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화
사실 세르베인 외의 사람이 오는 건 싫었다.
하지만 세르베인이 바쁘다면 자신이 이해해야 했다.
“편지를 두고 떠날 때까지 기다린다면 위험한 일은 없을 거야……. 괜찮을 거야. 만약 내게 홀려 그물을 던져 오면 피하면 돼. 호수는 넓으니 그럴 수 있어.”
바다는 제게 말했다.
인어에겐 사람을 홀리는 힘이 있으니, 인간을 마주친다고 해도 두려워할 필요 없다고.
내가 바라는 대로 인간들은 행동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바다는 또한 걱정했었다. 나는 아직 어려서 힘을 다루지 못하니, 너무 바다의 표면으로 다가가지 말라고.
한때 멜은 바다의 말을 떠올리며 매일매일을 슬픔과 후회로 보내곤 했다.
하지만 그때 자신이 수면 위로 올라가지 않았더라면 세르베인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는 그때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다.
“보고 싶어, 세르베인.”
한참 동안 저택 쪽을 바라보던 멜은 호숫가의 바위 아래에 감쳐 뒀던 세르베인의 편지를 읽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그 활자를 읽을 때면 그 애가 제 곁에 있어 주는 것 같아서 그랬다.
지익-.
그리고 어느 날, 너무 많이 읽어 닳아 버린 편지지가 찢어지고 말았다.
“아……. 지금이…… 며칠이지……?”
그때서야 멜은 세르베인과 약속했던 한 달이 이미 한참 지나 버렸음을 깨달았다.
여전히 세르베인은 호수로 오지 않았다.
* * *
한 달이 1년이 되고, 10년이 되었다. 그리고 그 이상이 되었다.
멜은 셀 수도 없이 많은 날들을 홀로 기다렸다.
“내일은 세르베인이 올 거야.”
매일같이 그런 생각을 하며 버텼다.
하지만 어느 순간 멜은 깨달았다.
시간이 너무, 너무 많이 흘러 버렸다고.
“…….”
멜은 더 이상 호수 표면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몇십 년 동안, 발소리만 들리면 표면을 향해 헤엄쳤으면 슬슬 깨달을 법도 했다.
세르베인은 오지 않는다.
처음에는 걱정했고, 이후에는 분노했다.
“역시 장식품이나 애완동물이 맞았잖아.”
제게 남겨진 운명은 여기서 말라 죽거나, 바다로 돌아가지 못하는 인어가 되는 것뿐이었다.
“날 사랑해서 보내 준다는 말은 거짓이었어! 그냥 내게 질려서 한 말이었잖아!”
멜은 햇빛을 받아 일렁이는 표면을 바라보며 우는 듯 웃었다.
“보내 준다고 할 때 가야 했어. 멍청하게 미련이나 갖고 말이야…….”
그날 이후 멜은 호수 바닥에 가라앉아 꼬리를 껴안았다. 그리고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고기들은 멜을 걱정하며 주변을 맴돌았지만 멜은 흐리게 웃을 뿐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연기를 들이마셔 목이 상한 것도 아닌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몇날 며칠을 울던 멜은 여태껏 하지 않았던 말을 처음으로 내뱉었다.
“널 증오해, 세르베인.”
바다로 보내 준다는 말은 거짓말이란 걸 깨달았다.
죽는다는 말도, 필시 자신의 동정심을 끌어내기 위한 거짓말이었겠지.
“네가 나만큼 아팠으면 좋겠어. 내가 느낀 고통을 너도 알았으면 좋겠어.”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으니 목적을 달성한 것이었다. 그래서 떠난 거다.
멜은 화가 났다. 너무 화가 나서 눈물이 났다.
세르베인이 너무 증오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보다 몇십 년이 더 지난 후엔-,
체념했다.
멜은 인정했다. 자신은 버려졌고, 다시는 바다로 돌아갈 방법 따위 없었다.
“나는 여기에서 죽을 거고, 너는 조금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겠지.”
인간 수명은 보통 80세 정도 된다고 들었다.
그러니 세르베인은 모든 걸 잊은 채 행복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
바다가 아닌 낯선 곳에서 죽을 미래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음에 이곳에 잡혀 왔을 때는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세르베인이…… 그녀가 자신의 앞을 막고 지켜 주었을 때부터는 걱정하지 않았었다.
“너는 또 갑작스럽게 나를 버렸구나.”
늘 그 애는 갑작스러웠다.
갑자기 자신을 잡아 왔고, 가두었고, 풀어주겠다고 하고, 사랑한다고 하더니, 그 끝은 유기였다.
멜은 매일 기도했다. 살아갈 의지조차 사라졌는데, 목숨을 연명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 애를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세요.”
증오가 너무 익숙해져, 모든 감정이 메말랐는데도 세르베인은 잊히지 않았다.
“아주 잠깐이라도 좋아요. 그 애를 다시 만나게 해주세요.”
멜은 다시 한번 그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호수의 바닥에 가라앉은 채, 바다처럼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늘 기도했다.
“간지러워.”
어느 날 꼬리가 간지럽기 시작했다.
이후엔 비늘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꼬리지느러미는 갈라져 두 갈래로 완전히 분리되었다.
그리고 꼬리 역시 두 갈래로 나눠질 것처럼 선이 생기기 시작했다.
“설마…….”
본능적인 감각이 있었다. 한 번도 갖지 못했던 신체 부위를 얻게 되리라는 직감이었다.
멜은 호수 표면을 향해 헤엄쳤다.
세르베인이 오지 않을 걸 알고 체념한 후로는 몇십 년 동안 다가가지 않았던 곳이었다.
촤악!
그날, 달이 아름답게 뜬 밤에 호수 표면에서 손이 뻗어 나왔다.
뚝, 뚜욱…….
호수에서 하얀 몸체가 끌려 나왔다.
호수 밖에 나온 남자의 나신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멜은 제 발을 내려다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하, 하하하…….”
인어의 소원이 이루어진 날이었다.
* * *
두 발로 딛고 선 흙의 감촉이 낯설었다.
이제는 물 밖에서의 호흡이 어색하지 않았다.
멜은 성큼성큼 숲속을 걸었다.
늘 바라봤던 풍경. 몇십 년 동안 세르베인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지만 선명히 기억했다.
세르베인이 걸어오던 길의 방향, 그 애를 기다렸던 나날들을.
그 이전의 것들도 나열해 볼까.
세르베인의 방에서 머물렀던 순간들, 그 애와 처음 만난 순간까지도.
멈칫.
걷던 중 멜은 걸음을 멈추었다.
수조가 보였다. 저택에 있을 것이라 생각한 수조가 숲에 깨진 채 버려져 있었다.
“……나를 바다로 보낼 생각 따위, 정말로 없었던 거구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세르베인은 자신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려고 작정을 했음을 깨달았다.
수조 근처에는 버려진 해골이 있었다.
인간이 죽으면 저런 뼈대만 남는다는 걸 알았다. 바다에는 많은 인간들이 들어왔다가 목숨을 잃곤 했고, 자신도 그들을 본 적이 있었다.
스륵, 투둑…….
멜은 두 구의 해골 중 하나의 옷을 벗겼다. 인간들은 전부 옷을 입고 있단 걸 떠올린 까닭이었다.
현재 멜은 아무 옷도 입고 있지 않았기에 해골의 옷이라도 필요했다.
멜은 낡고 더러운 옷을 꿰어 입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한 발자국씩 저택이 가까워졌다. 제 발로 그곳에 걸어 들어가는 건 처음이었다.
그때서야 실감이 났다. 저택과 가까워질 때마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뇌가 녹아 버려서 생각을 할 수 없게 되는 기분이었다.
미친 것 같겠지만, 완전한 분노라기보다는…… 설렘도 있었다.
“그래. 어쩌면 수조가…… 수조가 부서져서 새로 마련한 걸 수도 있어.”
멜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갑자기 마구 긍정적 가정이 떠올랐다.
“그래. 분명 사정이 있을 거야. 응, 응.”
천천히 움직이던 걸음이 결국엔 멈추었다. 멜은 바닥에 고정했던 시선을 들었다.
이내 그는 입술을 깨문 채, 울 것 같은 얼굴로 달리기 시작했다.
“세르베인!”
타다닥!
새롭게 생겨난 발에 사정없이 박히는 돌조각이 아프지도 않았다.
그저 심장이, 가슴이 너무 아파서 다른 것들은 떠올릴 여유가 없었다.
“네가 너무 미웠는데, 분명 그랬는데, 지금도 그런데…… 지금은 그냥 네가 너무 보고 싶어.”
이상했다. 그 애를 다시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꼬리가 녹아 없어지며, 증오마저 사라진 것처럼 이상했다.
녹아내렸던 심장이 제 형태를 갖추었다.
복수를 생각했는데, 정작 기회가 오니 그저 널 다시 볼 생각에 들뜨기만 했다.
“그래도 일단 화를 내야지. 그리고…… 네가 사과를 하면 괜찮다고 해줄 거야.”
죽을 만큼 춥고, 외롭고, 괴로웠다. 자살할까 생각했던 날들이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던 날들보다 많았다.
하지만 네겐 그리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내겐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으니까 난 괜찮았다고 말할게……. 대신 다시 날 혼자 두지 말라고 할 거야.”
알고 있었다. 멜은 스스로를 잘 알고 있었다.
바보같이 그 애의 한마디에 기분이 풀려 버릴 자신을 알고 있었다.
“세르베인. 이유를 말해 줘. 왜 갑자기 날 만나러 오지 않았어?”
멜은 달리면서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마치 세르베인이 듣고 있는 것처럼 말을 걸었다.
“아주 하찮은 이유라도 좋아. 그게 뭐든 납득할게.”
그러니까 제발, 제발-.
덜커덩!
가쁜 숨을 내쉬며 멜이 문을 밀쳤다.
보통 저택은 문이 잠겨 있다는 걸 생각하지도 못하고 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문은 잠겨 있지도 않았기에 쉽게 열렸다.
“세르베인?”
하지만 이상했다. 저택 안이 너무 조용했다.
저택 안으로 들어갔을 때와 세르베인이 자신을 호수에 풀어 주기 위해 이동할 때만 봤던 내부였다. 그래서 자세히 기억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사람이 사는 집이 이렇게나 먼지가 쌓이고, 엉망으로 가구가 흐트러져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세르베인?”
길을 잃은 아이가 부모를 부르는 것처럼 멜은 그 이름을 불렀다.
“어디 있어?”
주변을 정신없이 둘러봤다. 하지만 사방이 폐허였다.
어디에서도 세르베인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