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화
그 목소리가 너무 구슬펐기에 순간 동요할 뻔했다.
’정신 차려. 저 남자가 내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들었잖아.‘
프로셴이 말했다.
저택에 있던 남자가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고. 그래서 내 친척인 줄 알았다고.
거듭 말하지만 내겐 친척이 없다. 그래서 나는 이 저택을 점령한 이가 나의 지인일 가능성을 고려했다.
나를 찾다가 수소문 끝에 녹시렐 저택에 도달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저 얼굴을 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저 남자와 얽힌 인연이 없다. 저렇게 생긴 남자라면 스치듯이 봤더라도 기억했겠지.
’역시 귀족파에서 내 신상을 캐낸 모양이군. 미남계를 쓰라고 보낸 사람일 것이다.’
이 외에는 남자가 내 이름을 아는 것이 설명되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이 남자를 어떻게 내쫓을지 고민했다.
그 순간에도 남자는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세르베인……이지?”
계단에 서서 나를 바라보던 그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간헐적으로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는 굉장히 애처로워 보였다.
처음에는 연기 한번 잘한다고, 그리 비아냥거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냉정을 되찾을수록 나는 내 추측의 빈 구멍을 발견해냈다.
‘겨우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나를 방심시킨다는 계획은 너무 허술하지 않나.’
귀족파에서 보낸 이가 사용하기에는 술수가 너무 어리석었다.
……또한 수작이라고 믿기에는 저 표정이 너무 절박하고 설움에 젖어 있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저 남자가 귀족파에서 보낸 인물이라면, 주기적으로 귀족파가 이 저택에 암살자를 보낸 이유가 설명되지 않아.’
확신했던 가설이 무너지자 귓가에 불길한 심장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표정을 알 수 있었다. 무표정이 깨지고 당혹감이 올라왔다.
‘그렇다면 저 남자의 정체는 뭐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뒤늦게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이상한 일이었다.
달빛을 받은 폭포처럼 고아하게 생긴 남자는 그저 슬퍼할 뿐이었다.
내게 전혀 위험을 끼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상대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다.
“당신은 도대체-, 아.”
뒷말을 집어삼켰다.
남자의 새파랗게 아른거리는 푸른 눈동자를 본 순간, 물고기 한 마리조차 살지 않았던 호수가 보이는 듯했다.
벼락처럼 증조할아버지가 말씀하셨던 ‘인어’가 기억났다.
그분이 호수에 가뒀다고 했지만, 내가 돌아보고 온 호수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인어.
완벽한 가설이 떠올랐다. 동시에 말도 안 되는 가설이었다.
하지만 그것만큼 이 상황에 맞아떨어지는 답이 없었다.
“세르베인……? 왜 대답을 안 해?”
그렇다면 저 이름은 내 것이 아니다.
확신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나는 이것만이 완벽한 답임을 확신했다.
‘저 남자가 증조할아버지의 이야기 속 인어다.’
그러면 저 부름은…… 내가 아니라, 증조할아버지의 조카를 부르는 것일 테다.
내가 그분과 너무 똑같이 생겼기에, 나를 그 사람으로 착각하는 것 같았다.
애초에 내가 이 이름을 받게 된 이유가 그분과 너무 닮은 탓이었으니까.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남자는 눈가를 붉게 물들인 채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전과 달리 빠른 걸음걸이에 기겁했다.
‘……인어라며. 다리가 아니라 꼬리가 있다며!’
비록 저 남자가 인어라고 확신하지만, 아무리 봐도 저 두 다리는 멀쩡한 사람의 것이었다.
어떻게 인어에게 사람의 다리가 있는 거지?
속으로는 울었지만 겉으로는 반사적으로 웃는 얼굴을 만들어 냈다.
발은 저절로 뒷걸음쳤지만 입은 뺀질뺀질하게 혀를 놀렸다.
“하하하, 저기, 공작님? 진정하시죠. 사람을 착각하신 것 같습니다.”
살면서 이 정도의 공포를 느낀 적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에서 도출될 미래는 하나였다.
억지로 호수에 갇혔던 인어가 바다로 돌아가지 않고 굳이 여기에 남았다.
자기를 가둔 사람 이름을 바득바득 부르면서.
이유가 뭐겠냐?
……정말 모르겠어?
당연히 복수잖아.
‘이대로 죽는 건가?’
더듬더듬 코트 속으로 손을 넣어 단검을 쥐려 했다.
하지만 그가 내게 가까이 왔을 때 훅 미친 피 냄새가 그 행동을 멈추게 했다.
“……당신.”
이때까지 도대체 몇 명이나 죽인 거야?
차마 직접 물을 수 없는 질문을 두려움과 함께 속으로 삼켰다.
전쟁터 한가운데 서 있으면 이런 냄새가 날까.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은 몸에서 피 냄새가 났다. 피부에 죽음의 향기가 배어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뒷걸음쳤다.
단검 따위로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사실 장검이 있어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세르베인. 왜 나를 피하는 거야?”
인어, 아니 살인귀가 말했다.
피 냄새를 풍기면서 살인귀가 가증스럽게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기다렸어. 네가 오기만을 기다렸어……. 그런데 왜 나를 떠나려 해?”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그가 손을 뻗었다.
“이리 와.”
나는 잠시 그 손을 멍하니 바라봤다.
백조 날개처럼 아름다운 손이었다.
오래도록 그 손을 잡아보길 원했던 것처럼, 이상한 갈증이 치솟으려 했다.
하지만 동시에, 저 손에 잡히면 죽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프로셴은 무슨 정신머리로 저 괴물과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거지?’
아니다. 뭔가를 알고 대화한 게 아니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만큼 둔했기에 태평하게 대화하는 게 가능했던 것이겠지.
나는 침착함을 유지하고 또박또박 천천히 말했다.
“죄송하지만, 공작님. 제가 잘못 찾아온 것 같습니다.”
“…….”
“저…… 그럼 안녕히 계세요.”
인어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순간을 틈타 재빨리 도망치려 했다.
그런데 믿을 수 없게도 뒤를 돌아 문을 열려고 시도하는 순간, 그가 내 옆에 서 있었다.
‘도대체……!’
내가 뒤를 돈 1초도 안 되는 순간에 그는 내 옆에 다가와 있었다.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였다.
‘내가 잘못 짐작한 것이길 바랐는데.’
괴로운 신음을 속으로 삼킬 때, 귓가에 인어의 서늘한 목소리가 달라붙었다.
“어딜 가려는 거야?”
“…….”
“다시 나를 버리려는 거야?”
천천히 고개를 돌려 마주친 푸른 눈에는 섬뜩한 안광이 드러나 있었다.
애처롭고 불쌍했던 모습은 연기였다는 듯, 껍데기를 집어치운 내면에는 새까만 찌꺼기만 존재했다.
인어의 투명한 물빛 눈동자는 동공이 활짝 열려 있었다.
내가 문을 열지 못하도록 손잡이를 잡은 손이 분노로 떨렸다.
콰득!
‘미친.’
쇠 손잡이가 인어의 손안에서 찌그러들었다.
나는 찌그러진 손잡이에서 시선을 떼고 억지로 인어를 바라봤다.
인어가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이제 빛 한점 들어 있지 않았다.
완전히 맛이 가 있었다.
“……너는 죽으면 저택에 있겠다고 했지.”
아니요. 사람은 죽으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데요.
목숨이 아까우니 그 말은 속으로 삼켰다.
도대체 증조할아버지의 조카분은 인어에게 무슨 말을 했던 걸까.
인어의 그 상식에서 벗어난 지식에 대한 오류를 지적할 틈도 없었다.
갑자기 웃는 얼굴을 지운 그가 서늘하게 물었던 까닭이었다.
“죽고 싶어서 그래?”
그 말을 들은 순간 문에서 바로 손을 뗐다. 생존 본능이었다.
“공작님, 제가 어딜 가겠습니까. 그냥 뒤돌아본 거예요! 하하하, 이곳이 제가 머물 곳인가요?”
나갈 의사가 없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성큼성큼 저택 내부로 걸음을 옮겼다.
식은땀으로 옷이 축축해졌지만 일부러 능청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살기 위한 연기였다.
“제가 잠시 착각을 했군요. 저는 국왕 폐하께서 추천하신 보좌관이랍니다.”
“…….”
“저, 세르베인. 이 녹시렐 공작가에 뼈를 묻겠습니다. 하하하!”
“…….”
“하하…… 하…… 하…….”
인어가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반응도 없어서 나도 어색함에 결국 입을 다물었다.
인어는 한참 동안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 하늘색 눈동자는 여전히 동공이 열려 있었고, 빛 한 점 없이 죽어 있었다.
그 눈을 계속 바라보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아.”
갑자기 인어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왔다.
하지만 그 작은 탄성이 왜 그렇게나 불길하게 느껴졌을까.
‘혹시…… 이제 제정신이 든 건가?’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인어를 관찰했다.
다행히 인어의 눈이 방금처럼 180도로 돌아 있지는 않았다.
어쩌면 지금은 360도로 미쳐서 제정신인 것처럼 보이는 걸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겉으로 보기에는 훨씬 온화해진 모습으로 인어가 말했다.
심지어 이번에는 꽤 정상적으로 보이는 미소도 지었다.
“세르베인.”
“네?”
“혹시 미친 거야?”
……미친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잖아요.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서 어정쩡하게 웃었다.
어떻게 저 말을 받아쳐야 할지 고민할 때 다행히 인어가 계속 말했다.
“공작은 너잖아, 세르베인. 이 집안은 네 것이잖아.”
“그게 맞기는 한데요…….”
“그리고 또 하나. 아까부터 거슬렸는데 왜 존댓말을 쓰는 거야?”
“……미안. 아무튼 그게 맞기는 한데.”
아주 미친 건 아닌가?
보기와 달리 인어는 어느 정도 사리 분별이 가능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