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 화 (47/132)

47 화

미나엘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세르베인……? 살아 있는 건가?”

드디어 조금 감각이 풀렸다.

나는 굳어 버린 혀를 억지로 움직이며 말했다.

“어엉어어…….”

“뭐라는 거지?”

“어……언.”

“병원?”

……내가 말했지만 그래도 이걸 어떻게 알아듣지?

내가 멍청하게 눈만 깜빡이자 미나엘이 빠르게 나를 업어 들었다.

미나엘이 뛰듯이 빠른 걸음으로 마을로 향하며 말했다.

“세르베인. 아프겠지만 들어라. 네게 할 말이 많다.”

‘야…… 나도…….’

나는 혀가 움직이지 않아 고개만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 모습에 미나엘이 혀를 차며 빠르게 분석했다.

“독에 당한 모양이군. 하지만 이 정도로 의식이 있다면, 의사를 만나기만 하면 죽지 않을 거다.”

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이미 죽을 고비는 넘긴 것 같으니.

“어쩌면 프로셴, 그 녀석 덕분에 독에 내성이 생겨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

……여기서 그 이름이 왜 나와?

“그놈은 제정신이 아니야.”

미나엘이 욕을 읊조렸다.

평소에 프로셴이 답답하다고, 그에게 왕이라는 자각을 가지라고 몇 번 눈치를 주기는 했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뜻으로 팔을 움찔거렸다.

내 뜻을 이해한 미나엘이 한숨을 쉬듯 말했다.

“프로셴이 나한테 제 피를 먹였다. 음식에 줄곧 피를 타고 있었어.”

“으어?”

“넌 그동안 왕궁에서 지냈으니, 왕궁으로 출퇴근한 나와 달리 더 많이 섭취했겠지.”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내 주변에는 왜 이렇게 인간을 식용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은 건가.

나는 조금 더 설명을 바랐기에 잘 움직이지 않는 혀를 써서 말했다.

“얼……엉애.”

“너도 알고 있겠지. 왕족들은 대대로 독에 내성이 있다는 걸.”

미나엘이 나를 업고 달리며 설명했다. 말마따나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왕족들은 반복된 독살 위험으로 인해 생과 사를 넘나들곤 했다.

하지만 동물이 환경에 익숙하듯, 그들도 익숙해진 걸까.

마침내 그게 유전으로 이어져 그들은 대대로 독에 내성을 갖고 태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프로셴이 왕족이라고 확신을 내린 것도 그 때문이었지.’

왕족들은 그것이 피부든, 장기든, 혈액이든, 어느 방식으로든 일반인보다 월등한 독 내성을 갖고 있었다.

미나엘은 단단히 기분이 뒤틀렸단 걸 드러내며 말했다.

“제 딴에는 우리가 독 내성이 없으니 걱정돼서였다고 말하더군. 아무튼 그게 진짜 효능이 있는지는 너를 보며 확인해야겠군.”

나를 실험 대상으로 보는 듯한 미나엘의 발언은 잠시 묻어 두기로 했다…….

‘그런데 그렇다고 피를 먹이는 게 정상인의 머리로 할 법한 생각인가?’

조금 아연해졌지만 어딘가 나사가 풀린 프로셴이라면 그럴 수도 있었다.

“그리고 너한테 온 건, 그거랑 별개로 알려 줄 가설이 생겨서다.”

미나엘이 이곳에 온 이유가 프로셴의 기행 때문이 아니라니.

이쯤 되니 내가 없는 동안 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아는 게 두려워졌다.

호수에 처박혔던 몸은 더 이상 생각하길 허락하지 않았다.

오늘 하루 사이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피곤함에 눈이 감겼다.

“……베인! 눈 떠라! 세르-.”

미나엘이 다급히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의식을 놓아 버렸다.

* * *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병원 특유의 약품 냄새를 맡았다.

어두운 방 안에 은은히 켜진 촛불은 주홍빛이었다.

사각사각.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미나엘이 보였다.

그녀는 희미한 촛불에 의지해 서류 작업을 하고 있었다.

수도를 벗어나도 계속 일을 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일어났나? 몸은 어떻지?”

내가 깨어난 걸 눈치챈 미나엘이 안경을 벗으며 물었다.

그녀의 짙은 회색 눈동자에 촛불이 담겨 반짝였다.

독의 영향인지 온몸에서 근육통이 느껴졌지만 나는 괜찮은 척 어깨를 으쓱였다.

“아주 괜찮아.”

“다행이군.”

“구해 줘서 고마워. 그리고 옷도.”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은 레이스가 주렁주렁한 드레스가 아니었다.

평민들이 입을 법한 평범한 옷차림이었다.

개인적으로 녹시렐 저택에 있던 드레스만 입었던 입장에서 이 옷이 훨씬 편하고 좋았다.

“그래. 그런데…… 세르베인, 옷 취향이 변했나?”

역시 그 질문을 할 거라고 예상했다.

온통 흰색으로만 이뤄진 그 옷은 평범한 디자인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약 100년 전의 의복이니까. 게다가 레이스가 잔뜩 달린 디자인은 내가 즐겨 입는 종류가 아니었다.

“내가 알기로 너는 그런 옷은 불편하다고 싫어했는데. 게다가 그 옷은 유행이 좀…… 아니다. 옷에 유행이 뭐가 중요하겠어. 좋아하는 옷을 입으면 되는 거지.”

미나엘은 평소답지 않게 횡설수설하며 어떻게든 내 편을 들어 주려고 노력했다.

나는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산 건 아니고, 녹시렐 저택에 있던 옷을 빌려 입은 거야.”

“백 년쯤 전에 버려진 저택에 옷이 있었다고?”

“응, 좀 이야기가 길어.”

언젠가는 설명해야 하는 사정이었다.

멜을 수도로 데려간다면 적어도 미나엘과 프로셴, 그 둘에게는 멜의 존재를 숨길 방법이 없었다.

인어라는 비상식적인 말을 해도 이 둘은 믿어 줄 것이다.

나는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사실 나는 여태껏 인어랑 저택에서 지냈어.”

“독이 뇌에도 영향을 미쳤나 보군. 의사- 읍!”

나는 기겁하며 급히 미나엘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 시각에 멀쩡한 사람을 진찰하라고 의사를 부르는 건 실례였다.

……아무래도 곧바로 내 말을 믿어 줄 것이란 건 내 착각인 모양이었다.

“진정하고 들어. 나 제정신 맞으니까.”

미나엘이 심각한 얼굴로 제 입에서 내 손을 떼어 내곤 물었다.

“그렇다면 답해라. 네가 나를 어디서 처음 만났지?”

여전히 제정신 아닌 사람 취급이었다.

나는 이 정도는 감내하자 생각하며 옛날이야기를 들먹였다.

“마녀사냥 때. 감옥에서 처음 만났지.”

“……기억은 멀쩡하군. 설명해라.”

미나엘이 얌전해지자 나는 인어의 부정적인 요소를 최대한 제거하고 설명했다.

그가 미쳤다거나, 나를 재종조할머니와 착각한다거나, 그런 것들 말이다.

즉 상당히 멜을 좋게 포장해서 설명했다.

그리고 나의 계획을 말했다.

“그러니 난 내일 바로 저택으로 가봐야겠어.”

하지만 미나엘의 반응은 싸늘했다.

“굉장히 비논리적인 결론이군. 결국 널 감금하려던 놈의 손아귀로 걸어 들어가겠다는 소리잖아. 탈출하려 했다며? 그런데 왜 그러는 거지?”

“…….”

“게다가 널 호수에 빠뜨린 게 그놈의 소행이라고 했지 않았나?”

미나엘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나는 어설프게라도 멜을 변호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근데 그건 아마 내가 죽었다고 착각을 해서 그런 것 같아.”

“죽은 사람을 호수에 빠뜨린다고? 그게 더 미친 거 같군.”

미나엘이 기함했다. 사실 이게 당연한 반응이었다.

다만 나는 평소에 멜이 어떤 상태인지를 알았다.

그의 위태로운 정신 상태라면 이 정도 일은 그다지 충격적인 것도 아니었다.

이미 인육도 목격했으니 더 놀라울 것도 없었다…….

“인어든 뭐든, 나는 네가 그 집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미나엘에게는 멜이 인어라는 것보다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았다.

혹은 멜이 인어라는 것 자체를 거짓이라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있잖아, 내 말 믿기는 해? 인어가 존재한다는 것 말이야.”

의외로 미나엘은 덤덤하게 수긍했다.

“믿는다. 생각해 보니 상당히 신빙성이 높은 것 같군.”

“왜?”

“그야 넌 바다에 못 가니까. 조상 중 한 명이 인어에게 죄를 지어, 후손인 네가 고통받는 것이라면 상당히 개연성이 있지 않은가?”

그것까진 미처 생각을 못 해봤는데.

정말 조상의 업 때문에 내가 여태껏 바다랑 안 맞았던 것인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문제가 있다.

우리 집안에서 바다와 엮이면 재수가 없는 건 나뿐이다.

“하지만 다른 가족들은 멀쩡히 배를 잘 타는걸?”

“그럼 랜덤인가 보군.”

“주장이 무책임하네…….”

미나엘의 가설을 들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나는 그걸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도 다시 본래의 이야기로 돌아와 말했다.

“아무튼 내가 말하는 건 그 저택에 쭉 머물겠다는 게 아니야. 그 사람을 데리고 같이 나가겠다는 뜻이지.”

“심신미약자를 책임지겠다는 말인가?”

나는 차마 멜이 심신미약자가 아니라고 편을 들어 줄 수 없었다.

내 마지막 양심이었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아.”

“인심 한번 좋군.”

미나엘은 그렇게 비꼬았다. 하지만 곧 평소답지 않게 꽤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얼굴을 본 건 처음이었다. 미나엘은 자신의 아버지와 오빠를 제 손으로 죽였던 날에도 무덤덤했던 사람이었다.

비록 그들이 미나엘을 마녀로 팔아넘겨 돈을 받았긴 하지만 말이다.

“괜-.”

왜 그러냐고, 괜찮냐고 물으려는 사이에 미나엘은 평소의 상태로 돌아왔다. 

녀는 고개를 살짝 젓더니 체념한 어조로 말했다.

“네가 원하면 그리하도록 해라. 네 선택을 존중하지.”

미나엘은 그 말을 남기고 방에서 나갔다.

늘 그랬듯, 그녀는 내 선택을 끝까지 반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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