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화
그럴듯한 변명이 떠올랐다. 사실 변명이 아닐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는 남은 짧은 생 동안 저택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까.
울렁이는 속을 무시하고 말했다.
“나는 이 저택을 벗어날 수 없어. 그러니 널 만나지 못해.”
“어……?”
호수에서 얼굴만 빼꼼 드러낸 멜이 멍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애써 웃으며 멜을 손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말했잖아. 앞으로 넌 바다에 있고-.”
다음으로는 나를 가리켰다.
“난 저택에만 있으니까. 그래서 다신 만나지 못할 거야.”
그 말을 마친 순간 멜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 같았다.
첨벙!
하지만 멜이 순식간에 물속에 들어갔기에 내가 본 것이 사실인지 확인할 방법은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내게도 물이 조금 튀었다.
소매로 얼굴에 튄 물방울을 닦을 때 멜이 다시 수면에서 나왔다.
“……그래도 기억해 줘.”
멜은 방금 물에서 나와 턱 아래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애가 눈물을 흘렸는지는 이미 젖은 얼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멜이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봤다. 부들부들 떨리는 입꼬리를 올려 똑바로 소리 내어 말했다.
“만나지는 못해도, 내가 있었다는 것만은 기억해 줘.”
부탁하지 않아도 되는 내용이었다.
내가 어떻게 너를 잊겠어. 죽을 때까지도 기억 속에 껴안고 갈 거야.
죽어서도 잊을 수 있을까 싶어. 네가 있어서, 내 삶이 사랑을 알고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잖아.
“응. 그렇게 할게.”
착각이 아니었다. 그 눈에 맺힌 건 눈물이었다.
나는 손을 뻗어 멜의 눈물을 훔쳤다.
이제껏 무시하고 있던 가정이 고개를 들려고 했다.
그 순간, 나는 나의 진심이자, 간악하게도 나의 이기적인 가설을 확인하기 위한 말을 꺼냈다.
“사랑해.”
“…….”
짧은 정적이 흘렀다.
손으로 눈물을 훔쳤건만, 멜의 얼굴은 점점 더 설움으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내 작은 웅얼거림이 들렸다.
“……나도.”
믿을 수 없게도 멜이 팔을 뻗어 나를 조심스럽게 안으며 말했다.
“나도 사랑해.”
* * *
멜이 내게 사랑한다고 해줬어.
분명 내일도 내게 사랑한다고 해주겠지.
다음 날 해가 뜰 때까지 멜의 곁에 있고 싶었다.
사실 다음 날이 아니라, 내 삶이 허락하는 가능한 시간까지 계속 멜의 곁에 있고 싶었다.
물론 차가운 이성으로는 알았다. 내가 멜을 사랑하는 것만큼 멜이 나를 사랑하는 건 아닐 것이다.
곧 이별이 다가온다는 사실 때문에 감정적으로 휩쓸려 나온 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떤가.
그 말이 설령 진심 하나 섞이지 않은 거짓이라 해도 기쁠 텐데, 어느 정도라도 진심이라니. 더 바랄 게 없었다.
우리는 하루 종일 서로의 손을 잡고 있었다.
“세르베인, 차갑진 않아?”
“하나도. 네겐 뜨겁지 않아?”
“나도 괜찮아.”
누가 봐도 멜의 손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나의 손은 푸르게 질려 있었다.
그런데도 그 손을 놓고 싶지가 않았다.
“세르베인. 사실…… 나는 널 처음 봤을 때, 바닷속에 있는 작은 산호를 떠올렸어.”
멜은 마치 세상의 비밀이라도 속삭이는 듯 내 귓가에 매달려 사랑스럽게 속삭였다.
나는 그게 내 머리카락 색 때문임을 짐작했다.
언뜻 들었다. 나는 산호를 본 적이 없지만 사용인들은 내 머리를 빗겨 주며, 내 산호빛 머리칼이 아름답다고 칭찬해 주고는 했었다.
“……아버지도 나와 같은 머리 색인데?”
나는 조금 놀리듯이 장난 서린 웃음으로 멜에게 말했다.
그러자 멜은 정색하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그 사람은…… 산호 아니야.”
“그래그래…….”
“정말로 아니야……. 그 사람은 산호 아니야.”
“알겠어. 믿을게. 나만 너의 산호잖아. 그렇지?”
“……응.”
나는 수줍게 웃는 멜과 마주 보고 웃으며 잡은 손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멜은 갑작스러울 텐데도 내게 가만히 손을 맡겼다.
그 애는 나의 행동을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경계하지 않았다.
촉.
나는 멜의 하얀 손등에 입을 살짝 맞췄다.
그러고서 멀어지려 했지만 욕심이 생겨 천천히 입술을 내려 그 손가락을 깨물었다.
“세르베인……?”
멜은 조금 아픈 듯 신음성을 내었지만 손을 빼려고 하지는 않았다.
내 욕심으로 그를 아프게 한 것이 미안해서 나는 그 자리에도 입을 가볍게 맞췄다.
멜의 약지에 나의 순흔이 남아 있었다.
“내일, 반지를 가져올게.”
멜은 갑자기 왜 반지 이야기가 나오는지 의아해하는 얼굴이었다.
그는 이제 인간의 언어를 잘 알았지만 여전히 관습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많았다.
나는 그냥 미소 지었다. 그에게 마음의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려 주지 않았다.
“그냥 네게 주고 싶어서 그래.”
* * *
나는 해가 지도록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자 걱정이 됐는지 사용인들이 우르르 나를 찾으러 왔다.
“아가씨. 해가 지면 돌아오기로 하셨잖아요.”
나를 데리러 온 하녀들을 물리고 싶었다.
실제로도 그러려고 다짐할 때 멜이 말했다.
“세르베인. 너무 밤이 늦었잖아. 더 있으면 네가 있기에는 추울 거야.”
“……멜.”
“내일이 있잖아. 내일도 나는 네 곁에 있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멜의 손은 아쉽다는 듯이 나의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결심한 듯 내 손을 부드럽게 놓으며 멜이 말했다.
“내일 봐, 세르베인.”
“……응.”
나는 하녀의 손에 이끌려 저택을 향했다.
걸음을 옮기던 도중 몇 번이나 뒤를 돌아 멜을 바라봤는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다만 분명한 건, 그때까지도 멜은 계속 나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내가 뒤돌아 눈을 맞출 때면 싱그럽게 웃어 주었다는 것이다.
‘사랑해.’
입으로 벙긋거리며 멜이 말했다.
그 모습에 기분이 바보처럼 금세 좋아졌다. 나 역시 멜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후 앞을 보며 걸었다.
그 얼굴을 보니, 그 웃음을 보니, 조금만 기다리면 내일이 올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뒤돌아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이대로 순간이 멈추기를.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사랑하는 순간이 계속되길 간절히 바랐다.
* * *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일기를 썼다. 잊을 리 없겠지만, 오늘을 잊고 싶지 않아서 글을 남겼다.
네가 내게 처음으로 사랑한다고 말해 줬다. 네가 내게 내일 만나자고 해줬다.
문득, 펜을 쥔 손이 살짝 마비가 되어 글자를 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직 써야 하는 문장이 있었다.
쾅! 쾅!
나는 왼손으로 몇 번이나 오른손을 내리쳤다.
조금 움직이기 시작한 오른손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힘을 주어 늘 적었던, 한 치도 틀림없는 문장을 써 내려갔다.
오늘도 너를 사랑해.
* * *
그날 밤, 나는 소란스러운 기색에 잠에서 깼다.
조금 거슬리는 정도가 아니라, 미친 듯이 소란스러웠다.
순간 불길한 생각이 들어서 몸을 일으켰다. 막무가내로 방 밖으로 뛰쳐나가지는 않았다.
먼저 무슨 상황인지 알아보기 위해 방문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우편이 왔어. 공작께서 살해당하셨대!”
“군사가 이쪽을 향하고 있다고 들었어!!”
“다들 도망쳐!!”
“이것이라도 챙겨서-.”
자정이 지난 새벽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도착했다.
내게 정식 보고는 오지 않았고, 하인들의 입방아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나는 충격에 휩싸일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럴 여유가 못 되었다.
머리로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해 아무렇지도 않은데 몸은 의지를 벗어나 덜덜 떨리고 있었다.
소리만 들어도 방 밖의 상황은 혼란 그 자체였다.
쿠당탕탕!
“아아악!”
“그거 놔! 그건 내가 가져갈 거야!”
우르르 복도를 뛰어다니는 소리와 공포에 질린 사용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리저리 벽을 장식한 장식품을 훔쳐 가기 위해 애를 쓰는 소리도 들렸다.
두두두두!
그때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본능적으로 내 방을 향하는 것임을 알고 문에서 떨어졌다.
벌컥!
“아가씨!”
아니나 다를까, 문이 열리고 기사들이 찾아왔다. 나를 호위하기 위해 아버지가 남겨 둔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도망칠 때 눈에 띄지 않도록 평범한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기사들이 다급히 외쳤다.
“깨어나 계셨군요. 어서 움직이셔야 합니다. 저희가 안내를 할 테니 빨리-.”
기사 서약을 한 탓에 제 몸만 챙겨서 떠나는 다른 하인들과 달리 의리를 지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가 저들과 얼마나 멀리 도망갈 수 있을까.
물론 운이 좋아 도망치는 게 성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라헨이 있는 곳으로 간다면, 살 확률이 높다.
하지만 내가 지금 떠났다가는…….
나는 약속했던 일을 이행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내 사랑을 지켜야 한다.
나는 떨리는 몸을 애써 제어하고 담대하게 말했다.
“그것 말고 부탁이 있어.”
“아가씨! 지금 상황이 어떤지 모르시는 모양인데 당장 반란 세력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
“알고 있어.”
나는 최대한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며 말했다.
죽기 전 가장 먼저, 그리고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어. 다만, 인어를 바다로 옮겨 줘.”
“……아가씨?”
“나는 지켜 주지 않아도 돼. 그리고 뭐든 가져가도 좋아. 내가 가진 보물들을 전부 줄게. 그러니 그 부탁만은 꼭 들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