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화
그날로부터 사흘 후에 나는 퇴원했다.
그마저도 온갖 고집을 다 부린 후에야 가능했다.
“조금 곤란하군.”
병원을 나서는데 누군가가 미나엘에게 편지를 건네줬다.
편지를 확인하던 미나엘이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왜 그러는 건가 싶어 쳐다보니 미나엘이 사정을 설명했다.
“프로셴이 기사들을 이곳으로 보냈다는 소식이다. 내일쯤 녹시렐 저택에 도착할 것 같군.”
“기사들을 보냈다고? 왜?”
“찔리는 게 있는 거겠지.”
미나엘은 냉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얼음장 같은 분위기였다.
분명 내가 수도를 떠날 때까지만 해도 둘은 꽤 괜찮은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나는 미나엘을 관찰하다가 문득 그녀와 이곳에서 처음 만났을 때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네가 내게 말할 가설이 있다고 했지.”
“……그랬지.”
미나엘이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그리고 잠시 주저하다가 또 주저했다.
그 모습이 평소답지 않아서, 답답함에 독촉했다.
“무슨 일인데 그래. 너답지 않게.”
“말마따나 가설이라서. 혹시 이게 틀렸으면 어떤 상황이 생길지 불안해서 그런다.”
“일단 말해 봐. 가설이잖아.”
“하지만 가설이라고 말해도 그 누구도 그냥 가설로 여길 수 없는 영향력을 갖고 있-.”
“괜찮으니까 말해.”
나는 저택으로 향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내가 평이하게 반응하자 미나엘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프로셴이 널 이곳으로 보낸 게 실수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 실수가 아니라 실력이겠지. 프로셴은 원래 어수룩했으니까.”
“아니. 어수룩한 일 처리 탓에 비의도적으로 널 이곳에 오게 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우뚝.
나는 걸음을 멈췄다.
녹시렐 공작가로 향하는 숲길에서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미나엘의 표정은 절대로 농담을 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쏴아아-.
바람이 불었다. 나무들이 흔들리고, 그림자가 져 스산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미나엘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는 네게 녹시렐 공작 지위를 주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생각도 못한 곳에서 돌이 던져졌다. 그 순간이 참 느리게 지나갔다.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괜히 이 심각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더욱 평정심을 가장하고 말했다.
“공작 지위를 안 주기 위해 저택에 보내는 수를 쓴다고?”
“그래.”
“그건 이해가 안 가는걸. 방법이 너무 어수룩해. 저택에 가는 것만으로 내가 공작 지위를 얻지 못할 리 없잖아.”
“내가 왜 더 기다리지 않고 널 데리러 왔는지 생각해 봤나?”
갑자기 미나엘이 조금 어긋난 질문을 해 왔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미나엘을 숲속에서 처음 본 순간에 떠올렸던 의문이 그것이었다.
미나엘은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최대한 줄인다는 걸 표 내며 말했다.
“나는 네가 돌아오자마자 작위 수여식을 진행해야 하니, 미리 준비하자고 몇 번이나 프로셴에게 말했다.”
“…….”
“그 시기에 너는 수도로 돌아오는 계획을 늦추겠다는 서신을 보냈고, 프로셴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작위 수여식을 준비할 의사조차 보이지 않았어.”
“거기엔 다른 사정이 있었던 게 아닐-.”
“나는.”
미나엘이 내 말을 끊고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네가 내 말을 맹신할까 걱정해야 했던 게 아니라, 전혀 믿지 않는 것을 걱정해야 했군.”
“너를 못 믿는다는 게 아니야. 그저-.”
“가도록 하지.”
미나엘이 나를 앞질러 걸으며 말했다.
명백히 그 주제에 대해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곧장 화제를 바꿔 버린 그녀는 나를 뒤돌아보며 무감각한 얼굴로 말했다.
“어서 저택으로 가도록 하지. 네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곳이잖아.”
미나엘과 나는 아무런 대화 없이 걸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서 굉장히 불편했다.
뭐라도 화젯거리를 꺼내고 싶지만, 그녀와 대화할 만한 요소에는 전부 프로셴이 엮여 있었다.
결국 유일한 다른 화젯거리는 인어뿐이었다.
“저택에 가면 주의할 게 있어.”
결국 하지 않으려 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인어를 되도록 보지 마.”
아무런 호응 없이 내 말을 듣기만 하던 미나엘이 드디어 반응을 보였다.
“왜지?”
“내 생각에는 인어가 사람을 홀리는 것 같아.”
내 말을 들은 미나엘은 잠깐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트집을 잡을 여력도 없다는 듯, 피곤한 안색으로 답했다.
“참고하지.”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으니 우리는 어느덧 저택 앞에 서 있었다.
저택을 둘러싼 으스스한 담장을 넘어 정원을 지났다.
겨울이 다가오는 탓에 정원은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프로셴이 무섭다고 벌벌 떨 만하군.”
미나엘이 혀를 차며 저택 외관에 대한 평가를 남겼다.
그만큼 녹시렐 저택은 정교하고 아름답기보다는 음울한 면이 두드러졌다.
그래도 다시 프로셴의 이름을 언급하는 걸 보면 미나엘이 그에게 그렇게나 적대심을 품은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속으로 안심하고 미나엘의 한쪽 팔을 붙잡았다.
“넌 여기서 기다려.”
“왜 그러지?”
“사실 인어가 좀…… 마음이 아파.”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빙빙 둘러 말했다.
“성격은 참 착해. 아주 여리고 마음도 여려. 다만 마음만 살짝, 아주 살짝 아프거든…….”
하지만 미나엘은 그런 설탕 발린 말에 현혹되지 않았다.
그녀가 서늘한 안색으로 곧 장례라도 치를 듯이 물었다.
“그런 놈을 데리고 가겠다고?”
“일단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세르베인 라헨 녹시렐!”
살면서 처음으로 미나엘에게 풀네임으로 불렸다.
간담이 서늘해지고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타다닥!
쾅!
나는 재빨리 저택으로 달려 들어가 문을 닫아 버렸다.
다행히 미나엘은 화가 난 것과는 별개로 내 말을 들어주기로 했는지, 저택 안에 따라 들어오지는 않았다.
“이 음침한 저택이 익숙해지는 날이 올 줄이야…….”
사흘 만에 돌아온 저택이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본 탓인지 조금 정겨운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나는 몇 번 심호흡하고는 1층 곳곳을 돌아다니며 멜을 찾아다녔다.
“멜? 어디 있어?”
주방에도 들어가 보고, 서재며 1층의 모든 방에 들어가 봤다.
하지만 멜은 보이지 않았다.
……어째 데자뷰가 느껴졌다.
이쯤 되면 소란스러워서라도 내려올 텐데 멜은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역시 2층에 있으려나.”
나는 계단을 올라갔다. 멜은 아마 그분의 방에 있을 것 같았다.
저벅저벅.
도착한 2층 복도의 풍경은 깨끗했다.
그날, 암살자들의 피로 복도가 범벅이 되어 있었는데 멀끔했다. 멜이 청소를 한 것 같았다.
내가 없어도 그가 사람답게 살고 있었다는 게 다행이었다.
만약 그가 식음을 전폐하고, 저택에 시체를 방치한 채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면 굉장히 마음이 아팠을 테니까.
똑똑.
노크를 하고 문을 열자 예상했던 풍경이 보였다.
멜은 침대 위에 새우처럼 몸을 웅크린 채 누워있었다.
“멜?”
조심스레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하지만 깊은 잠에 빠진 듯, 이불도 덮지 않고 품 안에 허름한 보석함을 안고 있는 형체에서는 미동도 없었다.
“……자나 보네.”
나는 살금살금 그의 곁에 다가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여전히 멜은 잠에서 깨지 않았다.
그저 잠을 자는 것일 뿐일 텐데 그 모습을 보자 심장이 막막해왔다.
왜 그의 감은 눈꺼풀 위로 슬픈 눈동자가 보이는 것 같을까.
그는 값이 나갈법한 장식들이 모조리 뜯겨나간 보석함을 왜 저렇게나 소중히 끌어안고 있는 걸까.
사실 멜을 보면 곧바로 왜 호수에 날 빠트렸냐고 추궁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곤히 자는 모습을 보니 또 그런 생각이 달아났다.
사락.
“그래…… 자는 사람을 깨워서 추궁하는 건 못된 짓이지.”
나는 가만히 그의 머리칼을 쓸어 주다가 일어섰다.
아무래도 멜의 상태가 생각보다 나쁜 것 같지 않아서 미나엘을 데려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와 지내면서 멜은 꽤…… 초반보다는 안정된 상태가 되었으니 이제 외부인을 만나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침대를 벗어나 밖으로 나가려 할 때, 멜이 눈을 떴다.
“……세르베인?”
내가 깨운 건가. 멋쩍은 얼굴로 어색하게 웃었다.
멜은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곧 그의 표정이 서서히 일렁이기 시작했다.
나는 웃고 있는데, 내가 웃는 걸 본 멜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나는 혹시나 그가 나를 붙잡고 저택을 못 나가게 할까 봐 서둘러 말했다.
“멜. 나 밖에 좀 갔다 올게. 금방 올 테니까 가만히 있어. 알겠지?”
“안 돼!”
멜이 내 손을 붙잡기 위해 급히 상체를 일으켰다.
미처 균형도 잡기 전에 손을 뻗은 탓에 그는 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쿠당탕!
“멜!”
다급히 그를 부축하기 위해 함께 바닥으로 무너져내렸다.
물론 그가 겨우 침대에서 굴러떨어진 정도로 다칠 리 없지만, 그런 이성적인 생각보다 걱정이 앞섰다.
“괜찮아? 가만히 있으라 했잖아. 도대체 왜…….”
그의 다리며 몸을 이리저리 살필 때 멜이 내 허리를 껴안았다.
그가 내 허리에 고개를 묻었다.
“안 돼. 가지 마!”
“…….”
“가, 가지 마세요. 꿈에서 깰 때까지 계속 같이 있어 줘요…….”
그는 내 허리를 껴안은 채 애원했다.
“제발…… 제발 같이 있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