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 화 (36/132)

36 화

조금 시비조로 느껴지긴 하지만, 달리 바꿔 표현할 문장이 없었다.

분명 멜은 방금 내가 그분이 아니라고 시인했다.

그런데 왜 이러는 거지?

차라리 내가 그분이라고 착각할 때면, 아니란 것만 주입시켜 주면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러면 또 상황이 다르다.

이러면…… 진짜 곤란하다.

“그야 네가 세르베인이니까.”

“난 그분이 아니라니까.”

“맞아. 그 애는…… 죽었으니까.”

……그 말을 당신이 한다고?

나는 이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가장 핵심적인 건 나를 왜 감금하냐는 것이었다.

분명히 말하건대, 멜은 내가 그분이라고 생각해서 나를 가두었다.

그런데 내가 그 사람이 아니란 걸 아는데도 왜 감금하는 것인가.

내 안색이 창백해지거나 말거나, 멜은 옅게 웃었다.

그 작은 웃음은 서서히 만면에 퍼져 환해졌다. 그게 상당히 무서웠다.

“하지만 네가 다시 돌아왔어. 나는 기뻐.”

사뿐히 눈을 감았다 떴다.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미쳤구나. 진짜로 이 인어가 돌아 버렸구나.’

잠시 속으로 계산했다.

내가 이 정도로 정신이 불완전한 존재를 거둬들일 능력이 될지.

내가 그를 책임지고 정상으로 돌려놓을 수 있을지.

나는 혹시나, 아주 혹시나 멜이 그런 생각을 할까 싶어서 물었다.

“내가 그분의 환생이라도 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응.”

“그런 게 존재한다고 믿어?”

“……안 믿었었어.”

멜이 시선을 틀었다. 그는 왼쪽 아래로 고개를 살짝 내리고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지금 네가 왔으니까 믿어.”

내 인생이 실시간으로 꼬이는 느낌이 들었다.

일단 나는 멜의 얼굴에서 시선을 뗐다.

저 얼굴을, 저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성적 판단이 불가능했다.

‘잠깐만.’

그를 바라볼 때 이성적 판단이 불가능했다고……?

그걸 깨닫는 순간 머릿속이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멜에게서 시선을 돌린 순간, 나는 어느 정도 냉정을 되찾았다.

나는 멜의 행동을 다시 머릿속으로 재생했다.

그는 말을 할 때 고개를 좌측으로 숙였다. 시선을 돌렸다.

명백한 거짓말의 증후였다. 배신자들을 숙청할 때 질리도록 봐온 패턴이면서 왜 바로 깨닫지 못했을까.

‘혹시 인어가 사람을 홀리게 하는 건가?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그에게 매여 이 저택을 빠져나가지 못한 건가?’

“……하.”

그걸 깨닫는 순간 화가 났다.

그는 그저 세르베인을 닮은 나를 어떻게든 이곳에 묶어 놓기 위해 이제는 나를 그분과 혼동하지 않는다고, 나를 온전히 바라보는 척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실망했다. ……하지만 실망할 이유가 없지.

인어는 처음부터 제 목적을 위해 연기했던 것뿐이니까.

‘원래 사람은 이기적이게 행동하는 법이야.’

비록 나는 그를 진심으로 동정해서, 그를 위해 내 안위를 포기할 생각까지 했지만 돌아오는 건 이런 취급이었다.

배신감과 분노가 치밀어도 나는 싱긋 웃었다.

하지만 그와 시선을 똑바로 맞추지는 않고 말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 * *

나는 멜의 경계를 낮추기 위해 맛없는 음식도 꾸역꾸역 다 먹었다.

……간헐적으로 위가 아파 오지만 아직은 참을 만했다.

“세르베인. 오늘 메뉴가 마음에 들었어?”

내가 음식을 거의 다 먹자 멜이 화사하게 웃으며 기뻐했다.

가증스러웠지만 나는 속내를 감추고 웃었다.

“응. 좋았어.”

솔직히 말하자면 차라리 삼시 세끼 빵을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바보도 아니고, 분명 정기적으로 배송되는 품목 중에 빵도 있을 텐데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 심정도 모르고 멜은 열심히 자신이 오늘 무슨 음식을 요리했는지 한번 더 살폈다.

“참고할게.”

“……그래. 고마워.”

참고하기 전에 네 입으로 한번 먹어 보렴.

도대체 그는 뭘 먹고 살기에 이 음식의 상태를 모르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모르는 척 물었다.

“멜. 넌 식사했어?”

“어? 나……?”

멜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잠시 뜸을 들였다.

내가 그렇게 어려운 질문을 했나. 혹시 인육을 먹어서 밝히기 곤란해서 그러는 건가?

관찰하듯 그를 바라보는데 멜이 답했다.

“기억이 안 나. 예전에 먹었었는데.”

“예전에 먹었었다고?”

“응.”

대답을 하면서도 멜은 그게 뭐가 이상한지 모르는 눈치였다.

나는 당혹스러움에 입을 다물었다.

예전 같았다면 무슨 일인지 걱정하고 관여했겠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배가 고프진 않아?”

“응. 괜찮아.”

그렇다면 굳이 이게 평범한 일이 아니라고 알려 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 그럼 됐어.”

나는 대수롭지 않은 척 답했지만 속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건 확실히 인간의 반응이 아니었다.

그런데 멜은 지금 인간인 걸까, 인어인 걸까?

식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머리가 아팠다.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기고 살짝 인상을 쓰려 할 때 기습적으로 멜이 말했다.

“사랑해, 세르베인.”

……이 상황에서 왜 갑자기 고백을 하는 거지?

“갑자기 왜 그래……?”

나는 당황한 속내를 감추지 못하고 멜을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식사를 다 해서 기뻐하던 얼굴이 다시 슬픔에 잠겨 있었다.

도대체가, 감정선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는 눈물로 일렁이는 눈빛을 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이 물에 젖은 나비처럼 안타까웠다.

“……사랑해.”

도대체 너는 왜 그러는 거야.

마음이 약해지려 했다. 나는 시선을 황급히 돌렸다.

‘홀리지 말자. 나는 저택을 빠져나가서 수도로 갈 거야. 거기서 도움을 청해 멜을 이곳에서 쫓아낼 거야. 혹은 내가 이 저택을 포기하는 방법도 있지.’

미나엘이 말했던 대로 굳이 이 저택에 사는 것을 고수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마지막 아량을 베풀어 멜에게 정신과 의사를 파견해 줄 수는 있겠지.

그때 내 상념을 깨듯, 멜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세르베인.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야……?”

‘왜냐니. 사랑한다고 말하는 게 세뇌의 시발점일 수도 있으니까 그러지.’

하지만 여기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면 그것도 곤란해진다. 여태껏 그의 기분을 맞춰 줬던 일들이 다 무산될 테니까.

나는 속으로만 한숨을 쉬고 말했다.

“나도 사랑해.”

“…….”

“너무 당연해서 미처 말을 못 했어. 미안해.”

멜이 안심한 얼굴을 했다.

그동안 나는 곰곰이 나의 상태에 대해 확인해 봤다.

다행히 말한 걸로 세뇌가 되고,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세르베인…….”

그때 멜이 침대 위로 살짝 몸을 기울여 왔다. 그가 내 뺨을 쓰다듬었다.

미인계다. 본능적인 직감이 들었다.

지척으로 다가왔으니 어쩔 수 없이 그를 올려다봤다.

멜의 얼굴이 아주 가까이, 내 얼굴과 아주 가까이에 다가와 있었다. 반짝이는 물빛의 눈동자가 보였다.

“입 맞춰도 돼?”

불안한 눈빛을 하고서 멜이 물어 왔다.

어제는 그냥 하지 않았나…….

이상했다. 어쨌거나 나는 그냥 한번 입 맞춰 주고 끝내자는 생각에 눈을 감았다.

촉.

곧 부드럽고 촉촉한 감각이 닿았다. 그리고 그게 다였다.

맞닿았던 입술이 멀어지는 감각에 눈을 떴다.

멜은 가벼운 접촉만 하고 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내 어깨에 잠시 이마를 붙이고 있었다.

나는 멜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그저 구불거리는 남색 머리카락만 바라봐야 했다.

“왜 눈을 감았어?”

멜이 작게 물었다.

하지만 바로 귓가에서 한 말이기에 아주 선명히 들을 수 있었다.

‘그게…… 큰 문제인가?’

내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입 맞출 때 눈을 감는 경우야 흔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건지 생각할 때 그가 내 품에 무너지듯 안기며 물었다.

“우리 어제까지만 해도 좋았잖아. 왜 그러는 거야……?”

“…….”

“내가 뭔가를 잘못했어? 얘기해 줘……. 고칠 테니까, 제발.”

“그런 건 없었어.”

뻔한 거짓말, 뻔한 사탕발림을 했다. 멜도 그걸 알아챈 것 같았다.

그는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내가 거짓말을 한 것이 정말로 큰 죄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는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렇구나.”

“…….”

“알겠어. 쉬어, 세르베인.”

멜은 오늘도 도망치듯 방을 나가 버렸다.

그날 밤. 나는 방문 밖으로 나가기를 결심했다.

멜이 내게 감금할 것이라 선언한 뒤, 나는 방 밖으로 나갈 시도도 하지 않았었다.

물론 정말 탈출할 생각이었다면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을 것이다.

이곳은 2층이고, 멜은 다행히 내가 2층에서 뛰어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도 못 했는지 창문을 막아 두지는 않았다.

“…….”

방문에 귀를 가져다 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솔직히 쓸모없는 짓이긴 했다.

멜은 기본적으로 기척을 내지 않고 다녔다. 스스로가 의도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살짝만 살펴보자.

적어도 멜이 이 저택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 어딘지만 알면 내 탈출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달칵.

“……!”

살짝 열린 문틈을 본 순간 소리를 지를 뻔했다.

바로 코앞에 멜의 형체가 보였다.

타악!

황급히 문을 닫으려 할 때, 흰 손이 불쑥 들어와 문을 열었다.

문을 손으로 잡은 채, 바닥에 앉아 있던 멜이 일어섰다.

“세르베인?”

멜의 푸른 눈동자에 아무런 빛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는 심해 같은 눈을 휘며 내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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