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화
반쯤 미쳐 있는 눈동자를 봤을 때는 크게 기대한 것이 없었다.
갑자기 살해당하지만 않아도 다행이었다.
그런데 공작이 무엇인지 알고, 내가 정당한 후계임을 인정하다니…….
‘아, 물론 저기서 ‘세르베인’은 내가 아니라 증조할아버지의 조카분을 의미하는 거겠지.‘
그걸 떠올리니 머리가 아팠다.
이 꼬인 상황을 어디서부터 풀어내야 할지 막막했다.
“있잖아요……. 아니, 있잖아. 할 말이 있는데…….”
내가 천천히 ‘나는 그분과 이름만 같은 후손이고, 그분은 진작에 돌아가셨다.’라고 설명하려 했다.
그 순간, 인어가 웃으며 내 말을 잘라먹었다.
마치 타인과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잊은 것 같았다.
“기다리면서 너의 것을 탐내는 것들을 전부 죽여 버렸어. 잘했지?”
응. 아니다. 여기서 내가 그분이 아니라고 말하면 나도 죽는다.
나는 계획을 변경하기로 했다.
당분간, 적어도 이 저택을 탈출해서 도움을 요청하기 전까지는 증조할아버지의 조카분인 그 ‘세르베인’을 연기해야 할 것 같았다.
* * *
미친 인어와 사는 것은 첫날부터 녹록지 않았다.
인어는 사근사근 웃는 얼굴로 말했다.
“세르베인. 방에 가서 쉬도록 해.”
“응.”
냉큼 대답했지만 쉽게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아직 인어가 내게 그 어떤 방도 소개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방을 소개해 주려고 그러는 건가?’
그렇게 생각할 때 인어가 재미있는 장난감을 보듯 날 바라봤다.
“방에 가서 쉬라니까? 왜 가만히 있어?”
대문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인어는 눈을 휘어 가며 웃었다.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얼굴이었다.
분명 아름다운 미소였지만 그것을 보는 내 손은 식은땀으로 젖었다.
뒤늦게 깨달았다. 인어는 내게 방을 소개할 생각이 전혀 없다.
그는 나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가야지. 갈 거야.”
방이 어디냐고 묻는 순간 닥쳐올 미래가 아무리 봐도 잿빛이라서 나는 그냥 웃으며 얼버무렸다.
천천히 계단을 향해 걸었다.
무모한 짓임을 알지만…… 방 위치를 스스로 추리해 내야 했다.
저벅저벅.
‘단 한 번도 방문해 본 적 없는 대저택에서, 공작의 딸이 사용했을 만한 방을 한 번에 찾아야 한다니…….’
나는 생각할 시간을 갖기 위해 일부러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그 순간에도 인어의 끈질긴 시선은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턱 아래로 식은땀이 한 방울 떨어져 흘렀다.
‘일반적으로 귀족 영애의 방은 어디에 위치할까? 적어도 1층은 아니야.’
가구의 배치, 혹은 저택의 구조를 통해 어떤 힌트라도 얻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저택을 살필수록 알게 된 것은 약 90년 전, 이곳에서 어떤 참상이 일어났을지 정도였다.
요즘에 지어진 저택과 달리 녹시렐 공작가는 아주 옛날에 지어진 건물이라 바닥이 나무 재질이었다.
그래서 꺼림칙한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희미하지만 핏자국이었다.
또한 공작가라면 복도를 장식하는 장식품이 많아야 정상인데 제대로 된 것들이 하나도 없었다.
벽에 못 자국만 있는 걸 보니 그림 같은 것들도 누군가 챙겨서 도망간 모양이었다.
저벅저벅.
뒤에서 인어가 티가 나게 발소리를 내며 따라오기 시작했다.
뒤돌아서 표정을 보진 않았지만 분명 즐기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드는 가설이 있었다.
‘혹시 그는 오랜만에 돌아온
“세르베인.”
에게 심통이 나서 장난을 치는 게 아니라, 이미 내가 그
“세르베인.”
이 아니란 걸 아는 게 아닐까.’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어 그 생각을 떨쳐 버렸다.
정말 그것이라면 사태가 너무 절망적이다.
그 경우에는 내가 이 저택을 살아서 빠져나갈 수 있는 확률이 0%다.
멈칫.
“…….”
2층에 도착했다. 여기서 선택을 해야 한다. 3층으로 가야 할지, 아니면 2층에서 멈춰 설지.
……일단 딸의 방을 1층에 둘 리는 없다.
그렇다고 3층에 방을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분은 몸이 매우 약했고, 3층에서 지내는 건 이동이 너무 불편하니까.
나는 계단을 더 올라가지 않았다. 맞는 선택이었는지 가볍게 웃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하하, 오랜만이어도 방 위치는 기억하나 봐. 다행이네.”
……웃으며 말하는 걸 보니, 생각보다 정확한 방 위치를 아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집착하지 않는 건가?
‘그렇다면 저 말대로 오랜만이라서 이 이상은 기억이 안 난다고 말해 볼까.’
나쁘지 않은 선택인 것 같았다.
“그 방 말인데-.”
냉큼 방금 떠올린 변명을 인어에게 말하려 했다.
하지만 인어가 순식간에 웃는 얼굴을 지웠다.
“하긴. 늦게 돌아온 것도 모자라 방 위치도 기억 안 난다고 하면 내가 무척…… 서운할 거야. 그렇지?”
……닥치고 추리나 하자.
나는
“그, 그렇지.”
하고 웃어 준 뒤 다시 앞을 바라봤다.
말 한마디가 오갈 때마다 수명이 한 줌씩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끔찍하게도 2층에 존재하는 방들은 전부 문이 똑같은 형태였다. 문패 같은 건 역시나 달려 있지 않았다.
방은 총 다섯 개였다. 여기서 내가 답을 맞힐 확률은 20%다. 즉 망할 확률은 80%다.
‘일단 침착하자. 바로 계단 앞에 있는 방이 그 사람의 방일 것 같진 않아.’
감이었다. 중요한 위치의 사람의 방이 모두가 오가느라 시끄러운 계단 앞일 것 같지는 않다.
그러면 총 네 개의 방이 남았다.
인어는 계단 손잡이에 기댄 채 가만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왼쪽 복도에 방이 두 개가 있고, 오른쪽 복도에 방이 두 개 있었다.
일단 한번 삐끗하면 끝이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까.’
심장이 쿵쿵 뛰었지만 머리는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증조할아버지가 조카분의 방 위치에 대해서는 왜 말하지 않으셨는지 조금 슬퍼졌다.
그때 문득,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았다.
쨍그랑!
‘꺄악!’
내가 침대에 앉은 채 창문으로 책을 던져 버리는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평소에 화가 나도 유리를 깨버리는 대범한 성격은 아니었다.
도대체 왜 이런 이미지가 떠올랐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그것 덕분에 떠올린 건 있었다.
그분이 뭔가를 자주 던지는 사람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외출을 잘 못 하는 사람에게는 바깥이 잘 보이는 창문이 있는 방을 주었을 것이다.
‘즉 방은 외곽에 있어야 해.’
선택지가 두 개 남았다. 이제 남은 건 오른쪽이냐, 왼쪽이냐다.
툭. 툭. 툭.
여기서부터는 정말로 답이 없다.
시간은 흘렀고, 인어는 재촉하듯 손잡이에 손가락을 일정한 간격으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나는 복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노려봐 봤자 뭔가 바뀌는 건 없는데도 그랬다.
‘세르베인!’
그 순간 또 환각이 보였다.
노란 수선화처럼 예쁜 금발을 가진 어린 소년이었다.
소년은 녹황색 눈을 다정하게 빛내며 복도를 뛰어다녔다. 그러더니 어느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똑똑!
달칵.
‘세르베인. 뭐 해?’
소년은 문을 열고 빼꼼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빼내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웃었다.
‘이쪽이야, 세르베인.’
“뭐 해, 세르베인?”
“……!”
바로 귓가에 들린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장난스러운 말투와 달리 인어의 눈빛은 지루하다는 듯, 서늘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평온한 척 목소리를 지어냈다.
“미안. 잠시 생각 좀 하느라.”
“그래? 피곤한가 봐. 어서 방에 가서 쉬어. 본인 방이라면 당연히 찾을 수 있는 거잖아.”
인어가 빙긋 웃었다. 한번 방을 잘 찾아보라고 대놓고 비꼬았다.
그 명백한 조롱 속에서 확신했다.
인어는 내가 그 세르베인이 아니란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더 이상 그의 시험이 무섭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저벅저벅.
나는 오른쪽 복도로 걸어가 가장 끝 쪽에 있는 방 앞에 섰다.
환상 속 금발 소년이 문을 두드렸던 방이었다.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인어가 단숨에 나를 따라와 내 팔을 잡고 문을 열지 못하게 제지했다.
“……왜 그쪽으로 가는 거야?”
“…….”
나는 말없이 인어의 얼굴을 바라봤다.
인어의 얼굴이 동요하고 있었다.
드륵-.
조금 반항하는 기분으로 대답하지 않고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인어가 이제 내 팔이 아닌, 손잡이를 잡은 손 위로 손을 겹쳐 나를 멈추었다.
텁!
내 손과 겹쳐진 인어의 손을 바라봤다.
그 손은 쇠 손잡이를 일그러뜨릴 만한 괴력을 가진 손처럼 생기지 않았다.
하얗고, 길쭉하고, 생채기 하나 없는 예쁜 손이었다. 마치 백조의 날개 같았다.
절그럭.
문득 아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인어의 손목에 시선을 빼앗겼다.
거기에는 낡은 싸구려 팔찌가 있었다.
금방이라도 줄은 끊어질 듯했고, 달려 있는 조개나 소라 껍데기들은 군데군데 깨지고 마모되어 뭉툭했다.
“너.”
바로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팔찌에서 시선을 떼고 인어의 얼굴을 바라봤다.
인어의 얼굴은 가까웠고, 혼란스러워 보였다.
“열지 마.”
“…….”
“네가 무슨 자격으로 이 방을 쓰겠다는 거야.”
처음에는 혼란스러움이었지만 마지막에는 사나운 기색이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인어의 푸른 눈을 계속 바라봤다.
마치 호수에 반사되듯, 그 눈동자에 나의 모습이 반사되어 보였다.
그 속에 비친 나는 나답지 않게 건조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애처로운 것을 보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인어의 이름이 기억났다.
아마 은연중에 증조할아버지가 말씀해 주셨던 것을 기억한 것이겠지.
“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