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화
이후엔 또 어떤 사실을 알게 될까.
귀를 막고 몸을 돌렸다. 더는 대화를 듣고 싶지 않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가볍던 다리가 무거워져 떨어질 것 같았다.
거세게 뛰는 심장이 숨을 가쁘게 했다.
“허억, 헉!”
터벅…… 터벅…….
비틀거리면서도 걸음을 옮겼다.
내 목숨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면 해야 하는 일은 명확했다.
그건 내가 멜을 억지로 호수에 처박으면서까지 억지로 내 손에 쥐었던 모든 이유가 사라지는 사건이었다.
슬프고, 화가 나지만, 내가 죽는다고 그 애의 삶을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수는 없다.
어차피 내가 죽으면…… 그를 바다로 보내 주겠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으니까 놀라운 일도 아니다.
괜찮다. ……괜찮아야 한다.
조금 빠르게 다가온 이별일 뿐이다.
‘멜에게 인사를 하자. 잘 지내라고 하자.’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도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하며 걸었다.
욕심을 버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버리기로 다짐했다.
‘바다로, 바다로 보내 주겠다고 말하자.’
대문을 나섰다.
작별을 고할 시간이었다.
* * *
“망해 버릴 공작가의 명예가 그렇게 중하면 혼자 짊어지고 죽도록 하세요.”
“…….”
“세르베인은 내가 데려갈 테니까.”
* * *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멜은 하루라도 빨리 바다로 돌아가길 원했으니까. 그를 위해서라면 내가 빨리 죽게 된 게 다행이었다.
저택을 나와 호수로 향했다.
얼마나 오랜만에 하는 외출인지 날짜 감각조차 없었다.
그냥, 이제 와 확신하건대 내가 멜을 봤던 날들보다 보지 못했던 날들이 길 것이다.
그게 못내 아쉬웠다.
저벅저벅.
오랜만에 삼촌이 방문했기 때문일까. 혹은 수도를 감쌌다던 반란의 기운 때문일까.
호수 주변을 지켜야 할 기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내겐 다행이었다.
찰랑찰랑.
멀리서 일렁이는 호수의 표면이 보였다. 잔잔한 물소리도 들렸다.
잠자던 멜이 발소리를 듣고 일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호숫가의 돌 사이로 작은 머리통이 빼꼼 보였다.
제 딴에는 숨어서 밖을 살피려고 그런 것이겠지.
그 허술한 모습이 귀여웠다. 나를 발견한 멜의 눈동자가 커졌다.
“……세르베인?”
아무리 오랜만에 보는 것이라지만, 이름을 불러 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웃음이 나왔다. 방금까지만 해도 비참하고 화가 나고 죽을 것 같았는데도 지금은 또 웃음이 나왔다.
머저리가 된 기분이었다.
“안녕, 멜. 오랜만이지?”
의도치 않게 애정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목소리가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이고, 상상으로만 떠올리고, 꿈에서만 말을 걸 수 있던 상대니까.
달빛에 반사된 멜의 하얀 살결은 아름답게 빛났다.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가 크게 뜨인 채 천천히 깜빡였다.
뚝, 뚝.
멜의 머리카락 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호수 표면에 부딪히는 소리만 들렸다.
고요한 밤이었다.
멜은 천천히 꼬리만 살랑대며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 시선이 조금 싸늘했고, 혼란스러웠고, 동시에 걱정을 담고 있었기에 이상했다.
시선의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했다.
내가 너무 환자처럼 보여서 놀란 걸지도 모른다.
나는 멋쩍게 웃다가 멜에게 다가갔다.
“그동안 잘 지-.”
첨벙!
“-냈어?”
멜은 내가 가까이 가자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완전히 물속으로 들어갔다.
잊을 뻔했다. 그는 여전히 내게 앙금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멜은 내게서 살살 멀어지더니 내가 손이나 다른 도구를 사용하더라도 닿지 못할 거리가 되자 얼굴을 드러냈다.
그 거리는 내가 그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안경을 가져올 걸 그랬네.”
조금 씁쓸한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오늘이 마지막일 텐데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작별하게 되는구나.
하지만 이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
멜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두 눈에 온전히 담는다면 나는 그를 보내지 못할 것이다.
한편 내 이름을 불렀던 건 순전히 실수였는지 멜은 싸늘하게 말했다.
“왜 왔어?”
“사과하려고 왔어.”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어차피 잘 보이지도 않지만 나는 쭈그려 앉아 그와 눈높이를 맞췄다.
시력이 형편없을 정도로 떨어져 그의 서늘한 표정을 보지 못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편지, 읽어 봤어?”
“……아니.”
“그래…….”
잠시 내가 편지에 어떤 말들을 적었는지 떠올려 봤다.
객관적으로 판단하자면 구구절절한 변명이었다.
널 장식품이나 애완동물이라고 말한 건 화가 나서 나와 버린 말이었어. 미안해. 널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등등…….
나라면 그런 글을 읽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쓴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말주변이 이 모양인 걸 고치기에 한 달은 너무 짧을 것이다.
“멜. 하고 싶은 말이 많아. 그런데……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네.”
나는 작게 웃었다. 한 번도 진심을 말한 적이 없어서 어려웠다.
글로 쓰는 것보다 말로 전달하는 것이 더욱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말이야…….”
“…….”
“가까이 와주면 안 될까? 널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나의 부탁에 멜은 대답이 없었다.
아무래도 그는 내게 가까이 다가오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선택을 강제하지 않기로 했다.
아쉽지만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 하얀 얼굴을 바라보며 어쩔 수 없이 하려던 말을 계속했다.
“……미안해. 널 장식품이나 애완동물이라고 생각한 적 없었어. 그 순간 화가 나서 생각 없이 내뱉었어. 내 잘못이야.”
차가운 바람에 머리칼이 흩날렸다. 옷에 가득 달린 레이스 장식들도 팔락였다.
그러고 보니 그와 처음 만났을 때 입었던 옷도 이것이었다. 온통 흰색에 레이스가 가득 달린 원피스.
내 옷장에는 여러 옷들이 있었지만 나는 죽음을 기다리며 주로 흰옷만 입고 지냈었다.
다른 옷들도 많은데 하필 오늘 입은 옷이 처음 만났을 때 입은 옷이라니…… 기분이 이상했다.
“사실 널 그동안 보러 오지 못했던 순간들 말이야…….”
진실을 말할까?
아파서 오지 못했다고 말할까?
그렇다면 너, 나를 동정해서라도 쉽게 용서해 줄 텐데.
“그때…… 사실…….”
분명 걱정 어린 푸른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겠지.
어쩌면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너는 다정하고 눈물이 많고 마음이 여린 존재니까.
한때, 아니, 지금도 너를 핍박하고 있는 존재지만 너는 나를 위해 기도해 줄지도 모른다.
“…….”
그런데 그게 무슨 소용이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넌 불쌍한 취급을 받고 싶어?
아니…… 나는…….
“……베인? 세르베인!”
“……!”
그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얼마 동안 정신을 잃었던 걸까.
내 손끝은 새파랗게 질렸고, 온몸이 간헐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 무엇보다도 놀라운 건, 바로 눈앞에 당황한 얼굴의 멜이 다가와 있었다는 점이다.
“왜 눈을 감고 있었어……? 졸린 거야?”
내가 잠시 의식을 잃은 걸 잠든 걸로 착각한 모양이다.
다행이다. 나는 눈을 휘어 웃었다.
그를 안심시키기 위함도 있었고, 비로소 내 앞에 다가온 그 말간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나온 까닭도 있었다.
“…….”
아름다운 멜을 앞에 둔 채 눈을 감았다.
숲속 나무들에 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풀벌레 우는 소리도 작게 들리는 것 같았다. 수면이 찰랑이는 소리도 들렸다.
눈꺼풀 위로 방금 봤던 멜의 모습을 되새겼다.
나는 그 애의 모든 모습을 기억하고 싶었다.
……그래. 이제 되었다. 나는 너를 기억할 준비를 완전히 끝냈다.
“왜 그러는 거야……?”
그때 이전보다 더 가까운 곳에서 멜의 목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눈을 뜨니 멜이 호수 밖으로 나와 내게 가까이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좁은 거리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멜의 체향이 느껴졌다. 처음 만났을 때는 바다의 향을 풍기던 멜에게서 이제 달콤한 호수의 향이 났다.
멜이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 시각에 왔어……? 말해 줘. 그동안의 일에 대해선 더 이상 화내지 않을게……. 그러니까…….”
코앞에서 마주친 푸른 눈동자엔 달빛이 담겨 있었다. 푸른 낮의 하늘에 뜬 은빛의 달 같았다.
상냥하고 걱정 어린 눈빛에 문득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니 내가 빨리 죽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건강했다면, 오래 산다면, 절대로 멜을 보내 줄 수 없었을 테니까.
한참 동안 멜과 눈을 마주쳤다. 그 아름다운 눈동자 속 홍채 주름 하나까지 전부 내 기억 속에 새기기 위함이었다.
나는 결국 그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있잖아, 멜.”
내 삶의 마지막 즈음에 널 만나서 다행이야.
널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행복한 적도 없이, 사랑해 본 적도 없이 생을 마무리했을 테니까.
그리고 네가 더 불행해지기 전에 널 놓아줄 수 있으니까.
나는 네게 강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었다.
나약하고 불쌍해서 동정받는 인간보다는, 그가 만났던 인간 중에 강했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었다.
그래서 언젠가 미래에 나와의 일을 떠올리더라도, 그 감정 중에 슬픔은 존재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니까 아프다든가, 그런 사정 따위 말하지 않을래.
이렇게 다정하고 마음 여린 너는 분명 아파할 테니까.
“너를 보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