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화
미친 사람은 힘이 세다는 말이 있다.
힘이 세다는 것은 건강과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말이 아닐까.
이틀 만에 눈을 뜬 내가 전속력으로 뛸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정신력 덕분이었다.
타다닥!
“아가씨! 기다리세요!”
미친 사람처럼 숲을 향해 달렸다.
두꺼운 옷으로 갈아입을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데려다줄 테니 차라리 업히라는 하인들을 무시하고 무작정 뛰쳐나왔다.
“허억, 헉……!”
어느새 신발이 벗겨져 있었다.
돌조각들과 나뭇가지를 밟으면서도 아픈 줄을 몰랐다.
“악!!”
그때 내 귀에 내리꽂히는 비명 소리가 있었다.
원치 않게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빨리 끌어내!”
“살, 살려 주세요…….”
멀리서 그물에 걸린 멜이 땅 위로 끌려 나와 몸부림치는 모습이 보였다.
“제, 제발, 누가 좀……!”
멜이 덜덜 떨며 정신없이 주위를 살펴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아무도 자신을 돕지 않으리란 걸 않고 절망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멜과 눈이 마주쳤다.
멜이 나와 눈을 맞추느라 저항을 멈춘 순간, 아버지의 기사 중 한 명이 멜의 목에 검을 가져다 댔다.
그때까지도 멜은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원망하면서도, 동시에 도움을 요청할 만한 사람이 나밖에 없기에 스스로 무너져 내린 얼굴이 보였다.
멜이 덜덜 떠는 몸으로 내 이름을 부르려 했다.
“아…… 세…… 세르…….”
그 표정이 왜 눈에 밟혔는지는 모르겠다.
울던 모습도, 고통에 몸부림쳐 비명을 지르는 모습도 별로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나는 그 애가 내 이름을 부를 때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내 기대와 달리 멜은 주저하더니 결국 내 이름을 부르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내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보다 죽는 게 낫다는 뜻이야?’
머리끝까지 화가 솟았다.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화가 났는데, 네가 바라던 대로 차라리 죽으라고 내버리고 싶은데 동시에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덜덜 떠는 멜의 하얀 몸이 보였다.
검이 멜의 목에 옅은 선을 내기 시작할 때가 되어서야 목소리가 나왔다.
“손목 잘라 버리기 전에 멈춰.”
“……세르베인?”
아버지가 나를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나를 나가게 둔 하인들에 대한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도대체 어떻게 네가 여기에 나온 거지?”
“내 인어에게 손대지 마세요.”
아버지에게 대놓고 반항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피부 곳곳에 생채기가 나 핏물이 맺힌 멜을 보니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저벅저벅.
나는 멜의 앞을 막아서고 기사에게 말했다.
“검 치워.”
“아가씨. 이건 공작님께서-.”
“……아. 나보고 직접 하라고?”
내가 싱긋 웃으며 맨손으로 검 날을 잡으려 하자 기사가 당황하며 검을 거두었다.
늘 내가 침대 위에 앉아서 웃는 것만 봤을 아버지는 혼란스러운 눈빛을 하다 이내 무표정을 되찾고 말했다.
“세르베인, 어서 집으로 돌아가거라. 나는 오늘 저 인어를 처리해야겠어.”
“제게 인어를 준 건 아버지입니다. 갑자기 이러시는 이유가 뭐예요?”
“네 건강을 위해 저 인어를 들였건만 네 건강은 나빠지기만 했는데 정말로 몰라서 묻느냐? 아무리 희귀해도 저런 것을 내 집에 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아버지가 멜에게 경멸하는 눈빛을 보냈다.
가뜩이나 육지로 끌려 나와 고통스러울 멜은 그 시선에 덜덜 떨기 시작했다.
나는 아버지가 멜을 보지 못하게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제 몸이 아팠던 건 외출을 했기 때문이고, 외출 역시 제가 굳이 인어를 호수로 보내겠다고 해서 생긴 일입니다. 인어의 잘못이 아니라고요.”
“네가 그런 행동을 하게 한 것 역시 저 인어가 너를 홀린 탓이지.”
멜이 나를 홀릴 만큼 아름다운 건 맞다. 실제로 홀린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인어는 나를 홀릴 마음이 없었다.
나를 홀리게 해봤자 돌아오는 건 해수에 살던 자신을 담수에 처넣는 것뿐일 텐데 왜 나를 홀리려 하겠는가.
아버지가 단호하게 말했다.
“세르베인, 빨리 비키거라. 네가 저 인어를 죽이길 원치 않는다면 목숨을 살려 주긴 하마.”
“네?”
혹시 바다로 돌려보낸다는 것인가.
저절로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인어는 반대로 표정이 조금 밝아지려 하는 게 보였다.
‘감히, 그딴 게 가능할 줄 알아?’
기가 차서 헛웃음을 지으려 할 때 아버지가 이어 말했다.
“이때까지 정을 생각해 목숨을 붙여 두고 다른 곳으로 팔아넘기지. 그러면 됐느냐?”
“……정을 생각해 남에게 넘긴다고요?”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 굉장히 자비로운 처사란 걸 알거라.”
어이가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진심으로 자신이 자비를 베푼다고 생각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모두 죽여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웃었다.
……웃어야지. 어머니가 말했잖아.
아버지가 아무리 미워도 겉으로는 웃으라고. 그게 자식의 도리라고.
눈동자가 뒤로 돌아갈 것 같은 기분에도 바들바들 떨리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렸다.
하지만 말은 공손하게 나오지 않았다.
“지금 제 것을 빼앗으려는 거예요?”
“뭐?”
“아버지는…… 어머니가 사랑했던 사람이니 어쩔 수 없지만 다른 사람들이 내 인어를 탐내면 전부 눈을 뽑아 버릴 거예요.”
미처 뇌를 거치지 않고 말이 나왔다.
“내 인어를 만지면 손을 잘라 버릴 거고, 산다고 말하면 혀를 잘라 버릴 거예요. 아무도 사지 못하고 아무도 죽이지 못하게 할 거예요.”
“…….”
“이번에는 절대로 그냥 못 뺏겨요. 내 것이니까요.”
나는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웃었다.
이미 한차례 빼앗긴 적이 있기에 독기 서린 목소리가 나왔다.
“뺏으면 죽어서도 저주할 거예요.”
* * *
인어는 무사히 호수로 돌아갔다.
죽지는 않았으니 무사하다고 말하겠다.
아버지와 기사들은 먼저 떠났고, 나를 데려가기 위한 하인 몇 명만 호수와 꽤 떨어진 위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호숫가에 쭈그려 앉아 멜을 바라봤다.
처음으로 멜에게 사과를 했다.
“……미안.”
왜 내 이름을 부르려다 말았느냐고 윽박지르지 않았다. 사실은 이유를 알았으니까.
멜에게는 저를 죽이려던 기사들이나, 저를 가두고 호수에 내던진 나나 똑같을 것이다.
호수에 들어간 멜은 얼굴만 빼꼼 내밀어 나를 바라봤다.
멜의 표정은 이상했다. 그는 복잡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게는 그 파란 눈동자에 담긴 의문들이 사랑스러워 보이기만 했다.
손을 뻗어 멜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멜은 내 손길을 피하지 않고 물었다.
“무엇에 대해 사과를 하는 거야?”
“이틀 전에 오겠다고 했는데 못 온 거.”
그 말에 멍한 표정을 짓던 멜이 화를 참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를 가둬서 미안하다는 게 아니구나.”
“당연하지. 나는 널 가둔 것을 후회하지 않는걸.”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하며 멜의 뺨을 쓰다듬었다.
생채기가 난 곳은 따가울 것 같아서 만지지 않았다.
멜이 화가 난 표정을 지었지만 멈추지 않고 말했다.
“그러니까 그것에 대해서는 사과할 수 없어.”
멜은 지금쯤 뻔뻔하고 사악한 인간에 대해 환멸감을 느끼고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멜이 더 화를 낼 것을 알아도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이제 멜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단조롭게 말했다.
“내가 사과를 하고 그 행동을 후회한다면, 너를 바로 돌려보내 줘야 하는 게 맞는 거잖아.”
타악!
멜이 내 손을 쳐냈다.
반사적으로 한 행동 같았다. 왜냐하면 아주 순간적으로 그 얼굴 위에 두려움이 스쳐 간 것이 보였다.
분명 내 손을 쳐낸 것에 대해 어떤 처벌을 받을까 무서웠던 거겠지.
나는 아무런 분노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자 멜은 조금 두려움이 가셨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말만이라도 미안하다고 하면 안 돼?!”
“…….”
“말만이라도 미안하다고, 나를 동등하게 여기는 시늉이라도 해주면 안 돼? 어차피 네가 나를 장식품이나 애완동물 정도로 여기는 걸 알고 있어!”
멜은 씩씩거렸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아무 표정도 없이 그 모습을 바라봤다.
화를 내지도, 반박하지도 않았는데 내 얼굴을 본 멜은 갑자기 덜덜 떨기 시작했다.
“제발 나를 놓아줘. 네 방을 장식할 장식품으론 다른 것들도 많잖아. 나는 장식품이나 애완동물이 아니란 말이야…….”
처음에는 화를 내던 것으로 시작했던 말이 마지막에는 애원으로 끝났다.
그 모습이 비참하고 애처로워 보이면서도 사랑스러웠다.
말을 쏟아 낸 멜은 숨이 가쁜 듯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공기 중으로 직접 호흡을 하는 것이 익숙지 않아 보였다.
그건 평생 그 애와 나 사이에 존재할 차이였다.
나는 다시 멜에게 손을 뻗지 않고 그 얼굴에 생긴 작은 생채기를 바라보기만 했다.
상처에 물이 닿으면 더 아플 텐데. 그렇다고 인어를 물 밖에서 지내게 할 수는 없겠지.
천천히 눈으로는 멜을 담고, 머리로는 멜의 말에 대해 생각했다.
장식품이나 애완동물이라. 멜의 말에는 큰 오해가 있었다.
말해야 할까. 말하지 말까.
자존심을 챙긴다면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 인어에게도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고민 끝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