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화 (11/132)

11 화

희망이 보였다.

설령 네가 말을 하지 못하더라도 인간 세계에 갑자기 내던져졌을 때 상황을 해결해 나갈 방법이 보이는 듯했다.

“네가 글을 읽고, 쓰는 법을 알게 되면 해결되는 거잖아.”

나는 커다란 발견이라도 한 사람처럼 칭찬을 바라듯 멜을 바라봤다.

그때까지도 멜은 수조에 붙어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로 애처로운 건 자신이면서 마치 나를 안타깝게 여기는 듯한 얼굴이었다.

“……싫어?”

나는 주인에게 애정 표현을 거절당한 개처럼 멜을 바라봤다.

그 순간 그걸 대체할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멜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그의 표정이 미묘했다.

‘그렇게 할게.’

나는 그를 위해 제안한 것이었지만, 그 얼굴은 마치 나를 안쓰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 * *

멜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그에게 글을 가르치게 된 나날들이 행복했다.

처음에는 결코 내 욕심을 채울 목적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내게 가장 이득이 되어 버렸다.

누군가 내게 살면서 가장 즐거웠던 순간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 순간을 고를 것이다.

“윽…….”

나는 때때로 굳어 버리는 신체의 감각과, 일렁이는 시야, 끓어오르는 열들을 무시했다.

멜에게 아픈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멜. 오늘 배운 내용은 여기에 붙여 둘게.”

멜이 수조 안에서 필기한 내용을 볼 수 있도록 수조의 바깥에 종이를 붙였다.

수조 안에 종이를 넣으면 잉크가 번질 테니 이것이 최선이었다.

“심심할 때 복습하면 재밌을 거야. 내일 알려 줄 내용도 미리 붙여 둘게. 예습도 하고 싶을 테니까.”

잠시 멜이 나를 향해 황당하다는 얼굴을 한 것 같았지만 내 착각이라 넘기기로 했다.

나는 수업이 끝났지만 왜인지 조금 아쉬워서 괜히 수조 근처를 서성였다.

“조금 더 수업을-.”

내가 입을 열고, 멜이 다급히 고개를 저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아가씨. 시간이 되었습니다.”

문밖에서 하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녀는 두루뭉술하게 말했는데 그건 내가 지시한 사항이었다.

순식간에 표정이 굳을 뻔했지만 멜의 앞이니 표정 관리를 했다.

“이제 내가 수업을 들을 시간이네. 수업을 더 해볼까 했는데 다음 내용은 내일 알려 줘야겠어.”

내 말에 멜의 꼬리 끝이 살랑이며 지느러미가 하늘거렸다.

아무래도 멜이 살짝 기뻐하는 것 같았다.

설마…… 그럴 리가…….

멜은 내게 공부 열심히 하고 오라며 몸짓으로 응원했다.

나는 피식 웃고는 커튼을 쳤다. 곧 이 방에 들어올 이들로부터 멜을 가리기 위함도 있지만 진짜 목적은 멜에게 내 모습을 보여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들어와.”

달칵.

내 지시에 문이 열리고 회색 머리의 의사가 들어왔다.

사실 그녀가 찾아오는 건 내게 익숙한 일이었다. 내 의식이 끊기고 회복되길 반복하는 동안에도 늘 나를 찾아왔으니까.

다만 예전에는 이 의사를 싫어했다. 내게 애완동물을 키우라고 권유한 것도 그녀였으니까.

그 이후로 아버지가 온갖 동물들을 데려왔던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게 아니었다면 멜을 만나지도 못했겠지만.

어쨌든 예전의 나는 어떻게든 빨리 죽기를 희망했기에, 내 명줄을 늘이려 하는 의사가 보기도 싫었다. 하지만 멜을 만난 이후에는 고분고분하게 그녀의 말을 들었다.

“수업 시작하겠습니다.”

다만 나는 혹여나 멜이 들을까, 사용인들과 의사들에게 모든 단어를 말하는 것에 신중히 하라고 지시했다.

이전에 의사는 실수로 멜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 멜에게 그녀를 선생님이라고 소개하고 말았다.

다행히 매사에 의욕이 없고, 무감각해 보이는 얼굴만큼이나 의사는 인어의 존재에 관심이 없었다.

아무래도 ‘여성’이라는 성별이라고 해서 모두 인어에게 홀리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의사는 내 맥박과 체온을 쟀고 채혈까지 마쳤다.

이후 이런저런 약물 반응을 확인하던 그녀는 늘 그랬듯 전혀 걱정하지 않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정말로 괜찮은 겁니까?”

“그래. 이제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전보다 수치가 좋지 않은데, 그건 신뢰할 수 없는 발언이군요.”

냉정한 결론이었다.

나는 모르는 척 시선을 돌리고 말았지만 근처에서 시중을 들던 하녀는 나 대신 직접 그 말에 반박하며 나섰다.

“선생님께서 잘못 보신 것 아닐까요? 아가씨는 요 근래 아주 괜찮으셔요.”

공작가의 사용인들은 내가 깨어난 이후부터 늘 활기에 차 있었다.

쓰러지기 전, 나는 누가 봐도 오늘내일하는 환자 신세였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하지 못했고, 의식이 깨어 있는 순간도 드물었다.

하지만 내가 죽은 줄 알았는데 다시 눈을 뜬 날, 사람들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믿었다.

그날부터 나는 매일 아침에 눈을 떴고, 매일 밤에 눈을 감았으니까.

고작 그것이 내겐 기적이었고, 실제로도 기적이라고 할 만한 일이었다.

다만 그것들은 정말로 내 몸이 아프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라, 내 의지로 실행된 일들이었다.

의사는 하녀의 말에 어깨만 으쓱하고는 다시 내게 말했다.

“당장 끝이 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내 수업 진도는 이제 다 끝난 건가?”

의도적으로 말을 돌려 의사에게 눈치를 줬다.

내 말에 의사는 커튼 너머를 바라보는 듯하다가 안경을 치켜올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가씨. 새 교재를 드리죠.”

그건 새로운 약을 처방하겠다는 말이었다.

“아침저녁으로, 졸음이 몰려와도 최대한 보셔야 합니다.”

아침저녁으로 의식이 없어지려 해도 반드시 약을 먹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의사는 알고 있었다.

사용인들은 내가 멀쩡한 정신으로 하루를 보낸다고 믿었지만, 그녀만이 내가 눈을 뜨고 있는 순간에도 그 의식이 때때로 사라진 상태임을 알았다.

마치 그날 죽어야 했던 몸을 붙들고 살고 있는 것처럼, 사실 내 몸은 이전에 겪은 적 없는 가장 끔찍한 형태의 고통을 겪고 있었다.

“오늘 수업은 이걸로 끝입니다.”

의사는 온갖 진찰 도구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방 한쪽에서 대기하던 하녀는 의사를 돕기 위해 다가왔다.

“선생님. 진…… 수업이 끝났으니 지금 마차를 부를까요?”

“그 전에 오늘은 공작님을 뵈어야겠네.”

그 말에 나는 눈을 번득이며 의사를 바라봤다.

하지만 회색 머리칼을 단정히 묶은 젊은 의사는 나를 사무적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리 그러셔도 공작님은 아셔야 합니다. 아버지잖습니까.”

이 의사는 듣기로 어느 남작의 딸이지만 가난한 집안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 의사라는 험한 일을 하게 되었다고 들었다.

가난하지만 그래도 귀족의 신분 탓인지 이 의사는 내가 압력을 넣어도 전혀 두려워하거나 머뭇거리는 기색이 없었다.

“……마음대로 해.”

“감사합니다.”

제 신념대로 행동하는 그 의사의 행동은 내가 억지로 그를 제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 신념의 장점이랄 것도 존재하긴 했다.

다른 의사들이 내게 ‘아가씨 몸은 곧 괜찮아질 것입니다.’, ‘몸 상태가 이전보다 좋습니다.’ 같은 거짓만 고할 때 그 사람만큼은 내가 어떤 상태인지 명확히 알려 주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그녀의 행동을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 * *

“안녕하세요, 아가씨. 진찰하겠습니다. 조금만 참아 주세요.”

“너는 누구지?”

“저는 오늘부터 아가씨를 진찰하게 된 의사입니다.”

하지만 다음 날, 나를 꽤 오랫동안 진찰하던 의사의 얼굴이 바뀌었다.

하녀들은 그 의사가 스스로 일을 그만두었다고 전해 왔지만, 나는 그게 사실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아버지가 의사를 교체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 * *

“아가씨, 반갑습니다. 저는 아가씨의 주, 아니 선생님이 될-.”

나의 주치의는 그 이후로 거의 사흘 단위로 바뀌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유명하다고 이름난 의사들이라고 사용인들이 소개했지만 나는 신뢰할 수가 없었다.

“참으셔야 합니다. 잠시 수업하겠습니다.”

“아가씨. 종류가 많아도 교재를 전부 보셔야 해요.”

“이번에 새로 도입된 교수 방법인데-.”

무분별하고 검증되지 않은 치료법을 닥치는 대로 사용하는 의사들이 끔찍했지만, 아프지 않은 척을 하기 위해서는 그저 견뎌 내야 했다.

하지만 이 치료 방법들이 효과가 있는지는 진심으로 의문스러웠다.

내가 느끼는 고통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으며, 나는 때때로 산 채로 염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런데도 의사들은 같은 말을 했다. 곧 나을 겁니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처음에는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비웃었지만, 점점 신경 줄이 닳아 사라지는 고통이 엄습해 오자 나는 그 말을 믿기 시작했다.

이 고통이 끝나는 날이 올 것이다.

사실 그건 내가 바라는 사항이기도 했다.

그렇게 끔찍하게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일과 중 유일한 희망은 멜이었다.

나는 그에게 글을 가르쳐 주는 시간이 오기를 기다리며 고통을 참아 냈다.

“멜, 안녕.”

찰랑찰랑.

‘안녕.’

내가 인사하자 멜은 입 모양으로 벙긋거려 인사했다. 그가 움직이자 수조의 물이 찰랑거렸다.

멜의 화상은 예상보다 아주 빠르게 나았다. 그래서 이제는 멜의 몸을 감고 있던 붕대 대부분이 제거된 상태였다.

그 뺨을 가리던 커다란 거즈도 사라졌다. 하지만 꼬리에는 군데군데 비늘이 떨어지고 멍든 흔적이 남아 있었다.

처음에 멍 자국은 없었던 것 같았는데.

미처 보지 못했던 상처였던가?

나는 조금 뻣뻣하게 움직이는 멜의 꼬리에 시선을 두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 배울 단어는-.”

나는 어린이용 단어장을 펼쳤다. 거기에는 이제 한 단원만이 남아 있었다.

사실은 가장 먼저 배워야 했던 단어였지만, 내가 미루고 미뤄 가르쳐 주지 않았던 내용이었다.

“……가족에 대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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