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화
“……바빠서 그랬어.”
이미 한번 답을 한 적이 있는 질문이었다.
내가 그에게 보냈던 하녀, 다핀은 멜에게 늘 내가 잘 지낸다고, 다만 바쁠 뿐이라고 전했다고 했다.
그 기억을 되살려 답했건만 멜은 부들부들 떨리는 입꼬리를 올렸다.
일부러 비웃기 위해 노력하는 얼굴이었지만 그 얼굴을 한 본인이 더 상처받은 것처럼 보였다.
“바빴다고……? 너야말로 거짓말 좀 성의 있게 해. 네가 편지 한 장 쓸 시간 없이 바쁘지 않다는 것쯤은 봐서 알아. 그냥 내게 질렸던 거겠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멜은 격앙되어 외쳤다.
“다핀이 그랬어! 넌 내게 질렸다고! 그래서 만나러 오지도 않고, 이젠 편지조차 잘 안 쓴다고! 그러니까 날 위해 그런 결정을 한 척하지 마!”
천을 붙잡은 손이 꽉 주먹을 쥐었다. 이 순간에도 나오는 그 하녀의 이름에 화가 났다.
그 탓이었을 것이다. 나는 더는 멜에게 심한 말을 하거나, 그를 궁지에 밀어 넣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맞아. 널 위해서가 아니야. 네가 질려서, 조금 색다르게 느껴질 때까지 호수에 놔둘 생각이었어.”
“뭐……?”
“넌-.”
생각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게 아니면 얼마나 좋을까.
진실로 너를 장식품이나 애완동물로 여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행이었다. 나는 진심을 감추는 것에는 도가 튼 인간이었다.
“사실 네가 예전에 말했던 대로, 그래. 넌 그냥 장식품이나 애완동물이었나 봐. 내가 착각했어.”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스스로 했던 다짐을 무너뜨릴 이유도 없었을 텐데.
평생 아버지처럼 되지는 않겠다는 그 다짐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을 텐데.
또…….
네가 걱정되어 밤을 지새울 일도 없었을 거야.
오늘로 너를 보는 게 마지막일까 봐 두려워하지도 않았겠지.
떠나기 전에 한 번이라도 너를 더 보고 싶어서, 죽을 것 같은 몸을 이끌고 네가 자는 모습을 훔쳐보는 일 따위 하지 않았을 거야.
“그 좁은 수조에서 네 몸을 망쳐 가며 내 비위를 맞추려 노력해도 바다로 갈 일은 없어. 그러니 호수로 가. 그게 네게도 좋은 일이잖아.”
나는 멜의 얼굴을 마주한 채 더 거짓말을 할 자신이 없어서 천을 완전히 둘러쌌다.
시야가 가려진 탓일까, 멜이 낮고 음산하게 말했다.
“……이거 떼.”
“이만 들어와서 옮겨.”
“기다려. 내가 할 말은 안 끝났어!”
멜이 소리쳤지만 나는 무시했다.
하인들이 들어왔고 그들은 수조를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그들에게 멜이 무슨 말을 하든 무시하라고 명령했기에 하인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면 그들이 이토록 긴장하진 않았을 것이다.
나는 혹시 그들이 내 지시를 어길까 봐 감시할 기사들을 붙였다.
또 기사들이 그들의 행위를 보고도 봐줄까 봐 하녀들에게도 그들을 따라가라고 했다.
목격하고 진실을 말한 자에게는 상을 주고, 내 말을 어기거나 보고도 묵시한 자에게는 벌을 주겠다고 했다.
편집증적 행위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멜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날 그냥 바다로 보내! 내게 질렸다면 바다로 보내면 되는 거잖아!”
이전에 들어 본 적 없이 날카로운 멜의 음성이 들렸다. 동시에 울음이 섞인 목소리였다.
하인들이 내 눈치를 살폈지만 내가 감정의 동요도 없이 무표정하자 서둘러 움직였다.
달칵.
문이 닫혔다.
그럼에도 여전히 밖에서 멜이 처절하게 소리치는 게 들렸다.
“그럴 줄 알았어! 네 감정이 거짓이라고 내가 분명히 말했었잖아!”
나는 멜이 마치 내 앞에 있는 것처럼, 뻣뻣이 선 채 그 소리를 계속 듣고 있었다.
“……아니야.”
창문 너머로도 멜을 볼 수 없게, 그 모습이 숲속으로 사라지자 바닥에 주저앉았다.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미안, 미안해…….”
이런 식으로 널 호수에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냉정하게 판단했을 때 널 호수로 보내면 우리가 언제 다시 만날지는 미지수다.
그렇기에 적어도 이런 식으로 너와 마지막이 될 날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바닥에 코피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바닥에 손을 짚어 쓰러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조금도 진심이 아니야, 멜…….”
하지만 힘을 주었던 팔이 무너지고 내 몸은 바닥을 향해 고꾸라졌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 * *
“또 뵙는군요.”
눈을 떴을 때 내 곁에 있는 사람은 주치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주치의가 사흘꼴로 바뀌기 전, 마지막으로 봤던 회색 머리칼의 의사였다.
그녀는 심심한 어투로 인사를 했지만 나는 대답할 힘이 없었다.
영혼이 없는 목소리로 ‘저런.’이라고 감탄사를 뱉던 그녀는 진료 기록을 살펴보더니 옆의 하녀에게 물었다.
“이게 이때까지 기록의 끝인가?”
“네.”
“……이름난 의사들이라 해도 별거 없군.”
냉소적 웃음을 지었다가 순식간에 사그라뜨린 후, 의사가 나의 얼굴을 살폈다.
그 건조한 표정에는 미미한 걱정이 어려 있었다.
그녀는 잠시 방의 한편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멜이 없는 텅 빈 수조가 자리했다.
“남들이 보는 것도 싫어할 만큼 아꼈으면서 왜 방생했죠?”
인어의 존재를 알고 있던 의사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내가 숨만 쉬느라 답을 하지 못하자 의사는 나를 내려다보며 담담히 말했다.
“아가씨는 제 처방을 극도로 싫어하셨죠. 하지만 저는 꽤 효과가 있다고 봤는데, 정말로 놓아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내겐…… 그냥 애완동물이…… 아니었거든…….”
나는 억지로 목소리를 끄집어내 답했다.
내 말에도 의사는 심신미약자의 헛소리를 들은 것처럼 무표정했다.그녀는 펜으로 진료 기록을 툭툭 두드리다가 하녀에게 물었다.
“그 애완동물을 다시 데려올 수는 없나?”
“가능하긴 하지만 아마 안 될 겁니다. 아가씨가 원치 않으시거든요…….”
“골치 아프네요.”
의사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하는 주제에 어깨를 으쓱였다.
그 회색 머리칼보다 어두운 잿빛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아가씨. 한 가지 묻겠습니다.”
의사의 회색 머리칼이 내 얼굴 위로 쏟아졌다. 그녀가 내 귓가에 대고 말하기 위해 고개를 숙였기 때문이었다.
늘 무표정하던 의사는 이 순간까지도 감정 없는 말투로 속삭였다.
“아직도 죽고 싶으십니까?”
그렇게 물은 의사는 다시 내게서 일정 거리로 떨어졌고, 나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아주 빠르게 대답이 붙어 왔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붙들고 계셨어야죠.”
“…….”
“동정심이 들어도 당신의 행복만 생각하며 가지고 있어야 했습니다. 솔직히 물리적인 방법으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선생님!”
옆의 하녀가 기함을 하며 소리쳤다.
그녀는 혹시나 밖에서 공작이 들어올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문을 힐끔거리며 작게 말했다.
“아무리……! 공작가에서 선생님을 잠깐 신뢰하지 못해 다른 분을 고용했다지만…… 그런 말씀은 하시면 안 되시죠……! 그 돌팔이들 때문에 아가씨 건강이 나빠져서 공작님께서도 매우 후회하고 계십니다!”
글쎄. 아버지가 후회하려나.
나는 냉소적인 기분으로 하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는 내가 살아서 다행이라는 감정 반과, 죽지 않아 아쉬움을 반 느꼈던 인간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틀린 점을 말하자면 돌팔이 의사 때문에 내 건강이 나빠진 건 아니었다.
의사 역시 그걸 아는 듯 하녀의 말을 그냥 무시했다.
“일단 아가씨가 처음으로 살고 싶다고 의사를 밝혔으니 저도 최선을 다해 보죠.”
“…….”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의사는 그 말을 끝으로 익숙한 처방을 내게 내리고 도구들을 정리했다.
문득 그 단정한 손끝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이름을 아직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좀 대단할 정도의 무관심이었다.
얼마나 과거에 그 사람을 미워했으면 나와 몇 년씩이나 안면이 있는데도 이름 한번 묻지 않았을까.
“저는 마차를 부르러 가겠습니다.”
하녀가 자리를 비웠다.
그쪽을 향해 시선을 두었다가 의사는 천천히 가방을 챙기고, 흰 가운 위에 코트를 덧입으려 했다.
그 모습에 나는 무심코 의사의 소매를 붙잡았다.
꽉.
“용건이 있으십니까?”
그녀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문득 흰 가운이 이 사람과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당신은 나쁘지 않은 사람인데.
그녀는 나보다는 나이가 많겠지만…… 어쨌든 내 또래였다.
몸이 아파 공작가의 후계자 수업도 못 받은 한심한 나와 달리, 그녀는 벌써 의사였다.
보통 이 나이 때의 귀족 영애들은 혼처를 찾는 것에 주력하니, 귀족사회에서는 천한 일을 한다고 손가락질받을지도 모르지만 내 눈에는 대단해 보였다.
“……있잖아.”
몸이 이런 상태가 되기 전에 다른 사람들과 조금 친해져 볼 걸 그랬다.
아버지가 말한 대로, 아파도 왕궁에 가서 왕손들과 얼굴을 익히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쪽에서는 녹시렐 공작가의 권력을 사용할 도구로만 봤겠지만, 개중 한 명과는 좋은 친구가 됐을지도 모르지.
“이름이 뭐야?”
그래. 새삼스럽게 생각하지만, 나는 사람이 고팠다.
이 저택에 유폐된 것처럼 살며 모두와 친해지려고 노력도 하지 않았지만, 내가 조금 더 어린 나이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정상적인 애정을 주고받으며 자랐다면 그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던 것 같아서…….”
어쩌면 멜이 사람의 형태를 했기에 살린 것도 그 이유일지 모른다.
나는 외롭고 싶지 않았다.
죽을 때가 다 되어서야 인정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