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 화 (35/132)

35 화

정신적으로 피로하다. 많이.

씻으면 개운해야 하는데 왜 이렇게 정신적으로 타격이 온 기분일까.

“…….”

나는 자꾸만 천장으로 향하는 시선을 내리깔기 위해 노력했다.

계속 정신이 어디론가 탈출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의 상태와는 별개로, 내 옆에 앉아 있는 멜은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그는 욕실을 나온 이후에도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내게 종알종알 말을 붙여 왔다.

“세르베인. 팔이 단단해.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야.”

그게 말이지…… 사연이 복잡한데.

나는 최대한 그럴듯한 변명을 쥐어짜 냈다.

“내가 운동을 좀 했거든.”

“좋은 습관 같아. 다음에는 나랑 같이 하자.”

“……그러든가.”

뭉뚱그려 답해도 멜은 잘 납득해서 다행이었다.

사실 내 몸의 근육은 꾸준한 운동보다는 살기 위해 싸우다가 붙은 근육에 가까웠다.

나는 무기를 가리며 싸우는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딱히 잘하는 무술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검이 있으면 검을 휘둘렀고, 창이 있으면 창을 휘둘렀고, 몽둥이가 있으면 그걸로 후려쳤다.

그런 식으로 살아남다 보니 여기저기에 근육이 붙었다.

그때 내 몸에 난 선형의 흉터를 손가락으로 쓸며 멜이 물었다.

“사실 아까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여기 있는 건 어쩌다가 생긴 흉터야?”

‘나를 살해하려던 놈들을 죽이느라 생긴 상처야.’ 이렇게 말하기에는 일이 너무 복잡해서 나는 어색히 웃었다.

“길 가다가 나뭇가지에 긁혔나 봐.”

“나뭇가지에 긁힌 것만으로 흉터가 생겨?”

멜은 상당히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나는 재종조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 잘못된 상식을 남겨 주고 싶지는 않아서 황급히 변명했다.

“크고 날카로운 나뭇가지였거든. 피가 꽤 나올 정도로. 그런 수준이 아니라면 흉터는 안 생겨.”

“그 정도로 심하게 다쳤었어?”

멜은 이내 내 몸에 있는 온갖 흉터들을 다 가리키며 물었다.

“여기랑, 여기랑, 여기랑, 그리고-.”

그렇게 하나하나 안 짚어 줘도 되는데.

나는 새삼 내 몸에 흉터가 참 많았단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여기도…….”

그만 좀 만지렴…….

나는 속으로 인내를 외치며 신체의 감각을 무시했다.

멜의 손길을 무시하기 위해 잠시 회상하자면, 나는 증조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까지만 해도 온실 속 화초처럼 곱게 자랐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녹시렐 가문을 되찾기 위해 무작정 집을 떠났다.

거의 10년 전 이야기지.

왕족의 피를 찾기 위해 다니다가 프로셴을 만났고, 그러다가 미나엘도 만났다.

즉 내게는 흉터가 그 시간들을 의미했다.

“많이 아팠겠다. 역시 바깥은 위험해. 어서 나았으면 좋겠어.”

멜이 내 흉터를 쓸며 말했다.

은근히 나를 계속 감금할 것이라는 포부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나는 내심 식은땀을 흘리며 멜의 손을 붙잡았다.

겸사겸사 할 말도 하고, 손의 움직임도 봉쇄하기 위함이었다.

갑자기 양손이 붙잡힌 멜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글쎄. 밖에서 다치긴 했지만 나는 괜찮았어.”

“왜? 이렇게나 많이 다쳤잖아.”

멜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내 말을 부정하고 싶은 것 같았다.

‘아이 같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멜은 나보다 훨씬 키도 크고, 덩치도 크다. 실제로 살아온 시간도 훨씬 길 터였다.

하지만 내 눈에 그는 아이처럼 보였다.

“아픈 건 안 좋은 거야. 나는 세르베인이 안전한 곳에서 편안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멜이 나의 손을 살살 어루만지며 말했다.

나를 회유하려는 듯 더욱 나긋하고 조곤조곤해진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안전한 곳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 좋지.

하지만 그랬다면 나는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 것이고, 가문의 명예를 되찾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너도 만나지 못했겠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나의 손과 얽힌 멜의 손을 바라봤다.

그의 팔에는 낡은 팔찌가 달려 있었다.

그 팔찌를 보자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멜. 성장에는 통증이 따르는 법이야.”

갑자기 그에게 해주어야 하는 말이 떠올랐다.

그에게 언젠가 말해야지, 생각했지만 그럴 만한 때를 찾지 못해 미뤄 뒀던 말이었다.

나는 그가 당장에는 아프더라도 현실을 자각하길 바랐다.

“흉터는 상처와 달리 사라지지 않아. 하지만 아프지도 않지.”

멜은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세르베인은 아직까지도 상처로 남아 있을 테니까.

나는 그분의 존재가 멜에게 흉터로 남길 바랐다.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아프지도 않은 존재가 되길 바랐다.

“멜.”

사실 어느 정도 포기했었다.

나는 그가 어느 정도 제정신이라고 생각하던 때까지는 그를 계속 책임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바로 어제의 일도 잊어버리고, 내가 했던 말들을 없었던 일들로 치부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두고 저택을 빠져나갈 계획을 짜려 했다.

그런데 복수하겠다면서, 정작 이렇게 곁을 내주고 매달리며 사랑스럽게 웃어 버리는 바보 같은 모습을 보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사실 기억하고 있지?”

하나 더. 이제 막 눈치챈 게 있었다.

그는 나와의 대화를 잊은 척, 없었던 일처럼 말했지만 정말로 잊었다면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정말로 잊었다면, 그는 왜 떠났냐고 내게 물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것만큼은 다시 묻지 않았다.

분명 세르베인이 살해당했다는 이야기를 또 듣고 싶지 않기에 그러는 거겠지.

“이제 그만 받아들여. 네가 기다리던 세르베인은 없어.”

“…….”

“왜 자꾸 잊어버리려 하는 거야.”

몇 번이고 말해 주자.

그것만으로 한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충분히 가치가 있다.

나의 안위를 포기하고서라도 계속 멜에게 진실을 말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계속 그분일 것이라고 착각하며 베푸는 애정을 받는 것은 죄책감이 들었다.

또한 동시에 그가 너무 안쓰러웠다.

나는 내 말을 들은 멜이 울거나, 다시 화를 낼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투욱!

멜의 손에 힘이 풀리고, 나는 그의 손을 놓치고 말았다.

그는 울지도 화내지도 않는 얼굴로 차분히 물었다.

“세르베인.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 아주 약간. 아주 약간 불안하다고 생각하는 것뿐이야.”

최대한 무던하게 말했다.

그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조심스럽게 표현했다.

멜은 쓰게 웃더니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저었다.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그의 남색 머리칼이 살랑였다.

“글쎄. 난 지금 완전히 제정신이야. 그러니까……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

“기억을 못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너야.”

여전히 내가 그분이라고 믿는 걸까.

이번에도 그를 납득시키는 것은 실패한 모양이다. 나는 작게 탄식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멜이 나의 지친 얼굴을 보고 충격받아 흔들리는 눈빛을 했다.

곧바로 표정 관리를 했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멜은 입술을 깨물었다가 덜덜 떨며 말했다.

“하지만 네가 기억하지 않길 바라……. 나는 정말로 네가 기억하지 않길 바라.”

“……무슨 일을 기억하지 않길 바라는 건데?”

멜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그동안 봤던 애정을 갈구하는 매달림, 혹은 의심, 혹은 원망이 아니었다.

그는 죄책감과 두려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잘 자. 좋은 꿈 꿔.”

멜은 대답하지 않고 도망치듯 방에서 나갔다.

나는 그를 붙잡지 못한 채 뒷모습만 바라봤다.

달칵.

그가 죄책감을 느끼다니.

도대체 왜? 무엇 때문일까?

* * *

그날의 대화가 없었다는 듯, 다음 날 멜은 또 아무렇지 않게 내게 다가왔다.

이젠 정말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세르베인. 잘 잤어?”

“그래.”

한숨을 쉬는 기분으로 힘없이 대답했다.

‘도대체 뭘 하자는 걸까. 나와 역할 놀이라도 하고 싶은 걸까.’

복잡한 심경으로 그를 바라볼 때 멜이 세숫대야를 가져왔다. 귀족들의 아침 세안에 대해 아는 모양이었다.

나는 공작가의 핏줄이지만 귀족으로 살아 본 적이 없었다.

꼬물꼬물 대충 행색을 맞춰 준비해 온 멜이 귀엽긴 했지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멜. 그런 것까지 하지 않아도 돼. 내가 손님이고 네가 여기 주인이잖아.”

“내가 서툴러서 그래?”

“그 뜻이 아니라…… 난 여태껏 귀족으로 살아오지도 않았는걸. 난 그 세르베인이 아니야. 그러니까 그런 귀족의 삶을 맞춰 주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돼.”

밤새도록 낸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입이 마르도록 계속 내가 그분이 아니라고 말하기로 다짐했다.

나는 멜이 또 내 말을 무시하고 

“하지만 세르베인은 귀족이잖아.”

라고 같은 말만 반복할 것이라 예상했다.

나는 이제 제법 멜의 상태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멜의 반응이 무심했다.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세르베인은 어떻게 살아왔어?”

“난 그분이 아니라니까.”

“그래. 너 말이야.”

“……뭐?”

“세르베인은 어떻게 살아왔어? 궁금해. 말해 줘.”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이건 또 이때까지와 양상이 달랐다.

나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그게…… 왜…… 궁금한데?”

“……무슨 뜻이야?”

“네가 나에 대해 왜 궁금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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