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 화 (20/132)

20 화

“선물 받지 않아도 돼. 네가 살아 주기만 하면 돼. 그게 가장 큰 선물이야.”

“다음에 만나면 돌려 달라는 뜻에서 주는 거야. 그러니까 거절하지 마. 나 다시는 안 볼 생각이야?”

이렇게 말하면 라헨은 절대로 거절하지 못하겠지.

계산된 말을 건넸다. 거기에 더해 일부러 서운한 기색까지 비추자 라헨은 예상대로 어쩔 수 없이 목걸이를 받아 들었다.

“……그렇다면, 꼭 돌려줄게. 조금만 기다려.”

‘아마 불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그래서 그냥 웃으면서 고개만 끄덕였다.

라헨은 대문을 나서기까지 몇 번이나 나를 뒤돌아보았다.

하지만 발걸음을 옮겼다가 다시 돌아와 안부 인사를 건넸고, 다시 몇 걸음을 옮겼다가 돌아와 당부의 말을 하길 반복했다.

더는 미룰 수 없는 시각이 되자 라헨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다음에 보자, 세르베인. 건강하게 있어야 해.”

“응. 오빠도 건강하게 지내야 해.”

나는 저택 입구에서 라헨을 배웅했다.

그 뒷모습이 멀어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곳에 서 있었다.

라헨이 뒤돌아보면 손을 흔들어 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아주 멀리 가버려서, 뒷모습이 보이지도 않을 때가 되었을 때에야 진정으로 작별을 고할 수 있었다.

“……잘 지내. 이제는 여길 떠나서 행복하게 살아.”

예상대로 내가 살아서 그를 다시 보는 일은 없었다.

* * *

라헨을 보낸 후, 나는 외출 준비를 했다.

그 모습에 하녀들은 늘 그랬듯 기겁을 하며 나를 말렸다.

“아가씨. 나가시면 안 돼요. 분명 건강에-.”

“……글쎄. 오늘처럼 괜찮은 날이 또 올 것 같진 않아서.”

“아가씨……?”

“이제 얼마 안 남았잖아.”

내 말에 하녀들의 표정이 흔들렸다.

이제는 그들도 알고 있었다. 내가 기적처럼 나았다고 생각한 것이 곧 죽을 사람의 마지막 생기였다는 것을.

그들이 차마 더 내 행동을 말리지 못할 때 문이 열렸다.

아버지였다.

달칵.

“고, 공작님.”

하녀들이 헐레벌떡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안절부절못했다.

내가 외출하도록 놔뒀다고 추궁을 들을까 염려하는 모양새였다.

사용인들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내게 다가온 아버지는 외출과 관련 없는, 의외의 것을 물었다.

“왜 라헨을 따라가지 않은 거지? 너라면 공작가에 미련이 없으니 주저하지 않고 떠날 것이라 생각했는데.”

역시나 지켜보고 있던 모양이다.

속으로 피식 웃어 버렸다. 내가 가려고 했다면 분명 붙잡았겠지.

나는 담담히 아버지와 눈을 맞추고는 말했다.

“네. 그러려고 했어요.”

“…….”

“제 인어가 없었다면요.”

문득 나는 내가 잠들 때만을 기다렸다가, 내 얼굴을 몇 시간이나 그저 바라보기만 하고 나가 버리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벼락같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작별 인사를 하자. 지금 그래야만 한다는 감각이 들었다.

제가 죽을 때를 아는 동물들과 같은 감각이었다.

예전에는 아버지를 미워했지만, 지금은 나도 그와 다를 게 없는 인간임을 알기에 체념했다.

하지만 애착도 없었다. 그렇지만 감사 인사 정도는 하기로 했다.

“……이때까지 감사했어요.”

“무엇에 대해서 말이지? 인어를 줘서 그러는 건가?”

아버지는 살짝 비꼬듯이 말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그리고 인어를 지켜 준 것이요.”

그는 처음에는 멜을 해치려 했지만 이후에는 나의 부탁대로 멜을 지켜 주려 했다.

멜을 다시 호수로 보낸 뒤, 내가 몸이 아파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할 때에도 멜이 무사했던 건 아버지의 입김 덕분이리라.

“……그래.”

아버지는 허탈한 표정을 짓더니 이어 말했다.

“너는 부정할지 몰라도, 너는 나와 정말 많이 닮았구나.”

부정할 리가. 나는 누가 봐도 당신을 닮았다.

나의 산호색 머리칼과 노란색 눈동자는 아버지와 똑같았다. 이목구비조차도.

내 외모는 분할 정도로 어머니와 닮은 점이 없었다. 그리고…… 외형적인 면을 제외한 성격 역시 많이 닮았다.

“부정 안 해요.”

“그렇다니 기쁘구나.”

“그 사실이 껄끄럽지만요.”

아버지는 보기 드물게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죽을 때가 되니 내숭을 부리지 않고 막 대답하는 후계의 모습에 머리가 아파서일지도 몰랐다.

“받거라.”

문득 아버지는 품속에서 작은 병을 꺼내 내게 건넸다.

병 속에는 푸른색 액체가 찰랑이고 있었다.

종류는 모르겠지만 극소량임을 봤을 때 나는 그것의 정체를 추측할 수 있었다. 독이었다.

“혹시 만약의 사태가 생긴다면 그걸 마시거라. 그게 더 나을 테니까.”

하녀들은 아버지가 내게 건넨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가문이 곧 몰락할 위기라는 것을 알면 그들이 도망칠 것을 알기에 일부러 그것이 무엇인지 직접 말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었던 건가.

하긴, 라헨이 내게 다짜고짜 도망치자고 할 정도라면 그정도로 위험한 것이리라.

나는 내 손가락 두 마디 정도밖에 안 되는 크기의 약병을 꽉 쥐었다.

“감사합니다.”

“……나도-.”

아버지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나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지는 않겠다. 너무 늦어 버렸을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그걸 마시는 일이 없게 노력하마.”

잘못 들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네?”

칼에 찔리고, 온갖 추한 짓을 당하다 죽는 것은 공작가의 명예를 훼손시킬 테니 얌전히 때가 되면 독을 먹고 죽으라는 뜻인 줄 알았다.

독을 주면서도, 그걸 마시는 일이 없길 바란다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분명 나를 놓아줄 리 없다고 생각했던 아버지였기에 그 말이 더욱 믿기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씁쓸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살아온 방식은 잘못되었을지도 모르지. 그러니 지금이라도 고치려고 해.”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넌 너의 어머니처럼 내게 묶여 죽지 말라는 뜻이다.”

“…….”

“네가 라헨을 따라간다고 해도, 그냥 놓아줄 생각이었다. ……어쩌면 따라가기를 바랐을지도 모르지. 그게 훨씬 안전할 테니까.”

과거의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는 늘 나를 잘 부탁한다고 말했던 어머니의 영혼이 내 뒤에 서 있는 것처럼 나를 바라봤다.

내 앞에 서 있지만 내 앞에 서 있지 않았다.

언제나 내 뒤의 어머니 앞에 서 있었고, 내 뒤의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밖에 있지는 말거라.”

그는 간접적으로 내 외출을 허용하는 말을 하고는 방에서 나갔다.

나가기 전 가볍게 나의 머리를 쓰다듬고 나갔다.

나는 비현실적인 기분으로 머리를 정리하며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제야 나를 바라보는 이유가 뭐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사실 답을 알고 있었다. 나는 이미 겪어서 알고 있었다.

내가 인어를 보내 주기로 결심했을 때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죽을 때가 되면 사람은 변한다.

나는 그때 그 모습이 마지막이 될 것을 암시하는 단서와 마주했던 것이다.

다음 날 아버지는 내게 기사들을 붙여 주고 공작가를 비웠다.

* * *

아무리 인간관계가 협소한 나지만 아직 작별 인사를 해야 할 사람이 남아 있었다.

멜, 라헨, 아버지, 그리고…… 블미에였다.

“이젠 찾아오지 않아도 돼.”

“다른 주치의를 알아보신 겁니까?”

“아니.”

약을 조제하던 손이 뚝 멈추었다.

블미에는 의아한 얼굴을 하고서 내게 물었다.

“의도하시는 바를 모르겠습니다.”

“나 알고 있어. 한 달 동안 사는 것도 기적이라며.”

블미에의 얼굴이 딱딱히 굳었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없이 잠깐 미소만 짓고 말았다.

나는 덤덤한 척 말을 이었다. 그동안은 아프지 않은 척 연기하느라 하지 못했던 요구였다.

“진통제만 처방해 줘. 한 달 치 분량으로.”

“저는 그런 진단을 내린 적이 없습니다.”

블미에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집을 부렸다.

이전이라면 그저 목석 같다고 넘겼을 얼굴에서 걱정을 읽을 수 있었다.

어쩌면 나는 인복이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만날 인연은 모르겠지만, 지금껏 만난 인연은 나쁘지 않았다.

나는 블미에에게 좋은 환자가 아니었다. 성격이 순종적이지도 않았고, 사는 것에 미련도 없기에 진료에 협조적이지도 않았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지금껏 나를 치료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까지 고마웠어. 그런데 사실, 네가 나를 위해 이렇게나 해주는 이유를 모르겠어.”

“의사가 사람을 살리는 데에 이유가 필요합니까.”

“……넌 네 신념대로 사는 사람이었지.”

나는 작게 웃어 버렸다. 문득 그녀에게는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례일 걸 알지만 돈 때문에 의사를 하게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어.”

“금전적 사례는 지금 받고 있는 진료비로 충분합니다.”

“거절하지 마.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 그래. ……이것도 너무 늦으면 불가능할 수도 있어.”

만약 반란이 일어나고, 그 세력이 녹시렐 공작가까지 노린다면 나는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진다.

하지만 이런 사정을 모르는 블미에는 내가 얼마 살지 못하기 때문인 줄 알았는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정말 보답을 하고 싶으시다면 조금 더 살려고 노력을 하세요.”

“…….”

“진통제는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진료도 그만두진 않을 겁니다.”

결국 블미에는 내가 제시하는 어떤 물질적 대가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그게 못내 답답했다. 드디어 내가 줄 수 있는 걸 필요로 하는 인연이 생겼는데, 당사자는 받으려 하지를 않았다.

“그러면 또 사흘 후에 뵙죠.”

블미에는 꿋꿋이 진료를 계속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하고 나갈 채비를 했다.

나는 떠나려는 그녀의 옷자락을 잡고 마지막으로 뭔가를 제의했다.

“……그렇다면, 네가 그랬듯 다음에는 내가 너를 구하도록 할게.”

말하면서도 조금…… 우스웠다.

결국 내가 베풀 수 있는 건 이번에도 불가능한 약속뿐이었다.

내 한 몸 건사하기 힘든 시한부가 누군가를 구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블미에도 그렇게 생각할 게 분명했다. 이번에도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대가 타령입니까.”

또 거절당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할 때, 이어 들려오는 목소리는 잔잔한 웃음기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괜찮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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