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화
나는 곧바로 기사들에게 내 방에 있던 보물함을 건넸다.
그 외에도 원하는 것을 전부 가져가라고 했다.
몇몇은 괜찮다고 말했지만, 대부분은 내 방 안을 기웃거리며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들 중 몇몇은 이 상황에도 인어에 미쳐 있는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봤고, 몇몇은 나가는 순간까지도 내게 함께 도망가자며 연민의 눈빛을 보냈다.
덜커덩!
기사들은 내 방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커다란 유리 수조를 이고 방 밖으로 나갔다.
그중 가장 얼굴이 눈에 익은 기사가 마지막으로 나가기 전에 내게 말했다.
“아가씨. 부탁은 제가 꼭 책임지고 들어 드리겠습니다.”
“고마워.”
“……부디 평안하십시오.”
달칵.
그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방문을 공손히 닫았다. 그 말에 안심할 수 있었다.
마침내 모두가 사라지고 어두운 방에 나 혼자 남았다.
이제 아무도 내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기 위해 들어오지 않을 터였다.
그걸 깨닫자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아…… 윽…….”
무서웠다. 사실은 나도 죽는 게 무서웠다.
병으로 죽는 것도 무서웠는데,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그 이상으로도 끔찍하게 두려웠다.
“하지만 됐어. 이걸로…… 된 거야.”
내가 이곳에 있는 걸 발견한다면 반란을 일으킨 무리들이 이미 도망간 사용인들이나 기사들을 추적할 이유가 사라진다.
“나만 이곳에 있다면, 멜은 추적 없이 비교적 순조롭게 바다로 갈 수 있어…….”
나는 덜덜 떨리는 손길로 약병을 꺼냈다. 아버지에게 받은 이후 늘 품속에 지니고 있던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여기서 누군가가 나를 죽이러 오기를 기다려야 했다면 분명 미쳐 버렸겠지.
혹은 자진해서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을지도 모른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을 거야.”
답해 주는 이도 없는 어둠 속에서 홀로 말을 걸었다.
“나의 죽음은 몇 번이나 상상해 봤잖아.”
나는 기어서 침대로 향했다. 도저히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은 탓이었다.
추해 보이겠지만 갑작스러운 스트레스로 마비된 내 몸으로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덜덜 떨리는 몸을 침대에 눕힌 채 눈을 감았다.
최대한 아름답고 편안한 것을 상상하려 노력했다.
“아…….”
그러자 멜이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좋은 선택지는 아니었다. 그 얼굴은 내가 죽고 싶지 않게 만들었으니까.
내일 본다고 했지만 오늘이 마지막이었구나.
“그럴 줄 알았다면 한 번 더 뒤돌아서 네 얼굴을 볼 걸 그랬어.”
하지만 괜찮을 것이다.
네가 바다로 돌아가 사는 나날에도, 넌 나를 기억해 줄 테니까.
적어도 잠시 동안은 나를 사랑해 줄 테니까.
그때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들이 나의 행동을 재촉했다.
“아악! 벌써 저기까지 왔어!!”
“저 횃불들을 봐!”
“빨리 서둘러!”
그 소리를 들으며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 눈을 감았다. 손의 감각만으로 약병의 뚜껑을 찾아 열었다.
달칵!
떨리는 손으로 입을 열어 독을 식도로 흘려보냈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버지가 손수 고른 독인 만큼 편안한 죽음을 보장하는 것 같았다.
다만 천천히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듯하다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정말로 작별할 시간이었다.
* * *
약 80년 후.
수도의 외곽, 적당히 한적한 동네에는 나무로 된 아늑한 분위기의 2층 저택이 있었다.
그곳에는 100세에 가까운 노인과 그의 손자 부부. 그리고 그들의 딸이 살았다.
그들은 평민이었지만 크게 부족한 것 없이 평탄하게 살아온 가정처럼 보였다.
동네 사람들이 평가하기로 그 집안의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다정했고 온화했다.
따뜻한 분위기의 저택 외관만큼이나 따뜻한 사람들이라며 그들을 좋아했다.
저벅저벅.
그리고 어느 날 모두가 잠든 새벽, 증손녀는 증조할아버지의 방으로 향했다.
오늘 이별이 다가오리라는 동물적 직감에 의한 것이었다.
끼이익-.
색…… 새액…….
문을 열자 노인의 조용한 숨소리가 희미했다. 죽음이 가까워진 소리였다.
뚜벅뚜벅.
소녀는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 발소리에 침대에 누워 있던 노인이 눈을 떴다.
커다란 창문으로 달빛이 흘러 들어와 시야를 밝혔다. 덕분에 불 하나 켜지 않은 방에서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노인은 머리맡에 있는 산호색 머리칼의 소녀를 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
그건 늘 보던 사람을 본 얼굴이 아니었다.
마치 아주…… 아주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누군가를 본 듯한 얼굴이었다.
“세르……베인?”
소녀는 아이답지 않은 쓸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소녀는 노인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무엇이 노인을 위한 선택인지 알 수 없었기에 그랬다.
“……!”
하지만 표정만으로도 노인은 소녀가 누구인지 확신할 수 있었다.
몇십 년이 흘렀지만 단연코 알아볼 수 있었다.
“아, 으…….”
노인은 한참 동안 입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노인의 쇠퇴한 폐는 그가 원하는 만큼의 문장을 말할 수 있도록 돕지 않았다.
눈물이 흐르고 숨이 거칠어졌다.
조금 후에 노인은 우는 얼굴 위에 미소를 지으며 다정히 물었다.
“보……고 싶었어, 세르베인……. 나를…… 데리러 온 거……니?”
이미 제 기능을 다 한 몸은 한 단어씩 내뱉는 것만으로 숨이 가빠 왔다.
소녀, 세르베인은 노인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기억 속 노란 수선화를 닮았던 금발은 이제 회색빛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다정한 빛을 띠는 녹황색 눈동자는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세르베인은 침대에 누워 있는 노인의 회색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노인은 옅은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그는 작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미안……해……. 용서해 줘. 나는…….”
“……왜 사과하는 거야. 그러지 마.”
“흐윽……. 나는, 하아, 하아…….”
노인의 몸은 숨만 쉬어도 힘이 드는 상태였다.
노인은 힘이 없어 덜덜 떨리는 손을 움직여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풀어냈다.
차륵.
80년이었다. 거의 80년이었다.
그 시간 동안 계속 약속을 생각하며 목걸이를 지켜 왔던 노인이 말했다.
“돌려줄게. 약속, 했잖아…….”
“…….”
“마지막으로 널 봤으니…… 이제 편안히 눈 감을 수 있어.”
라헨이 웃었다. 그 순간 스물두 살의, 돌아올 것을 약속하고 걸음을 옮겼던 그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세르베인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라헨은 손을 뻗어 세르베인의 얼굴을 조심스레 만졌다.
“지금이라도…… 만나러 와줘서 고마워.”
그 말에 세르베인은 참고 있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제 뺨을 쓰다듬는 라헨의 손을 꽉 쥐었다.
“……내가 더…… 내가 더 고마워.”
“…….”
“편히 쉬어, 라헨 오빠.”
그 말에 노인은 웃으며 눈을 감았다.
세르베인은 이후로도 몇 시간 동안 노인의 손을 계속 제 뺨에 가져다 댄 채 가만히 있었다.
따뜻했던 몸이 식어 냉기가 느껴질 때까지도 계속 그러고 있었다.
* * *
“할아버지……?”
“…….”
“할아버지!!”
다음 날 아침, 남자는 노인에게 아침 인사를 하러 갔다가 오열하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듣고 놀란 아내와 딸이 서둘러 달려왔다.
“자기야. 무슨 일 때문에…… 세상에! 할아버님!”
“아니죠……? 아버지, 대답해 주세요. 증조할아버지 돌아가신 거 아니죠……?”
곧이어 가족들은 침대에 누워 있는 노인의 사망을 확인하고 오열했다.
눈물짓는 그들과 달리 노인은 너무나 평화로운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의 일이었다.
* * *
시대가 바뀌었다.
신성을 부수고 왕이 돌아왔다. 왕의 혈통은 빼앗긴 왕좌를 되찾았고 백성들은 돌아온 왕을 기뻐하며 맞이했다.
교황에게 붙어 배신했던 귀족들은 돌아온 왕의 눈치를 봤다.
모든 게 계획대로, 모든 것이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하나만 빼면.
“그래서 우리 가문은 언제 회복되는 걸까?”
나는 의자에 기대어 앉은 채 압박하듯 프로셴을 바라봤다.
얼마 전까지는 객식구였다가 지금은 왕이 된 프로셴이 내 눈치를 보며 쩔쩔매었다.
왕궁 내 응접실에서 왕이 주눅 든 모습을 보는 건 꽤 묘했다.
“그……게 말이야.”
프로셴은 내게 공작 지위를 돌려주기 위해 옛 녹시렐 공작가 저택에 시찰까지 갔다 왔으면서 당당한 기색이 없었다.
뭔가 일이 틀어져서 이러는 게 분명했다.
“너도 알다시피, 워낙 흉흉한 소문이 있었잖아. 거기 방문하면 실종된다거나, 그런 거.”
프로셴이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의 자색 눈동자가 나의 눈치를 살피며 일렁였다.
이미 알고 있던 소문이었다.
녹시렐 공작가 저택에 식인귀가 산다는 소문은 옛날부터 유명했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프로셴에게 물었다.
“그래서 기사들을 몇십 명이나 이끌고 저택에 갔니?”
“네가 여러 명 데리고 가라고 했었잖아…….”
“그렇다고 거의 한 부대를 다 데려가라는 말은 아니었지.”
“하지만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프로셴이 잠시 부르르 떨며 제 팔을 쓸더니 말했다.
“가는 길이 얼마나 어두침침했는데! 게다가 나는 너 때문에 미신을 믿는단 말이야. 진짜 식인귀가 있으면 어떡해! 안 그래도 저택 보니까 유령 나오게 생겼던데.”
신성을 무너뜨리고 왕이 된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신을 부정했던 사람이 귀신의 존재를 무서워한다는 게 황당했지만, 그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있었다.
“왜 나 때문에 미신을 믿는다고 하지?”
“널 보니까 세상에 저주 같은 관념적인 게 실존하는 것 같거든.”
그 말에 나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무슨 뜻인지 예상이 갔던 탓이었다.
하지만 눈치가 없는 프로셴은 계속해서 말했다.
“세르베인은 세상에 얼마나 재수가 없기에 배도 못 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