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 화 (12/132)

12 화

분명 멜에게도 가족이 있겠지. 나 때문에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가족을, 어머니를 만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안다.

그런데 아버지와 똑같은 짓을 멜에게 하고 있다.

“어머니를 뜻하는 단어는 이렇게 적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종이에 크게 단어를 적었다.

마비가 오기 시작하는 신체 때문인지, 혹은 양심의 가책 탓인지 그 쉬운 단어를 적는 것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멜이 볼 수 있게 수조에 그 종이를 붙이는 손이 떨려 왔다.

멜은 종이가 아닌, 내 손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멜…… 있잖아.”

나는 그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아무 말이나 꺼내려 했다.

가령 오늘 날씨가 좋더라, 같은 상투적인 이야기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상습적이며 불규칙한 고통으로 마비된 나의 사고체계는 다른 말을 불쑥 꺼내고 말았다.

“가족이 보고 싶어?”

당연히 보고 싶겠지. 그걸 질문이라고.

내 어리석음을 탓하며 그 말을 없던 것으로 치부하려 했다.

그때 멜이 수조 벽에 있는 어떤 단어를 가리켰다.

툭툭.

“바다로…… 가고 싶다고?”

억지로 웃는 얼굴을 유지하고 되물었다.

내 말에 멜은 애매한 표정을 짓더니 천천히 고개를 젓고 다시 ‘바다’를 가리켰다.

바다로 가고 싶긴 한데, 하려던 말이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툭툭.

“바다에 가족이 있다고?”

멜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인간의 기준에서는 말이 안 되지만…… 인어의 세상에서는 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말했다.

“……네 가족이 바다라고 말하는 거야?”

그때에야 멜은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바다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듯이 환히 웃는 그 얼굴에 나는 조금 아연한 기분을 느꼈다.

* * *

“허억, 허억!”

그날 밤, 나는 고통에 발작하듯 잠에서 깨었다.

다행히 커튼이 쳐져 있기에 멜이 내가 몸부림치는 모습은 보지 못할 터였다.

급격하게 느려졌다가, 또 언젠가는 미친 듯이 뛰는 심장 박동에 현기증을 느꼈다.

‘바다의 꿈을 꿔서 그런가?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죄책감을 느끼는 거야?’

자조적인 웃음이 나왔다.

나는 어린 짐승처럼 웅크린 채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퉁-!

그때 둔탁한 무언가가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용인이 복도에서 무언가를 떨어트렸나?

그런 생각을 할 때 짧은 신음 소리가 들렸다.

“윽!”

그 맑고 아름다운 음성은 멜의 목소리였다.

불길한 예감에 고통도 잊어버렸다. 나는 서둘러 침대에서 나와 커튼을 걷었다.

촤르륵!

“……멜?”

고작 방 안의 짧은 거리를 이동한 것만으로 식은땀이 맺혔다.

나는 수조 안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쿵!

멜이 잠을 자다가 무의식적으로 뒤척일 때마다 꼬리가 수조 유리에 부딪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생전 처음 보는 크기의 수조일지라도, 내 또래의 소년이 들어가 살아가기에는 턱없이 좁은 공간이었다.

“으윽…….”

자던 중에도 고통을 느꼈는지 멜은 무의식적으로 꼬리를 감싸 안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또다시 수조에 부딪혔다.

툭!

멜의 꼬리에서 떨어져 나온 은청색의 비늘이 수조 아래로 미끄러졌다.

나는 문득 수조 바닥 구석에 많은 비늘이 쌓여 있음을 발견했다.

“모래 아래에 숨겨 뒀던 거구나.”

살짝 들춰진 모래 아래 비늘들이 모여 있었다.

평소에는 멜이 내 시야를 가려 잘 보이지 않던 구석이었다.

“…….”

그때 생각했다. 멜을 이제 수조에서 지내게 하면 안 된다고.

그를 바다에 보낼 수 없다면, 호수에라도 보내야 한다.

* * *

“숲은 지금 상황이 어때?”

며칠 후, 고민 끝에 나는 침대 위에 식사를 차려 주던 하녀에게 물었다.

나는 병약한 몸 탓에 침대 위에서 식사하는 것이 익숙했다.

“나무가 많이 타버려서…… 모종을 심었지만 아마 예전의 모습을 되찾는 데에는 거의 백 년이 걸릴 거라고 식물학자가 말했어요.”

백 년이라. 몇십 년이라면 오히려 아쉬웠을 텐데 백 년이라고 하니 미련조차 들지 않았다.

현재에 생존 중인 그 어떤 튼튼한 인간이라 해도 백 년 후까지 살 수는 없을 테니.

나는 그 숲을 꽤 좋아했다. 몇 번 가본 적은 없지만, 그 숲에 있던 호수를 좋아했다.

이제 예전 같은 풍경을 볼 수 없다는 것에 꽤 아쉬움을 느꼈다.

“……그래. 호수는? 호수에도 지장이 있어?”

“호수는 이제 괜찮은 것처럼 보였어요.”

다행이다. 호수만 멀쩡하다면 상관이 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식사를 계속했다.

점심이었지만 수프, 샐러드, 최소한의 단백질 섭취를 위한 작은 고기 조각이 전부였다.

개인적으로 소고기보다는 해산물이 더 입맛에 맞았지만 멜과 한 공간에서 다시 지내게 된 이후 나는 해산물을 먹지 않았다.

“그만 먹을래.”

“더 드시는 게 어떨까요…….”

“속이 안 좋아서 힘들 것 같아.”

“예, 알겠습니다.”

하녀가 식사를 치웠고, 나는 침대에 앉아 책을 읽었다.

툭툭.

그때 커튼 너머로 멜이 수조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낮잠을 자는 줄 알았는데 깨어 있었나 보다.

멜은 목소리를 잃은 후 혹시 나를 불러야 하는 일이 생기면 수조를 살짝 두드리곤 했다.

마침 나도 그에게 할 말이 있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침대에서 내려와 수조로 다가갔다.

촤륵!

커튼을 걷자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멜이 보였다.

멜에게는 이제 꼬리에 든 멍과 떨어진 비늘 외에는 외적 상처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목소리는 내지 못했다.

“멜? 무슨 일이야?”

“…….”

멜은 간단한 손짓이나 입 모양으로는 전하기 어려운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다.

수조 바닥에 깔아 준 모래 위에 멜이 문장을 빠르게 적기 시작했다.

사실 멜은 한번 가르친 건 단번에 익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문장만큼은 어려운지,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여전히 단어를 가리키며 대화를 이어 나가곤 했었다.

갑자기 발전된 실력이 조금 의아했지만 나는 잠자코 멜이 써 내려간 문장을 읽었다.

호수에 대해선 왜 물어봤어?

네가 재촉하지 않더라도 내가 꺼내야 했던 사안이었다.

나는 최대한 상처받지 않기 위해 미련이 없는 척, 거짓 웃음을 지어냈다.

“……그거? 너를 다시 호수로 보내 주려고 물어봤어.”

아직도 처음 멜을 호수로 보냈던 날이 기억에 선명했다.

민물에 익숙해지기 전이라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멜은 호수에 남는 것을 선택했었다.

그만큼 수조를, 내 곁에 남는 것을 끔찍이 싫어했었다.

“수조는 너무 좁고 불편하잖아. 게다가 넌 수조를 싫어하니 잘됐지?”

“…….”

“만나러 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가지 못하더라도 편지는 쓸게.”

뜻밖에 멜은 멍하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기뻐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실망, 원망, 배신…… 같은 감정에 가까워 보였다.

아. 너를 바다로 보내 주지 않아서 그러는 거구나.

실컷 걱정하는 척, 널 바다로 보낼 때 공작가의 증표를 주겠다는 둥, 다른 인간에게 붙잡혔을 때가 걱정되니 글을 가르쳐 주겠다는 둥, 그런 말들을 지껄였는데 결국 돌아온 결과가 호수행이라서 그러는 거구나.

“왜? 바다가 아니라서 실망했어?”

내 목소리에서 서늘함을 느꼈는지 멜이 움찔 떨더니 고개를 황급히 저었다.

여기서 그렇다고 답하면 내가 괘씸함을 느껴 수조에 계속 가둬 둘 것이라 생각해서 그러는 게 뻔했다.

나는 수조에 붙어 있는, 그동안 우리가 함께 보냈던 시간의 흔적들을 바라봤다.

온갖 단어들과 문법적 내용을 하나하나 적어 붙인 종이들이었다.

이 시간들만큼 멜과 내가 진정으로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식으로 또 내 착각임을 알아 버렸다.

정말로 실망해서 그런 게 아니야.

오해하지 말아 줘.

멜이 다급히 문장을 써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다음 문장을 쓸 때는 그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날…… 생각해서 호수……로 보내 줘서 고마워.

“고마울 것까지야.”

일부러 조소를 지었다.

나는 멜의 다 나은 겉모습과 내가 필요 없을 만큼 발전된 글쓰기 실력을 바라봤다.

이제 그에게 나는 쓸모를 다한 존재였다.

그때가 되자 더 이상 웃음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이젠 상처도 나았고, 글도 쓸 줄 아니 다행이야.”

“…….”

“오늘 호수로 보내 줄게. 하인들을 불러올 테니 기다려.”

내 말에 멜은 또 바닥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쓸 말을 보고 싶지 않아서 뒤돌았다.

툭툭!

멜이 나를 붙잡기 위해 수조를 두드렸다.

알면서도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자 멜이 세게 수조를 두드렸다. 그런 적은 처음이었다.

쾅쾅!

“…….”

그 정도로 다급한 건가?

하긴, 그럴 수밖에 없지.

바다가 가족이라고 했었다. 네겐 바다가 가족이니, 영원히 가족과 떨어질까 봐 두려울 것이다.

하지만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넌 바다로 가지 못한다.

나는 너를 보낼 준비를 아직 하지 못했다.

나는 방문을 붙잡은 채 여전히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네가 그리 좋아하던 다핀이 말했었지. 내가 죽으면 널 바다로 보내 주겠다고.”

“…….”

“어느 정도 사실이야. 내가 죽기 전까진 넌 못 돌아가. 그러니까 수조를 두드리는 건 그만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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