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 화 (24/132)

24 화

“조용히 해.”

“바다에게 저주라도 받은 게 분명, 악!”

퍽!

그렇지 않아도 평생 갖고 살아온 고민이었다.

나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프로셴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보통 귀족 여성들과 달리 나는 주로 바지 차림을 고수했기에 발차기 정도야 아주 쉬웠다.

그의 말대로 나는 재수가 없어서 배를 못 탄다.

그러니 단기간에 배를 타고 녹시렐 공작가로 시찰을 다녀오는 일정에 당연히 참여하지 못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바다와 관련되면 운이 아주 없었다.

그 예로, 내가 바닷가를 산책하면 갑자기 내 키만 한 파도가 몰려와 나를 몽땅 적셨고, 배를 타면 배가 풍랑에 휘말렸다.

“악!! 왕한테 이래도 되는 거야?”

왕의 비명 소리가 들렸을 텐데도 문밖에 있을 기사들은 들어오지 않았다.

새삼 프로셴의 편이 없다는 게 실감 났다.

하긴. 아무것도 없이 뒷골목을 떠돌던, 혈통만 귀한 그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건 전부 다 나의 덕이었다.

프로셴은 허수아비 왕이나 다름없었다.

그에게는 자신의 권력, 자신만의 지지 세력이 없었다.

나라면 그런 상황에 기가 죽고, 조금 분하기도 할 텐데 정작 프로셴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지금도 긴장감이라고는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걸 보며 혀를 찼다.

“고까우면 작위라도 주고 말해. 난 지금 공작도 뭣도 아니니까.”

“평민이면 더 나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아하. 그래서 이제 막 성군이 되겠다고 왕이 되신 분께서 저같이 죄 없고 선량한 평민을 처벌하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순진하고 멍청한 나의 왕은 진부한 말장난에도 절절매었다.

빨리 내가 공작이 되어야지.

안 그러면 그동안 다른 귀족들에게 뜯어 먹혀서 뼈만 남을 게 분명했다.

그때 없는 사람처럼 가만히 있던 미나엘 헥사바임 남작이 입을 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앉은 채 잠을 자고 있다가 시끄러워서 깬 것이었다.

“……세르베인. 진정해라. 어차피 너와 내가 공작이 될 것은 모두가 알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지 않나?”

미나엘 헥사바임은 나와 프로셴이 산만해지면 늘 중간에서 진정제 역할을 했다.

그녀는 겉보기에는 예민하고 날카로워 보이는데 의외로 ‘될 대로 돼라.’가 기본 성격인 사람이었다.

나는 그녀의 유유자적한 모습을 보다가 이성을 되찾고 말했다.

“그렇긴 한데 나한테 이건 꽤 중요한 문제야.”

“그 저택이?”

“응.”

“왜지? 요즘 시대에 귀족이 가문의 땅에 저택을 짓고 살 필요는 없어. 게다가 당분간 일도 많을 텐데 수도에서 사는 게 낫지 않나?”

맞는 말이었다. 프로셴도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열심히 동조하며 말했다.

“맞아. 게다가 세르베인은 배를 못 타잖아. 매번 왕궁으로 어떻게 오려고 그래……. 육로로 오려면 열흘 정도 걸리는데.”

“그래도 안 돼. 난 그 저택에 꼭 가야 해.”

사실 말하면서도 그게 냉정한 결정이 아님을 알았다.

말마따나 나는 배를 못 타고, 옛 녹시렐 공작가와 수도 사이의 최단루트에는 바다가 있다.

하지만 나는 늘 그곳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들에게 말한 적은 없지만 기이할 정도로 강박을 느꼈다.

증조할아버지께서 늘 그 저택의 이야기를 들려주셨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저택의 위치가 가지는 정치적 상징성 때문인 걸까.

나는 그곳에 내가 풀어야 할 숙제가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정 네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나를 빤히 바라보던 미나엘은 어깨를 으쓱였다.

익숙한 모습이었다. 미나엘은 늘 남의 일에는 남의 의견을 존중했다.

“아니, 넌 왜 그렇게 늘 수긍이 빠른 건데…….”

프로셴은 미나엘이 조금 더 나서 주길 바라는 눈빛을 지었지만 효과는 없었다.

“내가 수긍이 빠른 게 아니라 세르베인이 고집이 센 거지. 아무튼 난 좀 자야겠군. 알아서 갈등을 해결하도록 해라.”

미나엘은 프로셴과 나를 나란히 공격하고 휴식을 즐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회색 머리칼이 살짝 흔들리는 게 보였다.

며칠간 일이 많아서 잠을 못 잤다고 들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가 다시 프로셴을 추궁하는 것에 몰두했다.

다만, 이번에는 잠을 자는 헥사바임을 배려해 조용히 물었다.

“그래서 시찰 결과는 어땠어? 어떤 무리가 있었지?”

프로셴은 녹시렐 저택의 소문을 그저 살벌한 뜬소문이라고 생각했고, 미신이라 믿었었다.

하지만 나는 식인귀 이야기가 헛소문이 아님을 알았다.

실제로 타 가문에서 몇 번씩이나 녹시렐 공작가 저택으로 사람을 보냈다는 것과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없다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잠잠한 건, 적대 가문들도 떳떳지 못한 이유로 사람을 보낸 것이었기에 사람이 죽은 걸 비밀로 덮었기 때문이었다.

“프로셴?”

그런데 내 질문을 받은 프로셴의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보지 않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 눈 똑바로 봐. 너 무슨 짓 했어.”

“미, 미안해! 그,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어.”

“무슨?”

“거기에 사람이 살고 있더라고. 그래서, 그…….”

그 정도는 예상한 일이었다.

세상에 귀신은 없다. 그런데 누군가가 저택에서 죽어서 살아 나오지 못했다면 그곳에는 분명 사람이 있었겠지.

그래서 프로셴에게 기사들을 여럿 데리고 가라고 말했었다.

그렇다고 몇십 명이나 데려갈 줄은 몰랐지만.

“그래서 뭐.”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그러자 프로셴이 두 눈을 꽉 감더니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외쳤다.

“그 사람을 처리해야 너한테 공작위를 돌려줄 수 있을 것 같아!”

황당함에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뭐?”

“그런데 그 사람 누구야? 네 이름을 알던데……. 근데 친척이라도 네가 더 계승 순위가 우위라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 사람’이 누군데. 설마 생판 남한테 공작가를 넘겨주고 온 거야?!”

환장할 것 같은 기분이라 소리쳤다. 최근에 그렇게나 크게 소리를 지른 건 처음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세르베인 님!”

바깥에서 대기 중이던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내가 프로셴을 지키라고 심어 둔 자들이었지만, 그들은 내 안위를 더 신경 썼다.

왜냐하면 그들 중 대부분은 녹시렐 공작가 부흥을 위해 증조할아버지가 만들었던 단체에 속해 있었으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나가 봐.”

“네.”

나는 빠르게 그들을 물리고 흉흉한 눈빛으로 프로셴을 바라봤다.

“너 말이야, 무슨 헛짓을 한 거야?”

“지, 진정해! 세르베인.”

“진정하게 생겼어?!”

“그래도 노력해 봐!”

“너 일부러 나 화병 걸리게 해서 죽이려고 이러는 거야?”

“아니야…….”

마음 같아서는 테이블이라도 엎어 버리고 싶었지만 그러면 프로셴이 겁먹을 테니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마른세수만 하고 말았다.

“……일단, 천천히 말해. 전부 다.”

* * *

프로셴은 크게 사고를 쳤다. ……아주 크게.

황당함에 잠이 달아난 듯 보이는 미나엘이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참 이성적이었다.

“결론은 그 사람한테 모든 권한을 위임하고 왔다는 말이군.”

“그, 어쩌다 보니까……? 근데 나는 정말 네 친척인 줄 알았어. 그냥 저택이 너무 낡았기에 미리 관리라도 하라는 차원에서…….”

“프로셴. 세르베인에게는 친척이 없다. 귀족사를 조금만 열심히 공부했다면 알 수 있을 텐데.”

미나엘이 탄식했다.

하지만 사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부를 안 했어도 나와 같이 지낸 시간이 길다면 당연히 알 내용이었다.

“내가 누누이 친척 없다고 말했잖아!”

우리 가문은 내가 마지막 후손이다.

증조부, 조부는 돌아가셨고, 조부와 아버지와 나는 독자였기에 친척도 없었다.

답답함에 프로셴의 머리카락이라도 잡아당기고 싶었다.

“잠시.”

그때 미나엘이 살짝 회상하듯 인상을 찌푸리더니 덤덤히 말했다.

“사실 네가 가족사를 자주 말하진 않았다.”

“맞아, 맞아!”

프로셴이 절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랬던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한 번 말해도 좀 기억해 주면 안 되는 거냐고.

나는 속이 타서 차를 물 마시듯 마시고는 물었다.

“그리고 그자가 소문의 식인귀일 거란 생각은 안 해봤어?”

프로셴이 태평하게 반응했다.

“응? 네가 식인귀 소문을 경계하라고는 했지만, 그냥 소문이라며.”

“아니, 그러니까…… 하…….”

그렇게 말하긴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 건 네가 워낙 심약해서, 벌벌 떨까 봐 그런 거잖아.

한숨을 푹 쉬며 피곤에 찌든 눈자위를 꾹꾹 눌렀다.

이러나저러나 결국 뒤처리는 내 몫이었다.

“미안…….”

눈치껏 분위기를 읽은 프로셴이 일단 사과부터 하고 봤다.

저렇게 애가 또 침울해지면 나는 더 화를 못 낸다.

이상하게도 나는 맹한 건지, 순수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를 족속들에게 약했다.

자괴감에 빠져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보지 않아도 맞은편에서 쩔쩔매고 있을 프로셴의 형체가 보이는 듯했다.

“하아…….”

내가 화를 가라앉히느라 한숨만 쉬자 미나엘이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미나엘은 이미 벌어진 일, 사태 수습에 힘쓰기로 했는지 차분하게 물었다.

“됐다. 이미 엎질러진 물. 아무튼 어떤 사람이었지? 생김새는? 그리고 몇 명이나 저택에 살고 있었지?”

“한 명이었어.”

멈칫.

한숨을 멈췄다.

그럴 리 없었다.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여태껏 그 저택에 갔다가 행방불명된 인원은 모두 상당한 실력자였다.

그런 사람들을 혼자서 다 처리하는 건 불가능하다.

나는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럴 리 없잖아. 사용인처럼 보이는 인원을 다 합해서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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