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화
나는 더 이상 다핀이 멜의 앞에서 행패를 부리게 둘 수 없었다.
일단 저 애를 끌어내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비명 소리가 들렸다.
멜이었다.
“아악! 하지 마!”
“저항하지 마!”
“놔! 놓으란 말이야!”
그 소리에 놀라 뛰쳐나갔다.
나무 뒤에서 벗어나니 다핀이 던진 그물에 걸려 발버둥 치는 멜이 보였다.
다핀은 나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외쳤다.
“이젠 내 것이야! 넌 이제 내 것이라고!”
“그만둬!”
“왜? 여기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
그 말에 멜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다핀이 그물을 끌어당기며 입꼬리를 올렸다.
“마차를 불렀어. 편지 읽어 주는 일을 하다 보니 돈을 많이 모았거든. 너를 이대로 마차까지 끌고 갈 거야.”
“……날 정말로 바다로 보내 주는 거야?”
멜이 기대와 죄책감에 일렁이는 눈빛으로 다핀을 올려다봤다.
그 얼굴을 홀린 듯이 바라보던 다핀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아니? 내가 왜?”
“하지만 넌 분명……!”
“생각이 바뀌었어. 약속 따위 뭐가 중요해. 우리 집으로 가자, 멜. 너도 좋지?”
“……싫어!”
멜이 울면서 버둥거렸다.
나는 정신을 똑바로 부여잡고 다핀을 향해 뛰어갔다.
귀족의 체면에 맞지 않는 짓이지만, 지금은 나를 대신해 다핀을 제압할 사람이 없다.
내가 달려오는 모습을 발견한 멜이 눈을 크게 뜨고 중얼거렸다.
“세……르베인?”
“무슨 헛소리를…… 악!!”
콰당!
나는 뛰던 가속도를 이용해 다핀과 그대로 부딪쳤다.
다핀이 넘어지고, 나는 그 위에 올라탔다.
다핀이 놓친 그물이 힘을 잃고 풀어졌다. 멜은 그 틈을 타 그물을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다.
나는 창백하게 질린 다핀의 양 손목을 찍어 누르며 인사했다.
“……안녕?”
“아, 으…… 그럴,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죽었는데……!”
“맞아.”
“으으으……!”
“그런데 혼자는 너무 외롭더라고.”
귀신을 마주한 듯 겁에 질린 다핀의 눈을 바라봤다.
그 옅은 갈색 눈동자에 나의 노란색 눈동자를 맞부딪칠 듯 가까이 가져다 대며 웃었다.
“같이 가자. 내 것을 탐한 죗값은 치러야지.”
“꺄아아악……! 잘못, 잘못했……!”
툭!
다핀이 기절했다. 귀가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에 고막이 얼얼했다.
그나저나 다행이었다. 솔직히 다핀을 넘어뜨리면서도 이후의 일이 막막했었다.
온갖 허드렛일을 해온 하녀와 방금 죽을 고비를 넘기고 온 환자가 몸싸움을 했을 때 승패는 너무 뻔하니까.
“생각보다 담이 약해서 다행이네.”
나는 다핀의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주섬주섬 그물을 사용해 다핀을 묶어 두는데 빤한 시선이 느껴졌다.
멜이 호수에 몸을 담그고 눈만 수면 위로 드러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
웃음이 나왔다.
나는 다핀을 근처에 있는 나무 기둥에 방치하고 멜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오랜만이지?”
멜은 여전히 놀란 마음이 가라앉질 않았는지 눈물을 매달고 있었다.
나는 손을 천천히 뻗었지만 멜은 흠칫 움츠러들었다.
“……그래. 많이 놀랐겠구나.”
나는 손을 거둬들였다.
그 눈물을 훔치려 했지만 아무래도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정말로 보고 싶었던 얼굴인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대뜸 보고 싶었어, 사랑해, 이런 말을 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게 뻔해서 그랬다.
마찬가지로 멜도 내게 할 말이 없는 것 같았다.
조금 씁쓸한 기분에 어서 저택으로 돌아가 사람이라도 불러와야겠다고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멜이 말을 걸었다.
“있잖아, 저 애는 어떻게 할 거야?”
“…….”
너는 이 상황에서 쟤를 걱정하는구나. 핫, 하고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보이자 멜은 겁을 먹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말들을 삼키지 않고 뱉어 냈다.
“다핀이 저러는 건…… 원래 다핀은 저런 애가 아니었어. 동생들이 많이 있대. 나한테도 처음에는 아주 친절했어. 그냥, 이건…….”
“네가 사람을 홀리기 때문이라고?”
멜이 창백해진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 애는 내가 자신을 죽이려 들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겁에 질려 변명했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어. 나는, 나는……! 내가 아직 성인이 아니라서 능력을 제어하는 방법을 다 익히지 못해서 그랬던 거야. 그러니까 제발…….”
“그딴 것쯤은 알고 있었어, 멜.”
상냥하게 웃었다.
그렇게나 미워했던 아버지한테도 계속 사근사근 웃으며 대했었는데 이 상황에서 웃는 것쯤이야 정말로 쉬운 일이었다.
다만 단어 선택은 나의 의지를 따라 주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말이야, 그딴 건 정말로 상관이 없었어. 네가 나를 일부러 이 상황에 치닫도록 홀릴 이유가 없다는 걸 아는 것과는 별개로, 네가 내게 그런 능력을 썼다는 것에는 정말로 아무런 관심이 없어. 홀리든, 홀리지 않았든 내 결정은 변하지 않으니까.”
“……네 사랑이 거짓임을 아는데도 나를 가둬 두겠다는 말이야?”
멜이 부들부들 떨며 물었다.
내가 제 뜻대로 행동하지 않자 배신감이라도 느낀 것 같았다.
그 애에게 나의 감정은 이미 거짓이라고 결론이 난 모양이었다.
나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멜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는 조금 겁을 먹은 건지 내게 회유책을 쓰려 했다. 멜이 애처롭게 말했다.
“세르베인. 넌 원래 그런 애가 아니잖아. 네가 날 보지 못하는 때에도 넌 내게 관심을 보였어. 비록 답을 하진 않았지만…… 그건 미안해. 어쨌든 넌 그렇게나 다정하게 편지를 쓰던 아이였잖아. 네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어.”
“…….”
“내게 잔인하게 굴지 마…….”
“……내가 널 보지 못하던 순간에도 편지를 썼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울컥 감정이 치밀어서 그 말을 내뱉었다.
구질구질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여전히 나를 끔찍하게만 여기는 멜의 태도가 너무 아파서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소리를 질렀다.
“정말로 널 보는 것으로 네게 홀린 거라면, 널 보지 않던 순간에도 내 머릿속을 맴돌지는 말았어야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화내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으면서 아버지와 똑같은 짓을 해버렸다.
하지만 이미 터져 나온 소리는 주워 담을 수가 없었다.
죽었다가 살아난 몸뚱이 주제에 목소리는 끈질기게 잘 나왔다.
“너는 이 상황에서도 저 애를 걱정하지? 그런데 내가 죽었다고 저 애가 말한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기지도 않았어?”
“그건 다핀이 나를 속였던 게 아니었어……?”
“너조차 나를 기만하려 들지 마.”
나는 싸늘한 얼굴에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시야가 일렁였다.
“내게 잔인하게 구는 건 너도 마찬가지야. 저 애가 너를 속이려고 거짓말했다면 나를 보고 기절했을 리 없다는 것 정도는 너도 알잖아.”
“하지만 너는 귀족이고 강한 사람이잖아. 이 집안에서 누가 널 해칠 수 있어……? 다핀은 지금 내게 홀려서 정상이 아니라 그럴 수도 있지만-.”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감을 되찾은 몸은 서서히 식어 가고, 정신이 아득해지려 했다.
빨리 저택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약한 모습을 보여 주지 않기 위해 뒤돌아 말했다.
“일단 기다려. 남은 이야기는 나중에 해.”
“세르베인, 그러지 마!”
“……내가 뭘 하는데?”
순순히 나를 놓아줄 것이라 생각했던 멜은 또다시 나를 붙잡았다.
나를 그렇게나 무서워하면서 또 붙잡은 이유가 무엇인지 의아했다.
뒤를 도니 멜이 망설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이 나를 더 화나게 할 것임을 예상했다.
“다핀을 죽이지 마. 네가 귀족이고 저 애는 평민이라고 들었어. 하지만…… 쟤가 저랬던 건 내게 홀렸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다핀을-.”
“……다핀, 다핀, 다핀! 그 이름 좀 그만 말해!”
귀를 막고 소리를 질렀다.
멜이 눈을 크게 뜨고 놀라 내 치맛자락을 놓았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 지르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한낱 하녀의 이름 따위 알고 싶지 않아! 특히 네 입을 통해서는 알고 싶지 않았어!”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목에서 피맛이 나는 것 같았다.
“너, 내 이름을 부르는 건 네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애원할 때뿐이었잖아!”
하지만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이성을 되찾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미, 미안해…….”
멜이 덜덜 떨며 내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호수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면 내가 어떤 짓을 할까 두려웠던 것인지 물속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내가, 내가 잘못했어요…….”
그 푸른 눈동자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푸른 눈이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어머니. 울지 마세요.”
고작 여섯 살이었던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9년이 흘렀음에도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봤던 순간은 잊히지를 않았다.
“아버지가 오늘은 어떻게 했어요?”
“……흑, 아니야……. 세르베인……. 아니란다……. 그런 게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힘들다면 오지 않아도 괜찮아요.”
“…….”
“저는 괜찮아요, 어머니.”
“미안해, 세르베인……. 엄마가 너무 미안해…….”
나는 귀를 막았던 손을 내리고 멜을 바라봤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지 마.”
맥락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나는 대답도 듣지 않고 다시 말했다.
“제발 그러지 마.”
말하면서도 사실 모호했다.
그에게 그러지 말라고 말했지만, 나는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정확히 무엇을 하지 말아 달라는 건지도 몰랐다.
그냥 애원해야 한다는 것만 알았다. 그래서 말했다.
“내가 잘못했어. 네가 바라는 대로 할게. 다핀을 죽이지 말라고? 알겠어. 그렇게 할게.”
“흑…… 흐윽…….”
“또 뭘 해줄까? 무엇을 원해? 바다로 보내 달라는 것 말고는 전부 해줄 수 있어.”
“잘,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그딴 말 좀 지껄이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