사의 자질이 아니다.

다,임,공,유,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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