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 화 (39/132)

39 화

콰직!

오래된 탓에 액자는 쉽게 네 조각으로 분리되었다.

“이걸 받아!”

검이 없으니 액자 프레임을 사용해 암살자를 제압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무기를 건네주려는 순간에 멜은 이미 암살자 중 한 명을 붙잡고 있었다.

멜은 한 손을 암살자의 어깨 위에 올리고, 다른 한 손은 그의 턱뼈를 감싸듯 잡고 있었다.

상황을 몰랐다면 제법 우아하게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부욱!

마치 솜인형을 뜯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실제로 뽑혀 나간 건 인형의 목이 아니었다.

촤악-!

얼굴에 피가 튀었다. 복도 전체로 피가 수평선을 이루며 튀었다.

“……으아아악!”

함께 왔던 다른 암살자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사람을 해치며 살아왔다고 해도, 방금의 모습은 당혹스러운 일일 테다.

이미 나의 존재감은 잊혔고, 남아 있는 세 명의 암살자는 멜을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그들 중 한 명의 등을, 프레임을 창처럼 사용해 찔렀다.

“쿠헉!”

다행히 한 번 만에 심장을 뚫었다.

나는 내구성이 약한 프레임을 뽑지 않고, 그냥 밀어 버렸다.

쿠당탕!

남은 건 둘이다. 그 순간에 멜이 또 다른 암살자를 붙잡았기에 엄밀히 말하자면 한 명만 남았다.

“젠장!”

역시나 마지막으로 남은 암살자는 멜을 포기하고 내게 달려들었다.

사실 처음부터 그들의 목적은 나였으니, 멜에게 굳이 달려들 이유가 없었을 텐데.

이왕 버리기로 결심한 목숨이라면 나라면 등을 보여서라도 표적에게만 매달렸을 것이다.

나는 이미 처리한 암살자가 쥔 단도를 빼앗아 들었다. 그 찰나에 보이는 무기가 그것뿐이었다.

솔직히 버겁다.

나는 미나엘 헥사바임처럼 팔다리가 길쭉한 편이 아니라서, 도달 범위가 짧은 단검류는 내게 불리했다.

서걱!

나는 마치 바닥에 앉듯이 몸을 낮추어 그의 허벅지를 베었다. 깊었지만 생명에 지장을 줄 타격은 아니었다.

초보인 건지, 나 따위에게 공격을 받아 당황한 건지 그 암살자는 엉뚱한 방향으로 단검을 날렸다.

쨍그랑!

내가 가볍게 피한 단검이 엉뚱한 곳에 날아가 박혔다.

하지만 그는 곧 다른 도검류를 꺼내 내게 뛰어들었다.

그 상황이 초조하지는 않았다. 예전에 내가 위험할 때 프로셴과 미나엘이 있었다면, 지금은 멜이 있다. 내가 부족해도 그가 나를 보충해 줄 것이다.

뻗어 나온 손이 보였다. 나처럼 전략을 짜거나, 어떤 움직임을 할지 계산할 필요도 없었다.

멜은 암살자의 목을 잡고 벽면으로 치웠다. 그게 다였다.

퍼억!

콰직!

가벼운 움직임이었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벽면이 꺼질 정도로 처박힌 암살자의 몸은 축 늘어졌다.

“미안해, 세르베인. 나 때문에…….”

멜이 울먹였다. 첫 만남 때 봤던 박제된 인형 같던 아름다운 무표정에서 생동감이 떠올랐다.

그가 내 뺨에 묻은 피를 훔쳐 냈다.

“내가 좀 더 경계했어야 했어. 너한테 이런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어…….”

그런 것치고는 너무 거침없이 행동한 것 같았지만 잊어 주기로 했다.

“내가…… 싫어졌어?”

웃음이 나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가 저택을 벗어나 마주할 인간 세상의 추한 면에 비하면 이런 일은 새 발의 피 아닌가?

“아니. 전혀 아니야.”

내 말에 멜은 무너지듯 나를 끌어안았다.

시원한 그의 체온이 느껴졌다.

“네가 나를 싫어할까 봐 무서웠어.”

“안 싫어해.”

이 일로 그를 싫어하게 될 거라면, 그에게 첫 식사를 대접받은 날에 곧장 도망쳤을 것이다.

“네가 내게 질렸을까 봐 무서웠어.”

“질리다니. 그럴 일 없어.”

질릴 리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를 만난 건 얼마 되지도 않으니까.

“네가 나를 또 떠날까 봐 무서웠어.”

나는 그를 떠난 적이 없다. 나는 그분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냥 웃어 버리고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안 떠날게. 같이 가자.”

고양이가 애교를 부리는 듯 멜이 내 목과 어깨에 얼굴을 부볐다.

그의 머리카락과 숨결이 내 뺨을 간지럽혔다.

안타깝고 사랑스러운 사람. 나는 충동적으로 고개를 돌려 살짝 그의 뺨에 키스했다.

뺨에 닿는 감각에 놀란 멜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스윽-.

그 순간 발목에서 미적지근한 감촉이 느껴졌다. 불쾌하고, 얼얼한 느낌이었다.

고개를 내리니 내 발목을 스치는 가느다란 실이 보였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그 실은 그냥 넘겨 버렸던 잘못 날아간 단검과 연결되어 있었다. 금속으로 된 실이었다.

내가 흠칫 굳자 이상함을 느꼈는지 멜이 내가 보고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풀썩!

“……세르베인!!”

바닥으로 쓰러지는 시선 속에서 나는 아직 숨이 끊기지 않은 암살자와 눈이 마주쳤다.

사태를 파악한 멜은 서둘러 나를 끌어안았고, 이내 짧은 단말마의 비명이 들렸다.

“크허억!”

멜이 어떻게 그 사람을 처리했는지는 볼 수 없었다. 내 코에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세르베인! 어, 어디를 다친 거야?”

멜이 내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는 눈치가 빨라 암살자의 행위임을 알고 그를 완전히 처리했지만 내게 큰 상처가 보이지 않기에 내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는 모양이었다.

“발목에 실…… 조심해. 독이 묻어 있어.”

이 와중에도 혹시 그가 독을 모를까 걱정됐다.

하지만 다행히 멜의 하얗게 질린 안색을 보니 독이 뭔지는 아는 것 같았다.

몸이 싸늘히 식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몸이 떨려 오고, 정신을 다잡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제정신인 걸 보니 죽을 독은 아닌 것 같았다.

……물론 제때 병원에 간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인간에 대해 잘 모르는 멜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를 것이다.

나는 그가 패닉에 빠지지 않게, 내가 의식을 잃기 전에 모든 걸 설명해 주려 했다.

“멜. 밖으로 나가서…… 의사를 불러와.”

“세르베인, 세르베인……!”

“발목에 독은, 넌 응급처치…… 하기에 위험하니까…… 그냥 빨리 의사를 데려와.”

그가 나를 데리고 가는 편이 더 빠르겠지만 활동량이 증가하면 독이 빨리 퍼진다.

나를 안고 이동하는 방법도 있긴 한데- 아, 그러면 되려나…….

의식이 점점 희미해졌다. 곧 눈이 감겼다.

* * *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기분이었다.

하지만 내게만 찰나의 순간이었는지,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1층에 있었다.

천장이 저렇게 생겼구나.

음울한 분위기의 저택 속, 반쯤 산산조각 난 샹들리에가 보였다.

멜이 저택을 청소한다고 해도 샹들리에까지는 고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저건 그 옛날, 녹시렐 공작가가 멸망했던 날의 증거였다.

“흐윽…… 안 돼요, 안 돼요…….”

익숙한 목소리의 울음이 들렸다. 서러움 가득한 음성에 고개를 돌리자 현관문이 보였다.

멜은 활짝 열린 문 앞에서 주저앉아 있었다.

어째서인지 그는 문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무릎을 꿇고 바닥에 얼굴을 묻을 듯 엎드린 채 울고 있었다.

“다시는--- 않을게요.”

그는 계속 무언가를 말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마치 신에게 기도라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남은 모든 힘을 다해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간혹 알아들을 수 있는 말들은 어떠한 다짐들이었다.

“다시는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을게요.”

“다시는 누군가를 해치지 않을게요.”

“사랑만 베풀며 살아갈게요.”

“제발요, 제발이요…….”

그는 왜 그런 것들을 다짐하고 있는 걸까. 누구에게 무엇을 빌고 있는 걸까.

아니, 그 이전에 사람이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고, 해치지도 않고, 사랑만 베풀며 살아가는 게 가능할까…….

그가 다짐해 봤자 온몸에 피를 묻힌 채로는 신빙성 없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어린아이처럼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갈 듯 울며 매달리는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냉정하게 판단했다.

내 목숨은 끝났다.

그가 스스로 여기를 나가서 의사를 불러오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그가 말했지. 그는 저택을 나가지 못한다고 했었다.

그에게 무리한 부탁을 해 괜히 죄책감만 안겨 주었구나. 후회가 밀려왔다.

“……멜.”

혀가 굳어 잘 발음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작은 부름에도 멜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돌아 나를 바라봤다.

“세르베인! 아아…… 다행이다. 다행이야……. 정신이 들어?”

절벽 아래 떨어질 뻔했다가 구해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얼굴은 이미 눈물로 젖어 있었지만 그는 기뻐하며 내게 한달음에 다가왔다.

내가 이제 괜찮아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사람은 치료 없이 방치해 둔다고 아픈 게 사라지지는 않는다.

“…….”

“……왜 말이 없어?”

말을 하고 싶은데 혀가 움직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멜의 얼굴이 다시 절망에 물들기 시작했다.

그게 그저 안타까웠다.

‘사람이 사람을 미치게 하는 건 내게 없는 일인 줄 알았는데.’

화가 나야 정상이었다.

지금 이곳에 있는 게 나의 측근이었다면 나는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즉사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당장 의사를 만나기만 하면 나는 살 수 있을 것이다.

멜이 저택 밖으로 나가지 못하기에. 그랬기에 나는 죽는 것이다.

하지만 화가 나지 않았다. 그저-.

“넌…….”

길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혀가 움직이질 않았다.

‘앞으로 넌 어떻게 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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