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화
‘미쳤습니까……?’
가까스로 그 말을 삼켰다. 말 안 했으면 정말 큰일이 생길 뻔했다.
나는 최대한 당혹스러움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하며 말했다.
“멜. 넌 남자고 난 여자잖니.”
“그게 왜?”
“우리가 맨몸을 볼 사이는 아니지 않아?”
“왜 아니야? 세르베인은 늘 내 맨몸을 봤잖아.”
‘그 세르베인이 내가 아니잖아. 나는 당신의 맨몸을 본 적도 없고, 보고 싶지도 않아!’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마지막으로 남은 이성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 우리 관계는 뭐랄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 되었으면 좋겠어.”
초면부터 차근차근 상식적인 방향으로 관계를 맺어 나가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멜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충격받은 것처럼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낮고 빠르게 말했다.
“처음부터라니……? 나를 아예 없던 존재로 생각하고 싶다는 거야?”
화가 난 것 같긴 한데 그의 눈에 물기가 차서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그가 또 어디로 사고의 흐름이 튈지 몰라 다급하게 부정했다.
“그게 아니라!”
“나는 줄곧 너를 기다렸는데, 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나는, 윽……!”
멜이 갑자기 머리를 부여잡았다.
나는 여태껏 타의로 척추라도 부러진 듯 계속 침대에 있어야 했던 몸을 빠르게 일으켜 멜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아, 아냐…… 내가 잘못했어.”
“아니, 네가 뭘 잘못했는데?”
“내가, 내가 널 원망할 자격이 없는데 내가……!”
또 이런다. 멜이 왜 나를 원망할 자격이 없는가.
적어도 그가 나를 그 세르베인이라고 믿는 이상 나는 그가 나를 원망하는 걸 이해했다.
답답한데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었다.
멜은 종종 사고방식이 갑자기 얽힌 것처럼 굴곤 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저택 밖으로 그를 데리고 나가려 했을 때도 그랬다.
아무래도 정신과 의사나 상담사가 필요한 것 같았다.
나는 멜을 흔들며 외쳤다.
“멜, 잠깐만! 정신 좀 차려 봐!”
“으…… 흐윽…….”
푸른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그의 아래 속눈썹에 이슬처럼 걸렸다가,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새벽 풀잎에 걸린 이슬이 떨어지는 듯한 가련함이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사람의 외모에 약한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는 내 속에 참…… 참…… 많은 내가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됐다.
그러니 더럽게 맛없는 음식을 먹어 주고도 화가 진심으로 나지는 않았었지.
“하…….”
나는 호전될 것 같지 않은 멜의 상태를 바라보다가 이내 천장을 바라봤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충격 요법을 써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나한테 상당히, 사실 내게 더 심한 충격이라서 조금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래. 같이 씻자.”
“흐윽, 어……?”
“그래. 그까짓 것 뭐 어때.”
어차피 피와 살가죽으로 된 몸뚱이. 누구나 갖고 있다.
나는 내 안에서 멜과 유지하던 선이 지워지는 걸 느끼며 내뱉었다.
“같이 씻자고.”
그 말을 하며 멜을 바라봤다.
그는 손에 얼굴을 묻고 울다가, 이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세르베인 녹시렐. 드디어 미쳤구나.’
이 음침한 저택에서 미친 인어와 살다 보니 덩달아 미친 게 분명하다.
나는 멜에게서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미친 가설이긴 한데, 그가 붙잡지 않았어도 그를 떠나지 못했을 거라는 가정이 들었다.
“……응.”
눈물 맺힌 채 웃는 저 얼굴이, 마냥 해를 다시 본 꽃처럼 예쁘다고 생각하는 걸 보면 말이다.
* * *
하얗고 매끄러운 등이 보였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근육의 형태를 선명히 알 수 있었다.
멜은 인간이 아니라 그런지 옷을 벗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나는 차마 목욕 가운을 벗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멜의 맨몸을 볼 자신도 없었다.
‘다리....’
그때 문득,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시선이 그의 다리에 머물렀다.
인어라고 해도 육지에서 지내려면 다리가 있는 건 당연한데, 한번도 본적 없는 꼬리가 그곳에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미처 생각할 틈도 없었다. 내 손은 반사적으로 그를 욕조 안으로 밀어버렸다.
첨벙!
‘물에 빠진다고 다시 꼬리가 생기지는 않는구나.’
짧게 확인한 가설이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세르베인?”
욕조에 빠진 멜이 놀람과 동시에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사과했다.
“미, 미안…….”
내가 도대체 왜 그를 욕조에 밀어버렸지?
뒷모습까지는 그러려니 하겠는데, 그의 앞모습을 볼 자신이 없어서 그랬나?
잠시 정신이 빠지기라도 했던 듯이 정신이 몽롱했다.
하지만 그 말을 본인에게 할 용기 따윈 없으니 삼키고 속으로 한숨만 쉬었다.
뜻밖에도 욕조에 반쯤 잠긴 채 가만히 나를 올려다보던 멜의 반응은 잠잠했다.
“……아니야. 역시 세르베인이네.”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더니 오히려 웃어 버렸다.
익숙하다는 듯 그냥 넘겨 버리는 태도였다.
그 모습에 솔직히 할 말을 잃어버렸다.
‘재종조할머니, 당신은 도대체…… 어떤 행동을 하신 겁니까…….’
내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멜이 손을 뻗었다.
그는 한 손으로는 내 손목을 잡고 당겼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나의 가운을 동여매고 있던 끈을 풀어 버렸다.
인어라고 믿을 수 없는 손짓이었다.
첨벙!
갑자기 거리감이 줄었다.
나는 그의 품에 안긴 채 그를 올려다봤다.
머리카락이 바짝 서는 기분이었다.
멜은 내 허리를 끌어안은 채, 내 어깨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그는 참 이런 자세를 좋아했다.
“꿈만 같아. 세르베인…….”
어. 나도 꿈이었으면 좋겠네.
“너무 행복해.”
뭐, 그래……. 네가 행복하면 됐지…….
나는 허탈한 기분으로 웃었다. 입꼬리가 바들바들 떨리는 게, 아무래도 신체가 정신력을 따라가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촉.
목과 어깨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입술의 감각에 도망치고 싶었다.
‘미남과 욕조에 있는 상황이 자주 올 것 같니? 그냥 즐겨.’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질 않았다.
촉.
멜은 이제 내 쇄골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도대체 이 인어는 어디까지 내려갈 생각인가.
나는 기겁하며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퍼억!
“세르베인?”
멜이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주 결백하고 순수해 보였다.
꽤 둔탁한 소리가 들렸기에 아프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런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왜 그래?”
그 눈빛을 보니 내가 과민반응하는 것인가, 같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봐봐. 인어들 사이에서는 이런 행위가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 않은가.
악수하는 수준의 행위일지도 모르지. 또래들끼리 치는 장난일 수도 있다…….
밝은 빛을 받은 호수처럼 반짝거리는 멜의 눈빛을 보니 그게 맞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의 머리를 원위치로 가져다 놓으려는 의도였다. 그의 남색 곱슬머리가 내 어깨를 간지럽혔다.
멜의 몸이 흠칫 굳었다. 그는 이내 더욱 세게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척추가 부러질 만큼의 힘은 아니라서 참아 주기로 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감내하기로 했다.
심리 치료사나 정신과 의사를 데려올 수 없는 현 상태에서, 내가 심신미약자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정서적 안정감을 위한 애정을 베푸는 것뿐이었다.
나는 왜인지 익숙한 느낌으로 멜의 머리칼을 천천히 매만졌다.
그때 기습적으로 멜이 내 어깨에서 고개를 들더니, 나와 눈을 맞췄다.
“세르베인, 나 좀 봐봐.”
슬슬 정신력에 한계가 오려 했기에 그가 여기서 더 내 정신력을 갉아먹는 짓은 하지 않길 바랐다.
주말에 집에서 낮잠을 자다 아이들에게 시달리게 된 가장의 심정이 이럴까.
나는 피곤한 얼굴로 애써 미소를 만들어 내고 물었다.
“왜 그래?”
쪽!
채 말이 끝나기 전에 멜이 내 입술에 입을 짧게 맞췄다가 떨어졌다.
나는 순간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말을 더듬었다.
“뭐 하셨, 아니, 뭐 했니……?”
“하하하.”
멜은 뭐가 그리 기쁜지 헤실헤실 웃었다.
나는 또 잠시 혼이 빠진 상태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그는 한번 더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쪽!
……아무래도 인어가 아니라 여우가 사람이 된 모양이다.
나는 탄식하며 한 손에 얼굴을 묻었다.
다행히 내 생각에는 인어가 성적 지식이 조금 부족한 것 같았다.
그래서 고작해야 포옹과 손잡기가 다인 모양이었다.
이 이상 진도가 나갈 일은 없어 보이니 그나마 긴장을 조금 풀 수 있었다.
“세르베인. 나 안 볼 거야?”
쪽!
“그만하자, 멜. 주둥이 치워.”
나는 수차례 계속되는 뽀뽀 세례를 피하기 위해 멜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갑자기 예쁜 입술을 주둥이 취급당한 멜이 반짝이는 두 눈을 깜빡이더니 말했다.
“싫은걸. 나는 또 할 건-.”
“……!”
나는 후다닥 손바닥을 치웠다. 생경한 감촉 때문이었다.
‘진짜…… 저 여우……물고기가!’
손바닥에 말을 하던 혀가 스쳤다. 그 감각이 잊히질 않았다.
내가 왜 손바닥을 털며 발악하는지 모르는 멜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세르베인. 왜 그래?”
나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인어가 속세에 물들지 않아 정말로 다행이라고.
그가 미인계를 제대로 장착하고 일을 벌이는 날에는 나라가 뒤집힐 만한 사건이 벌어질 것이란 짐작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