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화
어차피 꿈이다. 그러니 괜찮다.
네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왜 나를 버렸는지, 그런 것들은 이제 흐릿했다.
알 법하고, 모를 법했다.
이미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잊은 것 같기도 하고…….
아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널 다시 만났는데.
“……하하, 세르베인…….”
“멜……! 너 왜 그러는 거야!”
“왜냐니. 네가 날 가뒀잖아.”
“…….”
“너무 좋다. 여기에 있으면 넌 다시는 날 떠나지 못하겠지? 이제 너도 여기에서 지내.”
“…….”
“……세르베인?”
멜은 호수에 빠진 세르베인의 모습을 보며 기뻐했다.
분명 처음에는 환희했다. 그러다가 절망했고…….
“세르베인!!”
이내 더더욱 절망하며 비명을 지르다 잠에서 깼다.
마지막으로 본 그 애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몸을 급하게 끌어 올려 안았던 것이 마지막 장면이었다.
“허억……! 허억……!”
잠에서 깬 멜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멍하니 올려다보니 익숙한, 세르베인의 아버지의 방 천장이 보였다.
다행이었다. 그 일들은 전부 다 꿈이었다. 아주 끔찍한 악몽이었다.
“왜, 왜 움직이지 않았지? 그냥 물에 들어간 것뿐이잖아. 너, 다치지도 않았잖아. 나오고 싶었다면 나올 수 있었잖아. 그런데 왜…… 으윽…….”
그 순간, 멜은 침대 위에서 머리를 부여잡고 웅크렸다.
이상하지. 분명 원했고, 꿈꿔 왔던 일인데 멜은 무심코 그게 악몽이라고 생각했다.
여태껏 복수만 바라보며 저택 밖으로 나가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멜은 줄곧 자신에게 세르베인을 원망할 자격이 있는지 되물었다.
하지만 세르베인에게 어떤 사정이 있었어도…… 제 고통은 어딘가에서 보상받아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 꿈을 꾼 것 같았다.
“……생각하지 말자. 어차피 꿈이잖아.”
멜은 그런 뒤숭숭한 꿈 따위는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저택을 청소하고, 책을 읽고, 저택을 노리는 인간들을 처리했다.
하지만 눈을 감아 잠깐의 암전을 느끼는 순간에도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눈을 깜박이는 0.1초의 시간 동안 떠올리는 것도 끔찍한데 도저히 계속 눈을 감고 잠들 자신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버틸 수 있는 한도까지 몇 날 며칠 동안이나 밤을 지새우다, 쓰러지듯 복도에서 잠들었다.
충분히 그런 장면쯤이야 피곤함에 잊었다고 생각할 즈음에 잠들었다.
하지만 또 그 꿈을 꿨다.
“멜. 어디 가는 거야?”
또다. 멜은 꿈속에서 또다시 세르베인의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혹은 제가 이끌었거나.
멜은 세르베인이 호수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봤다.
……혹은 제가 빠뜨렸거나.
분명히 말하건대, 자신은 세르베인이 미우면서도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 애를 호수에 단순히 조금 가둬 둘 생각이었다.
어차피 꿈이니까 그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지만…….
“아아악!!”
비록 꿈이었지만 복수는 달콤하지 않았다.
고통스러워하고, 나중에는 체념하며 죽음을 받아들이던 세르베인의 모습이 잊히질 않았다.
어차피 인간은 죽으면 집으로 가게 된다고 하지만, 죽음을 맞이하는 세르베인의 모습은 상상 이상으로 두려웠다.
“아, 아니야. 난 그런 걸 바란 적 없어.”
멜은 스스로가 끔찍했다.
이전에 세르베인이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해서라도 저택으로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자신을 죽이고 싶었다.
“미, 미, 미안해. 앞으로 그런 걸 바라지 않을게. 내가 잘못했어.”
멜은 꿈이라도 그 끔찍한 행동을 반복하지 않으려 했지만, 몸은 주인의 의지를 벗어나 늘 그렇게 행동했다.
꿈은 계속, 계속, 계속, 계속- 반복됐다.
“이상해. 왜 늘 같은 꿈을 꾸는 거지……?”
이쯤 되면 뭔가가 이상했다. 멜은 직감적으로 불길함을 느꼈다.
“혹시 네가 죽은 걸까?”
네가 저택으로 돌아왔는데, 내가 찾지 못해서 그런 꿈을 꾸는 걸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들자 멜은 저택의 모든 방을 열어 보며 세르베인을 찾기 시작했다.
“세르베인. 온 거야?”
“…….”
“어디에 있어? 길을 잃은 거야?”
미친 사람처럼 조용한 저택 내부를 빙빙 돌아 봤지만 세르베인은 없었다.
죽은 건 아닌 모양이다.
“그럼 그 꿈은 뭐지?”
멜은 식은땀에 젖은 제 얼굴을 훔치며 생각했다.
어쨌든 무슨 일이 생긴 건 분명했다.
“아무래도 호수로 가봐야겠어.”
입 밖으로 말은 꺼냈지만 사실은 실행하기 두려웠다.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기에 그런 끔찍한 꿈이 반복되는 것일까.
그걸 확인하려면 두려워도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끼익-!
멜은 호기롭게 대문을 열었지만, 그 순간 주저앉고 말았다.
갑자기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끔찍한 고통 때문이었다.
“악! 으…… 으극……!”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통증이 밀려왔다.
저택에서 몇 발자국 채 나가기도 전에 정신을 잃게 만들 정도의 통증이 몰아쳤다.
그 통증은 그날 하루로,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았다.
꿈을 꾼 이후, 멜은 저택을 나설 때마다 끔찍할 만큼 몸이 아팠다.
그래서 몇 번이나 호수로 가려다가 포기하고 저택으로 돌아와야 했다.
“아악! 허억, 허억……!”
하지만 계속 꿈이 끊기질 않아서, 이제는 정신이 깨어 있는 상태에도 그 환상이 보여서 더는 미룰 수 없었다.
덜컥!
멜은 죽을 만큼 아픈 몸을 이끌고 저택을 나왔다.
오늘은 반드시 호수로 가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세르베인을 만나기 전에 제가 먼저 미쳐서 죽을 것 같았다.
비틀……비틀…….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술에 취한 사람처럼 좌우로 쓰러지듯 비틀거리며 멜은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침내 호숫가에 도착했을 때-.
“세……르베인?”
멜은 거기서 누군가를 발견했다.
가지런히 누워있는 갈색 머리칼의 여자였다.
그 머리칼은 멜이 늘 떠올리던, 바다에서나 봤던 아름다운 산호의 색이 아니었다.
하지만 알았다. 제 영혼이 말하고 있었다.
생김새는 다르지만 그 사람은 세르베인이었다.
……분명, 세르베인이었다.
“아, 아니야. 세르베인. 너, 너…… 나한테 말했잖아. 죽으면, 저택으로 온다고 했잖아.”
멜은 갈색 머리칼의 여자를 조심스레 흔들었다.
이건 세르베인이 아니어야 했다.
“저기, 너 왜 여기에 있어? 누구야? 저리 가. 여긴 네가 올 곳이 아니야.”
하지만 시체를 흔들다가 툭 꺾인 손목에 멍 자국이 보였다.
“…….”
멜은 숨을 멈추고 그 멍 자국에 손을 가져다 댔다.
혹시 모를 가정 때문이었다.
“아.”
멍든 자국이 제 손의 크기와 일치했다.
그걸 깨닫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
멜은 그 이후, 자신이 호숫가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정신이 들었을 때는 저택 안으로 돌아온 뒤였다.
그리고 다시는 저택 밖으로 나가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세르베인은 언제 올까?”
분명한 건 그날 이후 멜의 정신이 조각조각 부서졌다는 것이다.
* * *
멜은 세르베인이 죽었다는 걸 잊어버렸다.
그녀를 제 손으로 죽였다는 걸 잊었다.
“세르베인. 언제 올 거야? 보고 싶어…… 사랑해…….”
멜은 세르베인을 사랑해서, 그 애가 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렸다.
원망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이상했다. 그저 세르베인이 너무 좋았다.
“왜 나를 버렸어!”
그러다가 어느 날은 또 세르베인이 너무 증오스러웠다.
멜은 그 애가 너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저택에 있겠다며!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 전부 거짓말이었어?!”
그래서 세르베인이 오면 복수해야지, 똑같이 갚아 줘야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증오로 오락가락하는 정신 속에서도 다짐하는 게 있었다.
“하지만 절대로 널 물가로 데려가진 않을 거야……. 왜냐고? 글쎄…… 글쎄……. 왜 그런 걸 물어?”
물어보는 이가 없는 허공에 대고 말을 걸었다.
멜은 눈앞에 세르베인이 보이는 것처럼 살포시 웃었다.
하지만 정신이 돌아온 또 어느 날에는 체념했다.
“사실 알고 있었잖아. 인간은 죽으면 끝이야.”
이미 저택에 존재하는 책들을 전부 읽어 버렸다.
다 읽어 버린 책들이 꽂힌 책장을 엎어뜨려도 새 책은 나오지 않았다.
“인간이 정말 죽어서 집으로 돌아온다면, 그 무수히 많은 책 중 인간이 죽으면 어떻게 되냐는 논쟁을 다루는 책은 없었어야지.”
멜은 글자를 모르는 게 나을 뻔했다고 생각했다.
그랬다면 일기도 읽지 못했을 테고, 책도 읽지 못했을 테니 아무것도 몰랐을 텐데.
아무것도 모른 채 너를 원망하거나, 희망을 갖고 기다리다가 지쳐서 죽음을 택했을 텐데.
“그러니까 네가 죽는다고 해도 넌 저택에 돌아오지 않아…….”
* * *
평소보다 정신이 꽤 명확한 날에 멜은 자신의 손목을 바라봤다.
종종 세르베인이 보던 인체 구조에 대한 책에는 그런 내용이 있었다.
“사람은 손목을 긋는 것만으로 죽는다며. 나도 그럴 수 있을까……?”
손목을 그으면 사람은 죽을 수 있었다. 제법 편한 죽음이었다.
피를 많이 흘리는 것만으로 죽을 수 있으니 고통도 적을 것이다.
사실 고통이 크고 작음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신체적 상해보다도 더 큰 고통을 이미 겪었고, 겪고 있는 중이니까.
“죽을까?”
멜은 진지하게 죽음을 고려했다.
“아니야.”
하지만 아직 100년이 되지 않았으므로 조금 더 살기로 했다.
“세르베인은 100세까지 살지도 몰라. 그러겠다고 말했잖아. 분명 백발노인이 되어서라도 돌아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