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화
아버지가 저택을 비운 후, 나는 제한도 없이 오랫동안 호숫가에 머물렀다.
밤에 열이 올라 죽을 것 같아도 어떻게든 몸을 이끌고 호숫가로 나왔다.
이러라고 블미에가 처방해 준 건 아니겠지만…… 진통제의 덕이 컸다.
내 일상은 해가 뜨자마자 호수에 와서 시간을 보내다가, 해가 진 저녁쯤이 되어서야 저택으로 돌아가는 것이 되었다.
“이렇게 나랑 오래 있어도 돼?”
어느 날 멜이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리며 내게 물었다.
기쁜 듯한 얼굴에 걱정하는 얼굴이 섞여 미묘했다.
……내가 잘못 파악한 것이겠지. 멜이 내가 오래 있다고 해서 기뻐할 리 없었다.
나는 어떤 가설을 애써 미뤄 두고 말했다.
“응. 괜찮아. 아버지가 자리를 비웠거든.”
“왜?”
“그냥. 잠시 볼일이 있어서 가셨어.”
나는 더 그 주제에 대해 언급하기가 곤란해서 부러 화제를 옮겨 말했다. 멜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이제 3주 정도밖에 안 남았잖아. 그래서 가능한 한 너랑 오래 있고 싶어서 그래.”
네가 바다로 돌아갈 날이 곧 다가온다는 뜻에서 한 말이었다.
기뻐하길 바라서 한 말이었건만 멜은 조금 어두워진 안색으로 말했다.
“그러네……. 시간이 그 정도밖에 안 남았네.”
왜 아쉽다는 듯이 말하는 걸까.
나는 괜히 헛된 착각을 하고 싶지는 않아서 그냥 그 말을 넘겨 버렸다.
이후 멜은 말없이 내가 식사를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식사라고 해봤자 대단한 건 없었다.
저번에는 멜의 앞에서 건강해 보이려고 무리해서 빵 종류를 먹었다가 고생한 적이 있었다.
그때 속이 뒤집어져 멜이 보지 않는 곳까지 뛰어가 토하느라 진땀을 흘렸었다.
그 이후에는 객기를 부리지 않고 식사로 액체 종류만 조금 마셨다.
식사가 끝나자 멜은 잔뜩 울상을 지은 채 물었다. 속상해하는 얼굴이었다.
“세르베인. 예전보다 음식이 많이 줄었어. 괜찮아?”
“어?”
“그때, 방에서 식사할 때는 액체 말고도 다른 것도 먹었잖아.”
멜이 지난 일을 회상하며 말했다.
“특히 예전보다 많이 줄어든 것 같아. 그때는 가끔 해초 같은 거랑, 갈색 덩어리랑, ……물고기도 먹었잖아.”
해초는 샐러드를 말하고, 갈색 덩어리는 스테이크를 말하는 것 같았다.
‘물고기’를 말할 때 멜의 표정이 조금 안 좋아졌지만, 그는 이내 다시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인간은 먹는 게 중요하다며. 잘 챙겨 먹어야지.”
그나저나 멜이 내가 무엇을 먹었는지도 기억해 줄 줄은 몰랐다.
걱정해 주는 멜의 모습이 기쁘면서도, 조금 불편했다.
그가 나의 진실을 알수록 해야 하는 거짓말이 늘어나기 때문이었다.
“……괜찮아. 나는 원래 갈아서 만든 음식을 좋아해서 그런 것뿐이야.”
“그리고…….”
멜은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한참 동안 머뭇거리더니 어렵게 그 말을 꺼냈다.
“가능한 한 오래 살아. 세르베인은 아직 어리잖아.”
나와 비슷한 또래처럼 보이는 그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멜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싱긋 웃고는 말을 돌렸다.
“우리 그런 거 말고 조금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자.”
“…….”
내가 대놓고 회피한 탓인지, 멜은 그날 더 이상 그 주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 * *
간밤에 눈이 내렸다.
나는 옷을 두껍게 차려입고, 걱정이 돼서 서둘러 호숫가로 달려갔다.
“아, 세르베인! 왔어?”
다행히 멜은 추워하는 기색 없이 환히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그런데 멜은 내가 오기 전부터 호수 가장자리에 나와 뭔가를 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무엇이 그를 호수 밖에 나오게 했는지 의아해서 다가가 물었다.
“……뭐 보고 있었어?”
“꽃이 폈어! 그래서 보고 있었어.”
멜은 고조된 감정을 숨기지 않고 외쳤다.
붉게 물든 뺨이 천진했고 사랑스러웠다.
그나저나 눈이 내렸는데 꽃이 폈을 리가.
겨울에도 피는 꽃이 있긴 하지만 그런 종류는 대부분 뼈대가 굵은 나뭇가지에서 자라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멜이 발견한 종류는 매우 작은지 그 애는 코끝이 눈 속에 닿을 것처럼 바닥에 가까이 가져다 대고 있었다.
게다가 시선을 두고 있는 그곳은 눈밭이었다.
“멜, 이런 날씨에 그런 곳에 꽃이 필 리가-.”
“아냐! 진짜 꽃 맞아.”
“……있네.”
눈 속에는 정말로 작은 꽃이 피어 있었다.
아주 작고, 하얀 꽃잎 다섯 장을 가진 꽃이었다.
멜은 그 꽃을 애지중지하며, 혹시나 바람에 날아갈까 걱정이라도 된 건지 두 손으로 주변을 막아 꽃을 지켜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바다에 살던 멜에게는 꽃이 신기할 텐데 눈 속에서 핀 꽃이니 더욱 특별해 보인 게 분명했다.
“눈 속에서 꽃이 피다니 너무 신기해! 세르베인, 예전에 이런 꽃을 본 적 있어?”
“이름은 모르겠는데…… 본 적 있는 꽃이야.”
나는 멜이 그 꽃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최대한 기억을 되살려 답했다.
멜이 저렇게 좋아하니 특별한 꽃이었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기억하는 바에 의하면 이건 그냥 흔한 작은 꽃이었다.
“옛날에, 어렸을 때 봄철에 호수에 왔었는데 그때 봤었어.”
꽃의 이름이나, 꽃말, 그런 것들을 알려 주었다면 좋았겠지만 나는 사실 꽃에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알려 줄 수 있는 게 한정적이었다.
“어제 날씨가 조금 따뜻했잖아. 봄인 줄 착각하고 피었나 봐.”
나는 답하고 나서야 너무 메마른 답변이었나, 하고 잠시 후회했다.
멜이 이렇게 좋아하는데 그냥 특별한 꽃인 것 같다고 맞장구칠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흔한 꽃임을 알게 된 멜은 곧 그 꽃에 관심을 끌 것이고, 속으로는 아쉬워할 게 분명하니까.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걸 수도 있어. 꺾어서 하녀에게 한번 물어볼-.”
“아니! 아니야. 그러지 마.”
멜이 다급히 나를 막았다.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도 멜은 아직 그 꽃이 좋은 모양이었다.
멜은 그 꽃과 나를 번갈아 보다가 어렵게 입을 떼었다.
“세르베인. 있잖아, 이 꽃이 계절을 착각해서 피었다고 해도 너무 대단하지 않아?”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나는 잠자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러자 멜은 반짝이는 눈을 하고 더욱 힘을 얻어 말을 이었다.
“이렇게 추운데도, 눈 속인데도 꽃을 피웠잖아. 나는 이 꽃이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이런 꽃들은 보통 한해살이가 아닌가?
……아니다. 누가 가꾸지 않았는데도 내가 기억하던 그 시절과 오늘날에도 피어 있는 걸 보면 여러해살이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잘 말하던 멜이 급격히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도록도록 흔들리는 멜의 눈을 가만히 바라봤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오래 보고 싶어서 피한 적 없었던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
“그러니까, 너도 살았으면 좋겠어.”
너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구나.
* * *
“세르베인은 왜 벌써 죽으려는 거야?”
한번 말문을 열자 멜은 서슴없이 그 주제에 대해 물어 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첫 문장부터 조금 어긋나 있었다.
……예상대로 멜은 내가 스스로 죽으려고 결심한 줄 알고 있었다.
“인간의 수명은 100년도 안 되지만, 그래도 세르베인은 그것에 훨씬 못 미치게 살았잖아. 더 사는 게 어때?”
100년‘도’ 안 된다는 그 말은, 인어는 훨씬 오래 산다는 뜻인 것 같았다.
너는 역시 나와의 시간 정도는 가뿐히 잊을 만큼 오래오래 살겠지. 하지만 그래도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나를 불쌍한 사람이라고, 슬프게 기억하지 않길 바랐다.
멜에게 더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진실을 말해 멜을 슬프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거짓말했다.
“……그럴까?”
어차피 멜은 평생 그 말의 진위 따위 알지 못할 테니까.
“어……?”
“멜이 원하니까 조금 더 살아보도록 할게. 네가 없어도 조금 더 살아볼게.”
내 말에 멜이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활짝 웃었다.
꽃을 보고 기뻐했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밝고 아름답게 웃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너의 바람 같은 웃음소리는 마치 내가 바다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느끼게 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내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평생, 이 순간을 잊지 못할 것 같았다.
내가 살겠다고 말하는 게 너를 기쁘게 한다는 것이 행복했다.
그건 네가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증거일 테니까.
네 분홍빛으로 생기가 도는 뺨이 사랑스러웠다.
“정말? 100살까지 살 거야?”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건 우리나라에서 가장 건강한 사람에게도 어려운 목표 아닐까.
하지만 기대에 가득 찬 멜의 눈동자를 보니, 이왕 거짓말한 거 저것도 못 해줄까 싶어 그냥 대답해 버리고 말았다.
“응.”
“그럼 나 만나러 가끔 바다로도 올 거야?”
하지만 멜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의 이상에서 늘 그 이상의 것을 바랐다.
만약 여기서 그러겠노라 답하면 멜은 정말로 영원히 기다릴 것 같았다.
그래서 차마 이번에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그……건 힘들지 않을까?”
“왜?”
순진무구한 푸른 눈동자와 마주쳤다.
멜에게는 꽤 타당한 의문일 터였다.
100살까지도 살 수 있는 건강한 인간이 바닷가에 못 올 이유가 무엇인가.
배를 타고 저 깊은 바다 한복판까지도 갈 수 있을 테다.
적절한 변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순간, 저번에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나는 죽으면 여기에, 이 저택에 있어. 그러니까 굳이 만나러 오지 않아도 돼. 어차피 만날 수도 없을 거야. 이곳은 육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