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화 (7/132)

7 화

어느 날부터 하녀는 내 의식이 반쯤 잠기어 있을 때만 내게 와 인어의 안부를 전해 주었다.

내 하루의 대부분이 그런 상태였기에 나는 그 말을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오늘은…… 하핫! 그리고……!”

하지만 흐릿한 정신 속에서도 그 하녀의 얼굴이 매우 밝다는 것은 알아볼 수 있었다.

“……듣고 계시는 거예요?”

때때로 그 애는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눈에 띄게 굳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면 이내 다시 밝은 얼굴로 말을 이어 나갔다.

너는 멜과 어떤 시간을 보냈기에 그렇게나 즐거워하는 걸까.

나는 편지를 읽어 주라고 했다.

넌 나의 눈과 입을 대신할 뿐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되었다.

왜 웃는 거야?

한참 웃고 떠든 후 뒤돌아 나가려던 하녀의 팔을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질투심이 샘솟았고, 동시에 멜이 너무 보고 싶었다.

너, 내게는 웃어 주지 않았으면서 그 하녀에게는 예쁘게 웃어 준 걸까.

“그렇다고 해도 화내지 않을게.”

나는 흐릿한 시야로 천장을 바라봤다.

아주 긴 수면이 다가옴을 예측했다.

“난…… 사랑하는 사람에게…… 화내지 않을 거니까…….”

다시 졸음이 찾아왔다.

이상하게도 아프지 않은 어둠이 나를 감쌌다.

정말로 아프지 않았다.

마치 죽음처럼 평온한 잠이었다.

* * *

눈을 떴을 때 나는 내 시야를 가리는 얇고 하얀 천을 걷어내야 했다.

내 침대는 온갖 향초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향초에는 촛불이 켜져 있었다.

창문은 열린 채 스산한 바람이 그대로 들어오고 하늘은 새까맸다.

멜의 피부처럼 아름다운 달빛이 창을 넘어 쏟아졌다.

찬 바람이 얼굴을 스칠 때 나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내가 죽은 줄 알았던 건가.”

내 방은 죽은 자의 방처럼 장식되어 있었다.

놀랍지도 않았다. 잠시…… 정말로 죽었던 것일지도 모르지.

며칠이 지난 걸까. 멜에게 곧 가겠다고 전하라 했었는데.

뻣뻣한 다리를 움직여 침대에서 내려왔다.

내 발이 바닥에 닿자 향초들이 바람에 의해 몇 개 꺼지고 말았다.

저벅저벅.

향초의 경계를 지나자 이제는 흰 꽃들의 경계가 나타났다.

나는 죽음을 암시하는 물체들을 지나쳐 방문을 열었다.

달칵.

“……아무도 없군.”

그 어떤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은 새벽인 모양이다.

나는 아침이 될 때까지 침대에 누워 있을까 생각하다가 이내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는 참을 만했다.

“오늘은 정말 너를 만나러 가야지. 곧 만나러 가겠다고 한 약속은 지켜야 하니까…….”

이번에는 두껍게 옷을 차려입었다.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게 거울을 보고 머리도 빗었지만 큰 차이는 없어 보였다.

준비를 끝낸 후 나는 작은 등을 쥐고 저택 밖으로 나섰다.

이렇게나 늦은 시각에 홀로 호수로 향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밤이라 그런지 숲속은 매우 어둡고 추웠고 스산했다.

쏴아아-.

바람이 불며 나뭇가지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수백, 수천 개의 나뭇가지와 얇은 잎들이 마찰하며 나오는 소리는 마치 사람들의 대화 소리 같았다.

“……봐. 얼른!”

……아니. 그건 정말로 사람의 목소리였다.

저벅저벅

나는 작게 들리는 여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방금 생과 사를 넘나들었으니 귀신일지도 모르지만 별로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멈칫.

나는 호수를 눈앞에 뒀으면서 커다란 나무 뒤로 숨었다.

호수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나는 그 사람에게 내 존재를 들킬까 봐 가지고 있던 등의 불빛 역시 꺼버렸다.

그곳에 있던 존재는 귀신 같은 게 아니었다.

“얼른 나오라니까?! 안 들려?!”

첨벙!

“나올 때까지 돌을 던질 거니까 그렇게 알아!”

그곳에 있던 사람은 내가 멜에게 편지를 읽어 주라고 보냈던 하녀였다.

“요 며칠간 왜 나오질 않는 거야!”

그 애는 호수에 돌을 집어 던지고 있었다.

아무리 세게 던져 봤자 물에 들어간 돌이 그 안에 있을 존재를 상처 입힐 만큼 치명적이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연히 물 밖으로 나오던 멜이 맞는다면 치명적일 것이다.

당장 저 손목을 꺾으러 가야 할 듯했다.

‘그나저나 이 시간대에 왜 제멋대로 멜을 만나러 온 거지?’

화가 났지만 스트레스를 받으면 쓰러지는 게 다반사인 약해 빠진 몸을 고려해 분노를 억눌렀다.

찰랑.

“……다핀?”

그때 작은 물소리와 함께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오랜만에 들어서, 하지만 그 오랜만에 듣는 말이 타인의 이름이었기에 울컥 화가 났다.

멜이 내 이름을 불러 준 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그는 심지어 죽음의 위기가 다가왔을 때에도 내 이름을 부르려다 그만두었다.

그랬으면서 저 하녀에게는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는 모습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넌 내 거잖아.”

작게 중얼거렸다.

역시 하녀 따위 보내는 게 아니었다.

네가 얼어 죽을까 봐 바다로 보내 줄 걱정 따위 해서는 안 되었다.

“넌 그냥 계속 내 수조에 있어야 했어. 죽든지 말든지. 죽더라도 내 눈앞에서 죽어야 했어. 그랬으면 아무와 놀아나는 일 따위는 없었을 테니까.”

그때 멜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 시간에 왜 온 거야?”

멜의 목소리는 살짝 겁에 질려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는 이성을 되찾았다.

아무래도 멜이 원하던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는 멜을 탓해서는 안 된다.

흐릿해지려는 초점을 붙잡기 위해 관자놀이를 눌렀다.

“하하하하!”

갑자기 하녀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내가 사경을 헤맬 때 몇 번이나 환청이라 치부했던 웃음소리였다.

다핀은 희열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기억하니? 드디어 그 여자가 죽었어!”

“……뭐?”

“세르베인 녹시렐! 그 여자가 죽었다고!”

악에 받친 목소리가 숲을 울렸다. 이내 정적이었다.

뚝뚝, 멜의 머리칼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있기로 했다.

당장 나를 기만한 저 하녀의 목을 치러 갈 수도 있겠지만 가만히 있었다.

멜은 저 애와 무슨 약속을 했던 걸까.

멜도 저 애처럼 나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쓴웃음이 나왔다.

그렇지. 그게 정상이지.

만약 멜이 기뻐한다면, 나의 죽음을 기점으로 어떤 약속이라도 했더라면…….

“그래도 넌 못 가.”

그런 생각을 한 게 밉긴 하지만 그게 널 죽일 이유는 되지 못한다.

죽이지도, 널 보내지도 못한다.

어차피 언젠가는 다가올 이별이라 해도, 지금은 내 곁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말이야……? 세르베인이 죽었다니?!”

멜은 제가 위험에 처할 것도 생각지 못하고 다핀에게 가까이 헤엄쳐 가며 물었다.

“그래서 편지를 쓰지 못했던 거야? 그 애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설마…… 네가 죽인 거야?”

“……그랬다고 하면? 만약에 내가 그랬다고 하면 넌 기뻐해야지. 그 여자가 죽으면 널 바다로 보내 주겠다고 했잖아!”

“사람이 어떻게 같은 사람에게 그럴 수가 있어!”

멜이 화를 냈다. 처음에는 화를 내다가, 곧 울먹이기 시작했다.

정말로 너무 끔찍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상처받은 목소리였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

이상하다.

아무래도 난 정말 죽었던 게 아닐까. 이런 일이 현실일 리 없다.

하지만 현실이었다. 멜이 나의 죽음에 대해 화를 내고 있었다.

도대체 너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걸까.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생각해 보니 멜은 사람이 아니다. 그는 인어다.

너무 순수해서, 저를 가두었던 사람에게 심한 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짓기만 하던 그런 바보 같은 인어다.

“닥쳐! 그런 못된 인간이 죽었는데 넌 왜 그런 반응인 거야!”

“세르베인은…… 내게 나빴긴 하지만…… 정말로 나쁜 아이는 아니야. 누군가에게 살해당할 만큼,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

“너 바보야? 꼬리가 물고기라서, 정말로 지능도 그 정도인 거야? 설마 그 여자가 너한테 편지 몇 조각 적어 보냈다고 용서한 건 아니지?”

“그 애는 내게 편지를 보내며 다정하게 대하려고 했어…….”

“그 사탕발림들이 진심이라고 생각해?! 진짜 멍청하기 짝이 없구나!”

멜은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가 내심 내 편지가 거짓이라고 생각했기에 답하지 않았던 걸 수도 있었다.

속이 쓰려 올 때쯤 멜이 답했다.

“아마 진심이었을 거야. 원래 잔혹한 성품이 아니었던 거야.”

“…….”

“내가……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거야……. 내가 능력을 제어하지 못해서. 그런 애를 네가 해친 거라고…….”

멜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능력이라. 그는 정말로 사람을 홀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일까. 그는 착각하고 있었다.

첫째, 그런 능력이 없어도 멜은 사랑스러운 존재가 분명했다.

그 다정하고 여린 성품은 변함이 없었다.

둘째, 나는 원래 그런 성정을 가졌다…….

빌어먹을 녹시렐 공작가는 대대로 정신병을 가진 가주들로 유명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나 역시 정상은 아니었다.

나는 멜을 사랑한다.

홀리게 되어서 생긴 감정이 사랑이든, 사랑해서 홀리게 되었든 무슨 차이가 있을까. 내게는 같았다.

그때 다핀의 희열에 찬 목소리가 내 상념을 깼다.

“내 알 바 아니야. 어차피 죽었는걸. 내 손을 더럽히지도 않았어. 원래 죽을 인간이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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