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화
멜은 늘 죽음을 떠올렸다가, 세르베인을 떠올리고 충동을 참아 냈다.
하지만 또 어느 날에는 그녀를 사랑하고, 증오하고, 또다시 자살을 결심했다가 보류했다.
그렇게 조각조각 난 정신들과 인격 속에서도 한 가지 공통점은 있었다.
“세르베인은 살아 있어.”
멜은 자신이 세르베인을 죽였다는 사실을 철저히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녀가 돌아올 리 없다는 사실을 잊기로 했다.
하지만 진실은 무의식 속에 남아 있었다.
* * *
“호수로 가자, 세르베인.”
멜은 세르베인의 감은 두 눈 위에 키스했다. 울면서 그 얼굴 위에 속삭였다.
“내가 널 저주할게.”
어느새 멜은 호수 앞에 멈춰 섰다.
다시 세르베인과 호수에 오게 된 것이었다.
멜은 울고 있는 주제에 가까스로 미소를 만들어 내며 말했다.
“널 호수에 가둘 거야. 그러면 난 저택을 못 나오겠지. 대신 넌 다시 이곳에 오게 될 거야.”
“…….”
“우리 또 만날 수 있어. 너도 기쁘지……?”
인어는 인간이 아니다.
인간의 형태를 하고, 인간처럼 추위를 느끼고, 인간처럼 허기를 느끼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멜은 완전히 인간이 될 수가 없었다.
멜은 이제 기억해 냈다. 어째서 세르베인이 자신을 다시 찾아올 수 있었는지. 자신이 호수에서 무슨 짓을 했었는지.
제게 다리가 생긴 것처럼, 세르베인이 저택으로 돌아온 것처럼. 인간의 형태가 된 인어에게는 자연을 거스르는 힘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저주였다. 상대를 저주하고, 그 자신도 저주받는 주술적 힘이 있었다.
“널 기다리는 거는 너무 무섭고 힘들었지만…… 나 이번에도 할 수 있어. 이번에는 착하게 기다릴게.”
이제는 세르베인을 호수로 보내 줘야 했다.
하지만 멜은 도저히 팔에서 힘을 풀 수가 없었다.
멜의 팔이 덜덜 떨려 왔다. 맨 정신으로 세르베인을 다시 호수에 빠뜨리는 짓을 할 수가 없었다.
어제 일처럼 선명한,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작은 몸체가 호수 아래로 사라졌다가 어느 순간 떠올랐던 끔찍한 부유감이 선명했다.
이제 ‘100년이 되기 전에 세르베인은 올 거야.’ 같은 희망은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멜은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
“흐윽…… 세르베인……. 우리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어?”
“…….”
“내가…… 다시 널 만나는 기적이 이뤄질까? 내가 건 저주가 이번에도 성공할까……?”
처음부터 미처 의도하지 못하고 이뤄진 일들이었다.
세르베인의 시체를 다시 호수에 빠뜨렸을 때 멜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제가 건 저주가 무엇이든, 정말로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 확신하지 못하고 저지른 일이었다.
“사랑해. 내가 널 너무 사랑해…….”
사랑하는 사람을 정할 수 있다면 널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멜은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왜냐하면 세르베인을 사랑하는 건 너무 힘들었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알았다. 그녀 외에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불가능하다.
인어의 마력으로 인해 절대 집착을 끊을 수 없는 굴레 속에서도 저를 보내주겠다고 한 사람은 세르베인 뿐이었으니까.
그건 기적이었다. 기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많이 보고 싶을 거야.”
투욱.
풍덩!
마침내 멜은 세르베인을 호수에 빠뜨렸다.
물속에 빠진 몸체가 힘없이 추락했다가 떠오르려 했다.
그 끔찍했던 악몽, 사실은 꿈이 아니었던 그날의 일이 눈앞에서 재생되는 것 같았다.
“아…… 윽.”
정신이 무너질 것 같았다. 멜은 제 관자놀이를 부여잡았다.
여기서 정신을 놓아서는 안 된다.
제 사랑이 다시 올 날까지 버텨야 한다.
“이번에는 널 다시 보면 제대로 알아볼게. 나 이번에는 널 올바르게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
멜은 울면서 발걸음을 돌렸다.
사랑하는 사람의 몸이 떠오르는 모습을 또다시 지켜볼 수는 없었다.
그는 홀린 듯이 중얼거리며 저택으로 걸음을 옮겼다.
“또 몇 번의 계절이 지날 거야……. 널 닮은 수선화는 나 혼자 창문을 통해 구경해야겠지.”
멜은 허전한 왼쪽 손목을 강박적으로 긁어 댔다.
흰 손목이 붉게 달아올랐다.
“벽난로를 뗀 적은 없지만 미리 치워 뒀어. 하지만 그건 네가 다시 돌아오면 쓰도록 할게.”
문득 날이 매우 싸늘하다고 느꼈다.
세르베인이 자신을 떠났던 날도 이러했다.
멜은 차가운 겨울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그날, 세르베인을 배웅하며 바라봤던 하늘이 떠올랐다. 별이 쏟아질 듯 아름다웠던 겨울밤의 풍경이 선명했다.
“그날, 내가 네게 어서 돌아가라고 말했었지.”
추울까 봐, 그 애에게 빨리 들어가라고 말했었다.
그게 죽고 싶을 만큼 후회됐다.
멜은 바들바들 떨리는 입꼬리로 억지로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네가 그 저택에서 죽음을 맞이할 줄 알았다면 절대 널 보내지 않았을 거야.”
추웠던 그 날, 너는 누군가와 함께 있었을까?
누군가는 너의 죽음이 두렵지 않도록 곁에서 안심시켜 줬을까?
“나조차도 혼자 지내는 건 너무 외롭고 무서웠어. 넌 얼마나 무서웠을까.”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멜은 심장이 녹아내리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저택으로 돌아갔다.
* * *
드르르르륵!
저택으로 돌아온 멜은 저택에 널브러진 암살자들의 다리를 붙잡고 계단 아래로 질질 끌고 내려갔다.
그의 얼굴은 언제 울었냐는 듯, 창백하고 감정이 없었다.
“또 허기가 찾아올 거야. 그걸 대비해야 해.”
세르베인이 있었던 동안에는 괜찮았지만 이제 또 배가 고프기 시작할 것이다.
벌써부터 그런 기미가 느껴졌다.
콰직!
얼마 후, 멜은 빛이 사라진 눈동자로 걸레를 가져가 복도에 묻은 피를 닦았다.
부서진 벽을 복구할 수는 없었지만 핏자국을 닦아 내자 꽤 복도는 멀쩡해 보였다.
“…….”
멜은 바닥에 흩어진 팔찌 장식품들을 바라봤다.
작은 조개와 소라 껍질들은 곧 부서질 듯 약해 보였다.
그것들을 소중하게 주워 들었다.
저벅저벅.
달칵.
멜은 세르베인의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애의 방에 있는 빈 보석함에 팔찌의 잔해를 담았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보석함은 비어 있었다.
심지어 보석함을 장식했을 보석들도 보이지 않고 움푹 파인 자국만 남아 있었다.
“……세르베인.”
조심스레 보석함을 끌어안았다.
멜은 자신이 머물던 공작의 방으로 향하지 않고 세르베인의 방 침대에 누웠다.
아직 그 애의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늘 네 곁에 있을게…….”
이제는 그녀를 홀로 두지 않으리라.
당신의 것을 훔쳐 달아난 인간들과 달리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리라.
“그러니 나를 용서해 줘.”
멜은 눈을 감았다.
아주 긴 수면을 취할 준비였다.
* * *
‘미친.’
한편 호수에 빠진 세르베인은 생각했다.
미친 인어가 저를 수장하려 한다고.
‘물속인가?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물에 빠진 순간 정신을 차렸다.
누가 나를 물에 빠뜨렸는지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멜이다. 그분이 멜을 호수에 가두었듯, 멜도 나를 호수에 빠뜨린 모양이다.
‘복수인가? 하지만 이제 와서 왜?’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수영쯤이야 얼마든지 할 줄 아는데 빌어먹게도 몸이 마비되어 움직이질 않았다.
눈을 뜰 수 없으니 그저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느낌만 들었다. 썩 불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겨울날 물속에서 태평하게 그런 감각을 즐기고 있으면 죽겠지.’
덜덜
손끝부터 움직이려 했는데 미약한 경련만 일었다.
그 와중에 다행인 건, 숨은 쉴 수 있다는 것이다.
‘다행히 얼굴은 물 밖으로 나와 있는 모양이야.’
마치 배영하는 사람처럼 호수 위에 떠 있는 모양이다.
나는 그리 결론을 내리고 다시 손끝부터 움직이려 노력했다.
바로 몸이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서서히 감각은 돌아왔다.
차가운 호수의 물이 느껴졌다. 저체온증이 걸리기 딱 좋은 온도였다.
저벅저벅.
그때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순간 간담이 서늘해졌다.
호수에 떡하니 떠 있는 저를 발견하지 못할 리 없다.
운이 좋다면 자신이 죽은 걸로 착각할 수는 있겠지만, 증거로 어느 부위든 잘라서 가져갈 게 분명하다.
발소리가 지척으로 가까워졌다. 그런데 예상을 깨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세르베인!”
쿠당탕!
첨벙!
뭔가가 내던져지는 소리가 나며, 물속에 누군가가 뛰어드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미나엘 헥사바임이었다.
“눈을 떠라! 세르베인! 숨을 쉬어!”
미나엘이 다급히 나를 호수 밖으로 끌어냈다.
미나엘은 나를 흔들다가 심장 압박을 하기 위함인지 내 몸을 바닥에 똑바로 눕혔다.
그때가 되어서야 나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개인적으로 심장 압박은 맨정신으로 받기에는 너무 아파서 혼신의 힘을 다해 눈을 치켜떴다.
“……악!”
미나엘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시체같이 굳어 있던 사람이 갑자기 눈을 뜨니 그럴 만도 했다.
오랜만에 마주한 미나엘은 꽤 이상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마치 어느 가게에서 일하는 직원처럼 머리를 뒤로 질끈 묶고, 허름한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배달원의 옷차림이었다.
시선을 옮기니 미나엘이 내팽개친 것으로 추정되는 식료품 박스가 널브러져 있었다.
아마 식료품 배달원으로 변장을 하고 저택에 잠입할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이곳에 올 생각을 했지? 분명 편지만 봤을 땐 내가 잘 지내는 줄 알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