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 화 (30/132)

30 화

무려 그 상태로 100년이 흘렀다. 그걸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세르베인이냐고 묻던 그 절박한 얼굴을 기억했다.

안타깝고 사랑스럽던 그 절박함을 기억했다.

“하지만 맞잖아. 너 맞잖아……. 그게 아니면 어떻게 내 이름을 알겠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을 차렸다.

나라도 이 미친 인어에게 휘둘리지 말고 똑바로 정신머리를 갖고 있어야 했다.

기억할 것. 나는 멜이 사랑하는 그 사람이 아니다.

“그것에 대해 할 말이 있어.”

이성을 되찾고 멜에게서 약간 멀어졌다.

내가 떨어지자 조금 진정한 상태로 멜이 몸을 일으켰다.

“나는 네가 기억하는 그 사람이 아니야. 너도 알고 있었잖아.”

“아니야. 그러면 네가 나를 어떻게 알겠어. 내가 인어라는 것, 내 이름, 그런 것들 전부 네가 세르베인이니까-.”

“아니.”

설령 화가 난 인어가 나를 죽인대도 어쩔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태껏 가문의 부활을 위해 인생을 쏟아부었으면서, 그것이 물거품이 되어도 상관없다는 충동적인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 인생은 처음부터 이곳에 홀로 유폐된 인어를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성이 마비되었다.

“그분은 나의 재종조할머니야.”

“뭐……?”

“그분의 아버지의 남동생의 아들의 아들의 딸이 나라고.”

천천히 인어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이성이 돌아온 모습이 다행이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지만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내 이름은 세르베인 녹시렐. 네가 아는 그분과 닮아서 그분의 이름을 받았어.”

하지만 이 이름을 온전히 나의 이름으로 인어에게 불릴 일은 없을 것이다.

그걸 알기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녹시렐이라고 불러.”

* * *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기분이다.

나는 인어를 응접실에 앉혀 두고 주방으로 갔다. 뭐라도 마시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100년 동안 방치된 집 안에 차가 있을 리 없었다.

“윽.”

괜히 이곳저곳을 뒤졌다가 사람의 뼈와 살점만 발견했다.

내가 살아온 시간이 험하지 않았다면 보고 기절했을 광경이었다.

나는 결국 끓인 물만 들고 응접실로 돌아왔다.

“마실래요?”

“…….”

인어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나는 알아서 인어의 앞에 끓인 물 한 잔을 두었다.

한동안 패닉에 빠진 듯 멍하니 앉아 있던 인어는 내가 물 한 잔을 다 마신 뒤에야 입을 열었다.

“……알고 있었어. 네가 세르베인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어.”

‘아뇨. 전혀 모르던 것 같던데요.’

물을 마시며 태평하게 생각했다.

이성을 되찾으니 방금처럼 멜에게 휘둘리는 일이 없었다. 다행이었다.

어쨌든 내가 그분의 먼 친척인 탓일까.

우려했던 것과 달리 인어는 내 목숨을 해치려 들지 않았다.

그는 멍하니 바닥만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르베인이 너의…… 뭐라고 했지?”

“재종조할머니요.”

나는 인어에게 존댓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겉모습은 나의 또래여도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을 테니 이쪽이 더 편했다.

“그분의 아버지의, 남동생의, 아들의, 아들의, 딸이에요.”

“…….”

“손녀라고 생각하세요. 그편이 편할 거예요.”

사람도 재종조할머니의 개념을 잘 모르는데 인어가 쉽게 받아들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뭐야, 그냥 남이나 다름없잖아. 세르베인의 것을 뺏으러 온 거지? 죽어.’라고 반응하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기기로 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인어가 날카롭게 물었다.

“넌 여기에 왜 온 거지? 이 저택은 내가 처음 왔을 때부터 아무도 없었어. 실컷 버리고 떠나 놓고 왜 온 거지?”

때가 됐다.

나는 줄곧 이 말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는 시간이 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우리 가문은 여기를 자의로 떠난 적이 없어요.”

멜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이 이야기가 인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나는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야기가 아주 길어질 것 같네요.”

* * *

약 100년 전, 반란이 일어났다.

왕가에 충성하던 녹시렐 공작가는 왕이 뒤바뀌던 날에 함께 몰락했다.

반란의 주체는 모두의 예상에서 벗어났다.

이전에는 존재감마저 흐릿했던 교황이 즈레이카 왕국을 신성 왕국으로 선포하며 스스로 왕이 된 것이었다.

“그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친국왕파인 녹시렐 공작가는 완벽히 제거당했어요.”

녹시렐 공작은 그 일이 일어나기 며칠 전에 수도에서 암살당했고, 적법한 후계는 저택의 사용인들과 함께 살해당했다.

후계였던 세르베인은 몸이 약했기에 도망치지도 못하고 살해당했을 것이라는 게 가장 유력한 가설이었다.

증조할아버지는 그분의 시체조차 찾지 못했다. 정확히는 두려워서 찾을 엄두도 내지 못하셨다.

그 이유는 귀족 여자들 사이에 도는 소문 때문이었다.

“자살을 하더라도 여자는 시체조차 남기지 말아야 해.”

성차별적 발언처럼 느껴지겠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은 진심으로 한 조언이었기에 더욱 끔찍한 말이었다.

그 말은 녹시렐 공작가와 적대 가문의 여귀족이 남긴 것이었다.

적대 가문조차 동정할 만큼 그분의 시체가 끔찍한 모습이었음을 암시했다.

잔인한 선택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 말들까지도 전부 멜에게 전했다. 그것이 인어를 위한 선택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그분도 100년 넘게 당신을 가둬 두려고 악의를 품었던 건 아니었을 거예요.”

감금은 변명할 여지도 없이 잘못된 행동이다.

다만 그분이 인어에게 일부러 고통을 주기 위해 100년 동안 호수에 버려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아…… 으…….”

그 어떤 이야기가 나와도 담담히 듣고 있던 멜은 세르베인이 살해당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점점 몸을 웅크리기 시작했다.

덜덜.

그는 귀를 막고 싶은 듯, 손을 귓가로 가져갔지만 차마 귀를 막지는 못했다.

떨리는 가는 손목과 낡은 팔찌가 안쓰러웠지만 나는 계속 말했다.

“그분은 열다섯 살에 살해당하셨어요.”

“……아니야.”

줄곧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멜이 처음으로 반응했다.

멜은 고개를 흔들더니 말했다.

“아니야. 세르베인은…… 세르베인은 약하지 않아. 그 애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강했어. 나를 죽이려던 사람들을 한 번에 막을 만큼, 그 애는 강한데…….”

멜은 비척거리며 움직이더니 내 팔을 잡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치 신에게 기도하는 인간 같았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있는 나를 붙잡고 처절하게 말했다.

“100살까지도 살겠다고 했어. 사실, 아직 100년이 되지 않았잖아……. 조금 남았잖아. 그러니까 그 애는 살아 있어. 세르베인은, 살아 있다고. 죽었다면 이 저택에 돌아왔을 테니까-.”

모순이 많은 말이었다.

종종 인어의 말에서 느낀 어긋난 상식은 그분의 말에 의한 것 같았다.

나는 담담히 인어의 잘못된 상식을 고쳐 주었다.

“……그 시절보다는 나아졌겠지만 지금도 인간의 평균 수명은 100살이 되지 못해요.”

“…….”

“그리고 인간은 죽으면 없어져요. 시체만 남을 뿐. 다시 만날 일 따위 없어요.”

매몰찬 말이지만 해야 했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인어는 앞으로도 계속, ‘세르베인은 살아 있어. 인간은 100세까지 살아. 인간은 죽어도 저택에서 만날 수 있어.’ 같은 잘못된 상식을 가지고 희망을 가지겠지.

누군가는 이 역할을 맡아야 했다.

“그것도…… 거짓말인 거였어?”

멜이 입꼬리를 덜덜 떨며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멜은 이내 체념한 듯 고개를 푹 숙이더니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섰다.

쇠 문고리조차 한 손으로 으스러뜨리던 존재가 지금은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처럼 연약해 보였다.

그는 조용하고 차분하게 말했다.

“……밖에 나가야 한다고 했지?”

“네. 이것저것 식재료들을 사야 할 것 같아서요.”

“갔다 와. 너무 늦지는 마.”

멜은 뒤돈 채 잠잠히 말했다.

나는 그의 말투가 묘하게 누그러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내게 정이 들어서가 아니라 독기가 빠져나간 것에 가까웠다.

복잡한 심정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물었다.

“같이 나가 보지 않을래요? 제가 마을 소개 정도는 할 수 있어요.”

“됐어. 난 어차피 못 나가.”

멜은 살짝 뒤돌아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창백하고 힘없는 얼굴이 보였다. 차마 그 얼굴을 억지로 붙잡고 이유를 캐물을 수는 없었다.

“……금방 올게요.”

끼이익-.

잠금장치조차 해놓지 않은 문을 열고 나왔다.

문을 닫기 직전에 멜을 바라봤지만 그는 뒤돈 채, 계단을 오를 뿐 이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터엉!

둔탁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잠겨 있지 않은 문을 보며 집주인이 제 목숨의 안전도 신경 쓰지 않는 정신이상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인어가 자신의 세르베인이 언제든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게 문을 열어 뒀던 게 아닐까.

“이상하지…….”

바라던 대로 모든 것이 잘 풀렸는데도 마음이 불편했다.

인어는 공작가에 관심이 없고, 이제 나를 죽이려 들지도 않았다.

내가 그 세르베인이라고 착각하지도 않았다.

‘……그래. 매정해 보여도 진실을 알려 주는 게 인어를 위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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