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 화 (19/132)

19 화

삼촌이 다급하게 말했다. 숨이 가쁠까 염려될 정도였다.

“세르베인. 혹시 아버지가 공작가의 명예를 위해 네게 그렇게 말하라고 시켰니? 그딴 건 생각하지 않아도 돼. 너는 그냥 네 또래 아이들이 하는 대로 계속 살아갈 날들만 생각만 하면 되는 거야. 그러니까-.”

“살아갈 날이라니.”

나는 찻잔을 바라보며 웃었다.

찻물이 흔들리며 수면에 비친 내 얼굴이 일그러진 것처럼 보였다.

“한 달을 말하는 거야?”

“세르베인!”

처음으로 삼촌이 소리를 질렀다.

고개를 드니 언성을 높인 주제에 울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내게는 살면서 세 번째로 보는 모습이었다.

문득 예전 일이 떠올랐다. 처음 삼촌을 봤던 날이었다.

* * *

여섯 살 때쯤이었을까.

정원의 꽃들이 예쁘게 피었다고 해서 산책을 나간 날이었다.

그때도 나는 몸이 약했기에 자주 산책을 하지는 못했다.

오랜만에 하녀들의 안내를 받아 천천히 정원을 거닐 때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흑, 흐윽…….”

그냥 크게 우는 소리였다면 거슬린다고 인상을 찡그렸을 텐데. 상대는 불쌍하게도 숨죽여 울고 있었다.

나는 그 울음소리를 듣고 하녀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아무래도 어느 신입이 울고 있는 모양이에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경 쓸 필요 없다고 말한 것과 달리 하녀들은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산책 진로를 바꾸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무언가를 숨긴다고 생각해 고집을 부렸다.

“난 수선화를 보러 갈 거야.”

“아가씨. 다른 예쁜 꽃들도 많답니다. 그곳으로 가셔요.”

“…….”

“아가씨…….”

그 말을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내가 수선화 꽃밭에 도달했을 때, 나는 노란 수선화 틈에서 수선화와 비슷한 금발을 발견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소년은 노란 꽃들 틈에 숨으려는 의도인지 꽃밭 속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소년이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소년의 녹황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어? 아…….”

부스럭.

소년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서둘러 꽃밭 구석에서 당황하며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다리에 쥐가 난 탓인지 서둘러 일어나다가 주저앉고 말았다.

풀썩!

나는 산책로를 벗어나 꽃밭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수선화가 짓밟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박사박.

가까이 다가가 살펴본 소년은 노란 수선화 속에 파묻혀 있었다.

울고 있던 눈매가 여전히 붉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누구야?”

옷차림이 사용인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묘하게 그 녹황색 눈동자가 아버지의 노란 눈과 닮아 보였다.

그래서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나한테 오빠가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아, 아가씨. 그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소년 대신 그가 누구인지 설명해 준 것은 하녀들이었다.

그들은 꺼림칙하다는 듯 말을 흘렸다.

“그분은…… 굳이 따지자면…… 아가씨의 삼촌이 되는 분이세요.”

그게 나와 라헨의 첫 만남이었다.

* * *

사실 라헨의 정체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이 집 안에 내 또래가 있다는 것이 퍽 기뻤다.

어머니에게만 집착하는 미친 아버지와, 아버지 때문에 나와 오래 있어 주지 못하는 어머니.

그 정상적이지 않은 가정에서 라헨은 유일한 빛이었다.

“라헨 오빠. 책 읽어 줘.”

“그래, 세르베인. 원하는 책 있니?”

“아무거나 괜찮아.”

그날 이후, 나는 라헨을 오빠라고 부르며 따랐다.

왜냐하면 삼촌이라고 부르기에 그는 너무 나의 또래였다.

“라헨 님, 이러시면…… 아닙니다.”

하인들은 아버지가 이 모습을 볼까 봐 혼비백산했고, 라헨을 원망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다.

라헨은 사용인들의 눈치를 보면서도 나와 함께 있고 싶어했다.

그의 녹황색 눈동자는 타인을 볼 때면 불안하게 흔들렸지만, 나를 볼 때면 다정하게 웃어 주고 있었다.

* * *

라헨이 우는 모습을 두 번째로 본 날은 몇 년 전, 그가 저택을 떠나기 전날이었다.

성인이 된 후, 라헨은 갑자기 낯설게 굴기 시작했다.

“라헨 오빠.”

“세르베인, 오빠라고 부르지 말렴.”

“갑자기 왜?”

“나는 네 삼촌이잖니. 그 호칭이 싫다면 그냥 라헨이라고 불러도 된단다. 넌 공작가의 후계자니까.”

스무 살이 된 라헨은 창백하고 생기 없는 얼굴로 영혼 없이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자기 삼촌이란 호칭을 고집했다.

그 갑작스러운 변화의 이유를 물을 틈도 없이 그는 아버지께 말했다.

“공작님, 저는 저택을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밖에서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사는 삶이 더 좋아요.”

“…….”

“그러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제야 나는 라헨이 줄곧 공작가의 주인 자리를 탐내는 것이 아니냐는 시선에 고통받아 왔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이제 그 원인을 없애 버리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그 말을 한 직후, 라헨은 내게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잠들지 않았다.

계속 숨어 있던 라헨이 해가 뜨자마자 공작가를 떠날 것 같았기 때문에 잠들 수가 없었다.

똑똑.

“라헨 오빠?”

사용인들 몰래 밤에 라헨의 방문을 열어 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짐가방만 덩그러니 방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혹시.’

나는 처음 라헨을 봤던 수선화 정원을 떠올렸다. 그래서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역시나 정원 구석의 노란 수선화들 틈 속에 웅크려 울고 있는 금발의 남자를 찾을 수 있었다.

사박사박.

“……세르베인?”

발소리에 고개를 들고 사방을 살피던 라헨은 나를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눈물로 점철된 얼굴이 보였다.

이렇게나 울 거면서 왜 그런 결심을 한 걸까.

사실은 떠나고 싶지 않았으면서 떠나겠다고 말하는 방법밖에 없었던 걸까.

그 순간 나는 라헨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하지만 하지 못했다.

그가 떠나게 된 까닭엔 결국 내 탓이 있는 것이니까.

내가 그를 무시하고 하찮게 여겼다면 라헨은 공작가를 떠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공작가의 모두가 나 대신 그를 견제한답시고 냉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때의 나는, 그의 마음이 편해지는 대로 말했었다.

“라헨 삼촌.”

“아……?”

“울지 마. 밖에서도 잘 지내야 해.”

실은 그때 그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도 떠난 공작가에, 혼자 남은 나를 두고 가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그것이 오빠도 원하는 것 아니었냐고, 그렇게 몰아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 * *

“……옛날부터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어.”

마치 그때와 같다.

라헨의 얼굴에는 서러움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턱 아래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충동적으로 입이 움직였다.

“참다, 참다, 참다 보면 무엇까지 참아야 하는데? 도망치다, 도망치다, 도망치다 보면…… 어디로 가게 되는 건데.”

“……아?”

“바라는 대로 살도록 해. 참기 싫을 때 참지 마. 머물고 싶은 곳에 원하는 대로 머물며 살아.”

어쩌다 보니 이른 유언을 남긴 기분이었다.

“……그냥 마지막으로 이 말을 해주고 싶었어.”

이제는 오열하기 시작하는 라헨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손을 뻗어 그 얼굴의 눈물을 닦아 주며 말했다.

“그만 울어.”

“흑…….”

“동생 유언 정도는 울지 말고 잘 들어 줘야지, 라헨 오빠.”

그 말을 듣자 라헨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 녹황색 눈동자가 덜덜 떨렸다. 이내 그는 무너지듯 울며 내게 매달려 왔다.

“흐윽……! 세르베인…… 죽지 마……. 제발 죽지 마……. 왜 네가 벌써 떠나야 해.”

“…….”

“제발 나를 두고 떠나지 마…….”

계속해서 울음을 터뜨리는 얼굴을 보니 이상한 감정이 북받쳤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내 손을 붙잡은 모습을 보니 더욱 그랬다.

나는 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분명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 목숨이 빨리 끝나길 바랐던 것 같은데.

애정이란 것은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 * *

라헨 오빠는 떠났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말하며 떠났다.

무엇을 위한 방법인지는 분명했다.

나를 살리는 것과 녹시렐 공작가를 살리는 것이겠지.

내가 보기에는 그 어떤 것도 불가능해 보이는데도 그런 희망을 안고 떠났다.

“이걸 가져가.”

나는 떠나려는 라헨을 붙잡고 내 목에 걸린 목걸이를 건네주었다.

그것을 확인한 라헨이 얼굴을 창백하게 물들였다. 내가 목걸이를 준 게 무슨 뜻인지 유추한 모양이었다.

그는 드물게도 화가 난 목소리로 날 불렀다.

“세르베인!”

“아버지께는 비밀이야.”

“안 돼, 세르베인. 이걸 내가 가질 순 없어.”

라헨은 내가 건넨 공작가 가주의 증표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 목걸이는 본래 공작인 아버지가 가지고 있어야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삶에 의욕 따위 사라진 아버지가 내게 줘버린 것이었다.

“말했잖아, 난 공작가를 지킬 거야. 그리고, 네가 공작이 되어 오래오래 사는 모습도 볼 거야. 그러니까 이건 네가 가지고 있어.”

단 한 번도 이 집안을 좋아한 적 없는 주제에 라헨은 가문을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을 버리고 냉대한 가문을 지킬 것이라고. 바보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속내를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나는 라헨에게 내 본래 성정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나는 마치 온실 속에서 애정만 받고 자란 착한 귀족 영애처럼 순수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으며 말했다.

“내 선물인데 안 받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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