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 화 (18/132)

18 화

“……어?”

멜은 멍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도 인지조차 못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아팠지만 미소 짓는 얼굴로 말했다.

“너를 바다로 보내 줄게.”

“…….”

멜은 한동안 혼이 빠진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그가 내 말을 전부 이해하기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분명 이해하고 난 후에는 무척 기뻐하겠지.

그런데 멜은 예상과 달리 담담한 반응을 보였다. 언뜻 보기에는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세르베인. 왜 나를 보내기로 결심한 거야?”

멜이 굳은 표정으로 계속해서 말했다.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

잠시 숨 쉬는 법을 잊었다.

그건 내가 그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던 말이었다.

나는 편지에 몇 번이고 같은 말을 적었다. 혹시나 그가 전에 보냈던 편지는 읽지 않았을까 봐 그랬었다.

너를 사랑해서 그랬어. 네가 아파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내가 너무 나쁜 사람이라 너를 바다로 보내 줄 용기는 없어서 호수로 보냈던 거야……. 내가 미안해.

멜은 내게 편지를 읽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읽었던 것이다.

그게 기쁘면서도 동시에 숨통을 억죄듯 고통스러웠다.

“응. 지금도 사랑해.”

우는 듯, 웃었다. 멜은 내 얼굴을 넋을 잃은 듯 바라봤다.

생각해 보니 기사들에게 붙잡혀 울고 있던 그의 입에 입 맞췄을 때, 나는 이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는 말로 꺼내 본 적이 없던 고백이었다.

“아, 아무튼…….”

그 대답에 멜은 잠시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다시 표정을 굳히고 물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나를 보낼 생각을 한 거야?”

그 말에 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진심인 건 맞았다. 하지만 나는 불완전한 이유만을 말해 줄 수 있었다.

“너를 사랑해서. 이곳에서는 네가 행복해지지 못할 테니까 보내 주려는 거야.”

“정말로? 다른 이유가 아니라?”

멜은 의문을 품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서 나는 이상한 기색을 읽어 냈다.

멜의 눈빛이 불안함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멜이 입을 열었다.

“네가 처음 내게 보냈던 하녀는 네가 죽으면 그때 내가 여기서 나갈 수 있다고 말했어.”

“뭐?”

“세르베인. 혹시…… 곧 죽는 거야?”

실컷 연기해 왔던 모든 것들이 수포로 돌아갔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머릿속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한동안 눈이 마주친 멜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뒤늦게 그런 거 다 헛소리라고 연기를 할 정신을 되찾았지만 늦어 버렸다.

표정만 봐도 멜은 내가 곧 죽는다는 걸 알아 버렸다. 머릿속이 싸늘해졌다.

나는 곧 죽을 사람일지언정, 초라해 보이고 싶지는 않아서 덤덤한 척했다.

조금도 죽음에 초연하지 않으면서 별것 아닌 척 허세를 부렸다.

“응. 그래서 그래.”

내게 확답을 들은 멜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내 내 모습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하더니 물었다.

“……왜?”

조금 당황스럽지만, 멜은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며 물었다.

“왜 벌써 죽으려는 거야?”

“뭐?”

“인간의 수명은 적어도 80세 정도는 된다고 들었어. 도대체 왜…….”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멜은 내가 자살이라도 결심한 것으로 오해하는 모양이었다.

딱 봐도 병자의 모습일 텐데 멜은 내가 아파서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못했다.

아마 추측건대 인어들은 병에 걸리지 않는 모양이다.

“멜. 인간은-.”

멜의 반짝이고 순수한 푸른 눈동자를 보니 중간에 입이 다물렸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굳이 말해야 할까?

내가 아프다고, 그런 구질구질하고 약한 사정을 말해야 할까?

어차피 좋은 기회지 않은가. 멜은 사람이 병에 걸려 추하게 죽는단 걸 모른다.

그런 사정 따위 말해 봤자 곧 바다로 돌아갈 멜에게는 찝찝한 기분으로만 남을 것이다.

내가 말을 끝맺지 않자 멜은 나를 의아한 얼굴로 바라봤다.

“세르베인?”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를 보고 멜이 체념한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미안. 내가 무슨 권리로 네 선택을 말리겠어.”

“아니야, 네가 사과할 이유는 없어.”

사과를 해야 하는 건, 나쁜 사람은 나뿐이다.

하지만 이내 들려온 멜의 목소리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있잖아…….”

멜은 손가락을 꾸물대며 말했다.

“인어는 죽으면 바닷물이 된대. 그래서 인어는 죽어도 바다에서 만날 수 있어.”

“…….”

“나는 네가 죽으면 어디서 만날 수 있어……?”

어떻게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다정한 말 때문에 순간 감정이 울컥했다.

“나를 호수에 가뒀던 건 야속하지만, 그래도 종종 만나러 갈게.”

그 말대로, 나는 너를 가둔 사람인데 무엇 때문에 나를 만나러 오겠다고 말하는 건지.

바보 같은 인어는 자신이 미워할 상대가 나라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인어랑 다르게 인간은 죽으면 끝이야. 죽으면 다시 만날 일 따윈 없어.’

나는 매정하게 말해서 인어가 내게 가진 미약한 동정심까지도 전부 쳐내야 했다.

그게 멜을 위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란 인간은 또 이기적인 선택을 했다.

“……나는 죽으면 여기에, 이 저택에 있어. 그러니까 굳이 만나러 오지 않아도 돼. 어차피 만날 수도 없을 거야. 이곳은 육지니까.”

나는 멜의 손을 살짝 잡아 내 쪽으로 이끌었다. 그러자 멜이 힘을 풀고 내게 손을 맡겼다.

멜의 가늘고 아름다운 손목에 삼촌에게서 받은 팔찌를 채웠다.

작은 크기의 알록달록한 돌과 소라 껍데기로 이루어진 팔찌였다.

죄인의 손에 채우는 수갑처럼, 이 팔찌가 멜을 내게 영원히 묶어 두는 도구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끝이 다가와도 욕심은 추악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속내를 감추고 말했다.

“선물이야.”

멜은 가만히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팔찌를 바라봤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멜의 하얀 손목에 채워진 팔찌가 달그락거렸다.

원래라면 그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주려고 했던 선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별 선물이 되어 버렸다.

어차피 바다로 돌아가면 멜은 이딴 조개나 소라 같은 건 얼마든지 볼 수 있을 텐데.

이럴 줄 알았다면 바다와 관련이 없더라도 값진 선물을 줄 걸 그랬다.

후회가 밀려올 때 문득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갑작스러운 것 같아.”

팔찌를 보던 멜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늘 나한테 그랬어. 갑자기 나를 수조에 가뒀다가 호수에 넣어 버렸고, 갑자기 나를 구해 주고는 내게 사랑한다고 했어. 또 갑자기 얼굴을 보여 주지 않다가 편지를 보냈지. 그리고 이젠 갑자기 나를 보내 주겠다고 하네…….”

그 말을 들으니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다시 그 순간이 와도 너를 가둘 것이다.

그리고 삶의 의욕이 없어 보이는 너를 호수에 가둬 버리겠지.

네게 미안할지언정 후회하지는 않는다.

스륵.

멜이 갑자기 내 손을 잡아 왔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기에 눈을 크게 뜨고 멜을 바라봤다.

그 애는 처연한 얼굴에 약간의 미소를 올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번만큼은 안 그랬으면 좋겠어.”

“무슨 말이야?”

“……한 달. 한 달만 더 너랑 있을래.”

멜은 눈을 휘며 살짝 내게 웃어 보였다.

그 짧은 미소가 나를 바보로 만들었다. 생각하는 방법을, 숨을 쉬고 눈을 깜박이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그러면 나도…… 괜찮아질 것 같아.”

멜의 얼굴은 이상하게도 슬퍼 보였다.

* * *

그날 이후, 한 달이란 시간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한 달 동안 살아남는 것이 기적이라고 했지만, 멜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는 살아 있어야 했다.

“세르베인. 잘 잤니?”

“응, 삼촌.”

다음 날 아침, 수척한 얼굴을 한 삼촌이 나를 찾아왔다.

삼촌은 까칠해진 얼굴을 하고서도 바보처럼 웃는 가면을 쓴 채 나를 만나러 왔다.

“오랜만에 같이 식사하지 않을래?”

애써 입꼬리를 올리는 얼굴을 통해서 나는 그게 진짜 목적이 아니란 걸 알았다.

* * *

“같이 떠나자.”

“…….”

“공작가는 위험해. 나와 같이 떠나자.”

묽은 수프가 전부인 식사였지만, 내가 식사를 끝내자 삼촌이 말했다.

분명 내가 체하지 않게 배려한 행동일 터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버지는 나를 보내 주지 않을 텐데.

“어차피 빠르게 끝날 목숨, 공작가의 후계로 명예롭게 죽는 게 그 애에게도 나은 선택이다.”

어머니조차 피 말려 죽인 사람이 나를 보내 줄 리 없다.

하지만 사실 아버지가 나를 보내 준다고 해도 나는 떠날 생각이 없다.

“유명하다는 의사는 다 불렀고, 쓸 수 있는 방도는 다 써보았다. 그런데도 변하는 건 없었어. 그 애에게는 이번 달을 넘기는 것도 기적이다.”

어젯밤 아버지가 말한 그대로였다.

방금 먹은 죽조차 위에서 스멀대며 금방이라도 식도를 타고 역류해 올라올 것 같았다.

숟가락을 드는 근육조차 갑자기 굳어서 놓칠 뻔하기도 했다.

내게는 이번 달을 넘기는 것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내게 남은 시간이 한 달이라면 나는 그 시간을 멜과 보내야 한다는 점이다.

“난 가지 않아, 삼촌.”

“……아. 내가 갑자기 말해서 네가 상황을 몰랐을 걸 염려하지 못했네. 미안해. 세르베인, 내가 설명을-.”

“다 알고 있어. 어제 우연히 대화를 들었거든. 우리 가문이 왕가와 함께 무너질지도 모른다며. ……누군가가 반란이라도 꾀하는 모양이지.”

삼촌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따뜻해 보이는 황록색 눈이 충격으로 물든 것을 보고도 말을 이었다.

“알고도 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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