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 화 (37/132)

37 화

투욱.

매번 문 앞에서 책을 읽고 있었던 걸까.

그의 발치에 떨어진 책이 보였다. 나는 거기에 시선을 두다가 다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왜 문을 연 거야?”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바로 문 앞에 그가 지키고 앉아 있을 줄은 몰랐다.

나는 문을 닫으려던 힘을 풀고 오히려 부드럽게 문을 열었다.

웃자. 웃어야지.

나는 여태껏 바닥을 구르며 내 삶을 연명했던 방법 중 하나를 시행했다.

“멜. 왜 거기에 있어?”

그냥 들어도 걱정스러움과 안타까움이 뚝뚝 떨어지는 어조로 물었다.

“어……?”

예상 못한 반응인지 멜이 당황하는 게 보였다.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었을 때 우리 사이에 두터운 벽이 있었기에 더 당황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리숙하다.

보통 사람이라면 곧바로 개술수 부린다고 알아차렸을 텐데 그는 그저 내가 다정하게 대해 주니 어쩔 줄 몰랐다.

순수한 사람을 등쳐먹는 건 언제나 마음이 불편하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말했다.

“한밤중인데, 혹시 여태껏 계속 바닥에 앉아서 잤던 건 아니지?”

“괘, 괜찮아. 별로 힘들지 않았어.”

멜이 문에서 손을 떼고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젠장. 부정하지 않는 걸 보니 계속 문 앞에서 지냈던 모양이다.

역시 창문 외엔 탈출 방법이 없다는 걸 다시 깨달았다.

“그런데 왜 문을 열었어? 내가 나오지 말라고 했잖아.”

당황했던 것도 잠시, 멜이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 왔다.

첫 만남 때, 그가 세르베인의 방을 찾으라며 나를 압박했던 상황이 떠올랐다.

분명 어수룩하고 여린 면이 있긴 하지만, 그건 그분에게 한정된 모습이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고 싶었어.”

“자는데 목이 말라?”

“응. 너무 건조하면 숨이 막혀서 잠에서 깨거든.”

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가 더듬더듬 물었다.

“숨……이 막혔어?”

나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괜히 여기서 한번 더 수긍하면 거짓말을 하는 느낌이 들 것 같아서 그랬다.

복잡미묘한 내 얼굴을 보던 멜이 순식간에 뒤돌아 계단을 내려갔다.

아주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다.

타다닥!

발소리를 내지 않던 그가 저렇게 소리를 내며 움직인 걸 보니 굉장히 동요한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그는 죽음에 민감하게 굴었다.

아마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트라우마로 남은 모양이지.

그냥 한 말이었는데 우연찮게 시간을 벌었다.

그냥 이 틈을 타서 창문 밖으로 뛰어내릴까.

“……아니다. 그건 경솔해.”

멜의 이동 속도가 빠른 건 첫날에 이미 경험했다.

그는 저택 밖으로 못 나간다고 내게 말했지만 그게 거짓일 수도 있다.

상식적으로 멀쩡한 사람이 저택 밖으로 나간다고 아파지는 건 말도 안 된다.

“일단은 보류하자.”

저벅저벅.

나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 멜이 있을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은 뭔가가 깨지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쨍그랑!

멜이 접시를 몇 개씩이나 깨뜨리면서 서둘러 컵을 꺼내고 있었다. 그 손이 덜덜 떨렸다.

나는 별것도 아닌 일로 그에게 겁을 줘놓고, 자비라도 베푸는 모양새로 말했다.

“멜. 그렇게나 당황하지 않아도 돼.”

내가 다가온 것을 깨닫지도 못했는지 멜이 놀란 기색으로 황급히 뒤돌았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안색이었다.

“왜…… 왜……! 왜 내려왔어?”

“멜.”

“방에 있어. 내가 다 해줄게.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줘. 그러니까……!”

나는 그 말들을 무시하고 멜에게 그저 성큼성큼 다가갔다.

생각해 보니 방에 감금되어 정신을 차린 이후로 나는 신발을 신고 있지 않았다.

주인이 외출하는 걸 싫어하는 애완동물처럼 그는 내 신발을 숨겨 놨었다.

그 덕분에 나는 의도한 대로 그가 깨트린 접시 조각을 맨발로 밟을 수 있었다.

“윽.”

“세르베인!”

멜이 헐레벌떡 뛰어와 나를 부축했다.

나는 비틀거리는 척 다친 발을 헛디뎠다. 하지만 발바닥의 아치 부분이 찔렸기에 사실 걸을 때 문제는 없었다.

덥석.

멜이 창백한 얼굴로 나를 안아 들었다.

그는 날카로운 조각들이 깔려 있는 부엌을 지나, 내 방으로 올라갔다.

내 발에서 떨어진 핏방울이 방울방울 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멜의 숨이 간헐적으로 떨렸다.

“아프지……?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멜은 나를 침대에 앉혀 두고 어딘가로 달려가더니 구급약품을 가져왔다.

약품이 보관된 통은 매우 오래되어 보였다. 그곳에서 꺼낸 붕대를 보고 나는 세균 감염의 가능성이 떠올라 말했다.

“멜. 그 붕대로 감으면 나 세균에 감염될걸.”

혹시 세균이 뭔지 모르려나. 나는 쉽게 설명해 주기로 했다.

“세균이 뭐냐 하면, 그…….”

바이러스와의 차이점부터 설명해 줘야 하나?

갑자기 눈앞이 깜깜했다. 나는 누군가에게 뭔가를 가르치는 데에 소질이 없었다.

다행히 내가 뭔가를 더 설명하기 전에 멜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세르베인. 나 그런 것쯤은 알고 있어. 책을 읽었거든……. 아주 많이 읽었거든.”

“…….”

“나 이제 인간에 대해 제법 잘 알아. 하지만 아직 멀었나 봐…….”

멜이 씁쓸하게 웃었다.

문득, 내가 방문을 열었을 때 그가 문 앞에서 바닥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는 것이 기억났다.

분위기가 조금 이상해졌다.

나는 갑자기 이 상황을, 그가 울음을 참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 걸 참을 수가 없어서 일부러 무심하게 말했다.

“그래. 아무튼 그 약품들도 다 몇십 년은 지난 것들이라서 쓰면 안 돼.”

내 말에 멜은 천천히, 아주 느리게 그 물건들을 다시 상자 안에 집어넣었다.

그걸 지켜보는데 이상하게도 심장이 아팠다.

증조할아버지께 들었다. 그분은 몸이 약하다고 하셨다.

혹시 멜은 그분이 아프셨기에 여태껏 저 약품들을 계속 보관하고 있었던 걸까.

그게 아니고서야 인어가 이 커다란 저택에서 쓸 일도 없었을 구급약품을 단숨에 찾아오는 게 가능할 리 없다.

분명 소중히 보관해 왔겠지. 어떤 심정으로 그래 왔을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이건 쓸모가 없으니 이제 버려야 했다.

나는 애써 그의 감정을 모르는 체하며 말했다.

“멜. 사람은 아프면 병원에 가야 해.”

“하지만……!”

멜이 반발했다. 하지만 곧 내 눈치를 보듯 움츠러들었다.

그가 반대할 것임은 이미 예상했다.

그가 바보도 아니고, 아무리 내가 다쳤다지만 겨우 이 정도 상처 가지고 밖으로 보내 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여기서는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그래. 이 정도는 안 가도 괜찮아. 대신 깨끗한 천을 좀 가져올래? 지혈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아서.”

멜은 창백한 낯을 한 채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어디론가 뛰어나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한 가지를 확신했다.

당분간 멜은 내게 미안해서 원하는 걸 대부분 허락해 줄 것 같았다.

그의 애정에는 미안하지만, 나는 그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 * *

다음 날, 나는 안절부절못하는 멜의 앞에서 덤덤히 말했다.

“멜. 신발을 좀 줄래?”

내 말에 이리저리 몸을 가만히 두지를 못하던 멜이 뚝 멈추었다.

그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물었다.

“……왜? 발 다쳤잖아.”

그게 이유가 아니지 않나. 조금 헛웃음이 나왔다.

마치 내 발이 멀쩡했을 때는 신발이 있었다는 듯이 말하는 그의 말을 속으로 비웃었다.

나는 멜에게 비수가 될 걸 알면서도 말했다.

“왜긴. 다른 발도 다칠지 모르니까 그러지.”

“…….”

“신발을 신고 있었다면 내가 다칠 일은 없었을 거야. 알지?”

나긋나긋하게 말했지만 멜의 얼굴은 하얗게 질린 지 오래였다.

그는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입만 작게 뻐끔거렸다.

나는 그 얼굴에서 시선을 돌렸다.

……안쓰러워하지 말자. 쳐다보지 말자.

내가 이제는 너무 익숙해진 이불의 패턴에만 집중할 때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잘못했어…….”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었다.

“내가 뭐라고 말했는지 잊었어?”

내 의도를 눈치챘는지 멜이 곧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신발 돌려줄게.”

“고마워.”

원하는 답이 나오자 살짝 고개를 들어 웃어 주고는 다시 시선을 피했다.

저 얼굴을 오래 바라보는 건 조금 위험했다.

그나저나 이렇게나 덕지덕지 감을 필요는 없었는데.

나는 급조한 붕대에 감긴 발을 바라봤다.

멜이 옷을 찢어 붕대를 만든 후 직접 감아 줬는데, 너무 두껍게 감아서 발이 꽤 불편했다.

그때 멜이 또 말을 걸어왔다.

“……세르베인.”

“왜?”

조금 지루한 기분으로 대꾸해 줬다.

인간적으로 그는 나의 이름을 너무 자주 불렀다.

꽤 피로감이 들 법한 일이지만 아직 그 정도로 넌더리가 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왜 나를 바라보지 않아?”

“…….”

생각을 멈췄다.

일부러 그를 미워하기 위해 속으로 그를 폄하하고 비웃던 생각이 멈추자 양심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

너무 노골적으로 티를 냈나.

내가 이불을 만지작거리던 손길을 뚝 멈추자, 그 사소한 모습에도 신경을 쓰며 눈치를 보고 있던 멜이 당황하며 손을 저었다.

“안 봐도 돼. 미안해. 나한테 화났을 텐데 내가 계속…… 계속…….”

멜은 잘못했다고 말하기 위함인지 말끝을 늘렸다.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헤아려 보는 것인지 제 손목에 있는 팔찌를 만졌다.

이미 닳은 줄은 곧 끊어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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