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화 (15/132)

15 화

의사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녀는 키가 컸고, 일어선 채 나를 바라봤기에 그 얼굴이 너무 멀리에 있었다.

내 몸은 이제 시력도 형편없어져서 그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

한동안 아무런 대답도 없었기에 나는 조금 불안해졌다.

역시 평소에 패악질을 부리다가 죽을 때가 다 되어 이런 짓을 저지르는 건 좀 우습겠지. 혹은 불쌍하게 보일지도.

안 하던 짓은 끝까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수치심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열이 오를 때, 호수처럼 잔잔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 음성은 이전과 달라진 점이 없었기에 나는 조금 안심했다.

“블미에 헥사바임. 블미에라 부르셔도 되고, 헥사바임이라 부르셔도 됩니다.”

사무적인 대답이었지만 그것에 만족하고 눈을 감았다.

역시 이제 와서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건 너무 늦어 버렸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이 정도 거리감이 더 편했다.

곧 죽을 사람이 누군가와 친분을 만드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짓이다. 상대에게 괜히 상처를 주지 않는가.

“그래. 고마워, 헥사바임.”

그래서 나는 결론을 내렸다. 이 의사든, 누구든…… 그리고 멜에게도.

더 가까워지면 안 된다. 서서히 정리를 해야겠다.

어차피 그들도 이 집안의 사용인들과 다를 바 없다.

금전적 계약에 의해 나와 묶인 자, 혹은 내가 소유한 애완동물이었다.

숨만 내쉬며 어둠 속에 있을 때 차가운 손이 내 뺨에 닿았다.

놀라서 눈을 뜨니 블미에 헥사바임의 얼굴이 가까이에 있었다.

그녀는 내가 눈을 뜨자 손을 떼더니 말했다.

“이름을 물으시기에 꽤 기대했는데 그게 답니까?”

조금도 기대하지 않는 얼굴로 그녀가 이어 말했다.

“혹시 곧 죽으니까, 같은 청승맞은 생각에 그만두신 겁니까?”

정곡을 찔렀다. 그 잿빛 눈동자는 나와 눈을 가만히 맞추다가 멀어졌다.

블미에는 흰 가운 위에 코트를 걸쳤다. 그러면서 말했다.

“제가 말했죠. 최선을 다해 보겠다고.”

“……그랬지.”

“죽게 두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내가 볼 수 있는 거리를 벗어나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얼굴이 미소 지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처음이었다.

“살아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달칵.

블미에는 나의 대답도 듣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흐릿한 시야를 닫았다. 어차피 내 눈은 이제 멀리에 있는 것을 잘 보지 못한다.

그래도 살게 될 수도 있다.

이때까지 허무맹랑한 약 파는 소리로 들었던 다른 의사들의 ‘아가씨는 건강해질 겁니다.’라는 말과 다른 신뢰감이 있었다.

어차피 같은 말인데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안경을 맞춰야지.”

그리고 널 만나러 갈 거야, 멜.

* * *

예전에 아버지는 선물을 줄 때 외에는 나를 보러 오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에는 잠든 척하는 내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작별을 준비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어쨌거나 내게는 다시 똑같은 일상이 시작되었다.

나는 편지를 썼지만 멜은 답해 주지 않았다.

또한 편지를 전해 주러 가는 하인은…… 역시나 자주 바뀌었다.

“한밤중에 홀로 호수로 향하는 모습을 기사들이 발견하고 저지했다고 합니다.”

“인어는 괜찮나?”

“네. 이번에는 인어 님께 도달하기 전에 잡았습니다.”

“그래.”

성별은 멜에게 홀리는 것에 관련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제는 편지를 읽지 않고 전해 주는 것만 시켜도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

그런데 이런 방식이 되자 멜이 내 편지를 읽을지도 의문이었다.

“……만나러 가야 하는데.”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은 이전에 본 적 없이 창백했다.

곧 나을 수 있다는 거짓된 희망으로 억지로 이전의 생활을 흉내 내어 봤지만 잘되지 않았다.

나는 이제 음식도 잘 소화하지 못해 전부 갈아 버린 수프만 간신히 마셨다.

얼마 전에 맞춘 안경은 소용이 없었다.

내 시력은 나빠졌다가, 좋아졌다가, 안압이 제멋대로 뛰기까지 했다.

이제는 그냥 시력을 잃지 않은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달칵.

“…….”

아버지는 매일 새벽, 잠든 내 얼굴을 보다가 나갔다.

나는 매일 아팠고, 고통은 무뎌지지 않았다. 그리고 멜을 보러 갈 수도 없었다.

블미에 헥사바임의 얼굴을 볼 때마다 진통제를 처방해 달라고 빌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거기엔 이유가 있었다.

“그럴 바엔 다시 그 인어를 이곳에 들이세요.”

“안 돼. 수조는…… 인어가 지내기에 좋지 않아.”

“저도 안 됩니다. 그 몸 상태로 외출은 절대 허가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지금보다 조금만 나아지면…… 나가도 되지?”

“……네.”

진통제를 처방해 달라고 하면, 간신히 아프지 않은 척 그녀를 조금씩 속였던 것들이 다 수포로 돌아갈 테니까.

나는 어서 블미에가 내가 건강해졌다고 믿어, 아버지께 내가 외출을 해도 된다고 말하기를 바랐다.

그때까지도 나는 곧 건강해져서 멜을 만나러 갈 수 있을 것이라 희망을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나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으니까.

“으윽……!”

까드득!

밤중에 홀로 고통을 참아 내다가 일기장에 막무가내로 글을 휘갈겨 쓰는 날이 많아졌다.

나의 일기는 멜을 보러 가지 못한 때부터, 멜에게 쓰는 편지에 가까워졌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진짜로 멜에게 보냈던 편지에는 한 마디도 적지 않았던 말들만 있었다.

너무 아프다. 언제까지 아파야 할까. 아플 때면 네가 보고 싶어. 하지만 알아. 너는-

괜찮은 척, 아프지 않은 척, 잘 지내는 척, 그러느라 하지 못했던 말들이 여과 없이 글을 통해 나왔다.

하지만 알아. 너는 나를 보고 싶어하지 않으리란 걸.

“…….”

촥!

하지만 알아. 너는 나를 보고 싶어 하지 않으리란 걸.

썼던 문장 위로 줄을 그어 버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사실이란 걸 알았다.

여러 번 편지를 보냈지만 한 번도 답하지 않던 멜이었다. 아마 내가 죽도록 미울 것이다.

사용인들은 늘 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편지를 쓰기 위한 종이와 펜도 주었지만 한 문장짜리 답장도 온 적이 없었다.

예전이라면 오히려 빨리 죽기 위해 노력했을 거야.

아프다는 것. 빨리 죽고 싶었다는 것.

그런 것들을 소리 내서 말할 수는 없었다.

누군가가 들으면 멜을 만나러 갈 수 없게 할 테니까.

하지만 이제는 끔찍하게 아파도 살고 싶어. 너와 더 오래 있고 싶어.

멜과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참 많았다.

블미에는 내게 살아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적으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일기장의 가장 마지막 장에 하고 싶은 일들을 적기 시작했다.

1. 저택을 나가는 것.

2. 친구를 사귀는 것(블미에와 친해질 수 있을까).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것들.

하지만 사실 그런 것들도 좋지만, 더 원하는 것이 있었다.

나는 그 밑에 몇 가지 문장을 덧붙였다.

사실 이런 것들보다 멜과 함께 수선화를 보고 싶다. 녹시렐 저택에는 겨울이 지나면 노란 수선화가 가득 핀다. 곧 겨울이 끝나니, 조금만 더 기다리면 볼 수 있겠지.

멜과 함께 벽난로 앞에서 책을 보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넌 물에서 나오지 못하니, 호숫가에 작은 불을 지피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다만 숲에 불이 나지 않게 조심해야겠지.

평생 저택을 나가지 못해도 괜찮다. 여태껏 친구를 사귄 적이 없었으니 앞으로도 친구가 없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냥 너와 조금 더 많은 일들을 해보고 싶다.

너와 같은 세상에서, 같은 위치로, 동등하게 사랑하고 싶다.

하지만 마지막에 적은 건 내가 아무리 건강해져도 불가능하겠지.

나는 마지막 장을 덮고, 다시 쓰던 오늘의 일기로 돌아왔다.

아직 적지 못한 문장이 있었다.

오늘도 너를 사랑해.

눈을 감고 그 문장 위에 입술을 가볍게 가져다 댔다.

차가운 입술의 감촉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너의 체온이 그러했다. 너는 마치 바다의 온도 같았다.

내가 쓴 일기는 늘 똑같은 문장으로 마무리되기 시작했고 나는 늘 똑같은 의식을 행하고 일기를 닫았다.

다음 날. 또 같은 하루가 반복되었다.

아프고, 아프고, 아프고, 아픈 날들이었다.

그리고 2년 만에 삼촌이 저택으로 돌아왔다.

* * *

삼촌은 내가 가진 몇 없는 인간관계 중 유일하게 정상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아버지와 나이 차가 많이 나서, 오히려 나와 또래로 묶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내가 기억하는 삼촌은 공작가의 분위기와 달리 밝은 사람이었다.

“가문은 형이 알아서 꾸려 가. 나는 없는 사람으로 생각해 줘. 나는 저택에만 머물기보다는 세상을 돌아다니는 게 좋아.”

몇 년 전, 삼촌은 그 말을 남기고 공작가를 떠났다.

하지만 정말 그 이유로 떠난 것은 아니었다.

“아가씨. 라헨 님과 너무 친하게 지내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몰라요. 그분이 후계 자리를 노린다면…….”

“……삼촌이 후계 자리에 걸맞지 않나.”

그때도 내 건강은 형편없었기에 그가 공작이 되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나는 여자고, 어리고, 건강도 약하며, 그 탓에 받아야 하는 정상적인 후계 교육조차 끝내지 못했다.

내가 설령 공작이 된다고 해도 사람들은 나를 만만하게 볼 게 분명했다.

그때 삼촌은 이제 막 성인이 된 창창한 남성이었고, 공작가 후계 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총명하다고 암암리에 유명했다.

“하지만 그분은…….”

그럼에도 삼촌이 떠났던 진짜 이유는, 본인이 사생아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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