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장. 귀향(歸鄕)
제신의 혼례일이 정해졌다. 다음 달 보름. 남은 날을 따져 보면 상당히 급한 일정이었다.
제신은 신부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날부터 잡는다며 투덜거렸지만, 최대한 빠르게 일을 진행하려는 백부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백부가 얼마나 제 혼사에 신경 쓰고 있는지를 뻔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나도 제신의 혼례를 준비하느라 바빠졌다. 부모님께서 살아계셨다면 그분들이 혼례를 맡아 주셨을 것이나, 제신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나 하나뿐이었다. 백부께서 많은 부분을 도와주셨지만 나도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다행히도 고구려의 혼례는 무척이나 간소한 편이어서 내가 고심할 부분은 많이 없었다. 집안의 어른들과 친분을 쌓은 귀부인들도 많은 도움을 주어 고민이 생겨도 금세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신이 살 집을 구하는 일이 내 머리를 아프게 했다.
지금 제신은 백부의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는데, 혼인을 하면 독립하여 새살림을 꾸려야만 했다. 북부 절노부 영토에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제신은 태학박사로서 국내성에 머물러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니까 번듯한 저택이 필요하단 말이지.
사람들은 그 사람이 어디에 사는지로 그의 지위나 권세를 가늠한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제신이 어느 누구에게도 무시받지 않을 좋은 집에서 살기를 바랐다. 사실 제신이 어디에 살든 황후의 오라비를 우습게 볼 사람은 없을 테지만, 그래도 나는 그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집을 구해 주고 싶었다.
제신의 혼례는 내게 얼마 없는 기회였다. 늘 받기만 한 사람에게 나도 무엇인가를 베풀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좋은 집을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좋은 집이라는 게 내 눈에만 좋은 것이 아닌지라 웬만한 저택은 이미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궁궐에 가까울수록 좋긴 한데 그쪽에 있는 집들은 전부 주인이 있고…….
궁궐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눈을 돌리면 그나마 쓸 만한 곳들이 비어 있었다.
나는 국내성 사정을 잘 아는 운에게 부탁해 괜찮은 집을 몇 군데 꼽아 두었다. 친우의 혼례 준비에 나만큼이나 들뜬 운은 적극적으로 저택 물색을 도와주었다.
“생각하신 것처럼 궁궐 근처의 저택은 힘들 것 같습니다. 드물게 비어 있는 곳도 있긴 한데…… 그런 곳들은 아무래도 소문이 좋지 않은 곳이라서요.”
운은 자신이 알아 온 저택의 목록을 내게 보여 주며 설명을 시작했다.
“어떤 소문인데요?”
“그 집에 살았던 사람들이 전부 병으로 죽었다거나, 귀신인지 도깨비인지 모를 놈이 나온다거나. 그런 소문들이죠.”
“오랫동안 빈 집에 으레 따라붙는 소문들이네요.”
“그렇습니다. 뭐, 소문은 소문일 뿐이고, 그런 것에 연연할 필요는 없겠지만…… 대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신혼살림을 굳이 그런 흉흉한 곳에서 시작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죠.”
운의 말이 맞았다. 그런 소문을 모두 믿는 건 아니지만 굳이 찾아갈 필요도 없다.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며 운이 목록에 적힌 곳들 중 세 곳을 차례로 짚었다.
“위치나 규모로 볼 때 이곳이나 이곳이 적합해 보입니다. 아니면 이곳도 훌륭하고요.”
운의 손을 따라 눈을 돌리니 저택에 대한 정보들이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설명만 봐서는 모르겠어요. 직접 보고 결정해야 할 것 같은데.”
“직접 살펴보는 건 어렵지 않지만…… 요즘 안팎으로 어수선한 일이 많으니 한동안 외출을 자제하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요.”
주변 분위기가 어수선한 것은 사실이었다. 궁 안에는 담덕의 안녕을 위한 기원제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고, 궁 밖에서는 해서천이 귀향 준비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들로 외출을 자제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지금 조심해야 할 사람은 담덕이지 내가 아니었다.
“들었어요. 고추가께서 고향으로 돌아가신다면서요.”
“이제는 고추가가 아니시죠. 자리를 모두 내려놓으셨으니.”
“하지만 다른 호칭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 걸요. 그분은 그냥 고추가 같아요.”
“워낙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셨으니까요.”
운이 그렇게 말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미묘한 표정에서 드러나는 그의 심경이 상당히 복잡해 보였다.
하긴. 마음이 복잡할 수밖에 없겠지.
누가 뭐래도 해서천은 운의 아버지였다. 그간 제 아버지가 행한 일들을 모두 알고 있다 하더라도 부자(父子)의 정을 완전히 끊어 내는 건 힘들 터였다.
“시간이 많은 걸 해결해 줄 거예요.”
나는 담담하게 운을 위로했다.
시간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인간이 안고 있는 문제의 대부분은 시간이 해결해 준다. 아버지를 잃었던 나의 슬픔이나 다로를 향한 원망, 해서천을 향한 분노도 시간이 해결해 주었다.
“지금 운 도령이 지니고 있는 고민들도 시간이 지나면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질걸요. 10년만 지나 봐요. 내가 그때 그런 일로 고민하고 괴로워했다니 말도 안 돼! 그런 생각을 할 게 분명해요.”
“그렇다면 좋겠지만…….”
“분명 그럴 거라니까요.”
나는 나를 구원한 시간이 운의 마음에도 닿기를 바라며 웃었다.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던 운의 얼굴에도 나를 따라 작은 미소가 걸렸다.
“신기하군.”
“뭐가요?”
“연우희 네가 말하니 정말 그렇게 될 것 같아서.”
황후 연우희가 아니라 친구의 누이 연우희에게 하는 말이었다.
“네가 어떤 터무니없는 말을 해도 믿을 수밖에 없다니. 나도 참으로 우스운 놈이군.”
운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픽 하고 웃었다. 그렇게 웃음을 흘린 뒤 다시 나를 바라보는 운의 얼굴에 평소와 같은 생기가 돌아와 있었다.
“폐하께 말씀 올리고 근위대를 준비시키겠습니다. 어차피 폐하께서도 마마의 외출을 막지 못하실 테니까요.”
* * *
운의 예상대로 담덕은 나의 외출을 막지 않았다.
그것까지는 좋았는데…….
“왜 너까지 여기에 있는 거야?”
나는 당당히 내 옆에 선 담덕을 보며 입을 벌렸다. 호위를 위해 근위대원을 붙이는 것은 당연했지만, 그렇게 찾아온 대원들 사이에 담덕이 있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나도 오랜만에 바깥 공기나 마실까 싶어서.”
“누가 들으면 매일 집무실에만 틀어박혀 있는 줄 알겠네. 얼마 전에는 아이들과 사냥도 다녀왔잖아?”
“그건 연이가 가고 싶다고 해서…….”
빠르게 변명을 덧붙이던 담덕이 곧 미간을 찌푸리며 팔짱을 꼈다.
“분명히 네게는 비밀로 하자고 약속했었는데.”
“연이와 승평은 착한 아들이라 내게 비밀을 만들지 않거든. 궁으로 돌아오자마자 내게 찾아와서는 멧돼지를 두 마리나 잡았다고 자랑하던걸.”
“……이놈들이.”
담덕이 배신감에 가득 찬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아이들이 저를 배신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듯했다.
“기원제가 마무리될 때까지만 얌전히 지내라는 게 그리 힘든 부탁이야?”
“이럴 때일수록 더 평소처럼 움직여야지. 괜히 움츠러들었다가 오히려 화를 당한다니까.”
“핑계는 좋지.”
내가 눈을 가늘게 뜨며 담덕을 흘겨보자 그가 웃으며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걸음을 재촉했다.
“이러다 해가 떨어지겠다. 볕이 좋을 때 저택을 봐 둬야지?”
이미 함께 가기로 마음먹고 나온 모양이니 돌아가라고 말해 봐야 소용없었다. 그나마 근위대원들을 평소보다 많이 데려온 것이 위안거리였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담덕을 따라 걸었다. 그러자 우리의 실랑이를 지루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던 운이 나서서 길을 안내했다.
“어째 두 분은 변하질 않으십니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요.”
운의 말에 태림도 동의한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릴 때부터 우리를 봐 왔던 두 사람이 같은 반응을 보이니 여간 민망한 게 아니었다.
“이러다 해 떨어진다고 했던 거 못 들었어요? 어서 집이나 보러 가요.”
나는 헛기침을 하며 담덕이 했던 말을 다시 운에게 돌려주었다.
그러자 운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근위대원들에게 눈짓했다.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었는지 그의 신호를 받자마자 대원들이 거리를 두고 우리를 호위하기 시작했다. 우리 곁에 남은 사람은 운과 태림뿐이었다.
그렇게 호위 인원을 흩어 놓았는데도 우리 일행은 제법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보기 드물게 훤칠한 장정 셋이 한 번에 몰려다니니 어쩔 수가 없었다.
담덕과 운의 외모는 하도 많이 찬양해서 입이 아플 지경인 데다 태림도 상당한 훈남이었다.
사실 궁 안에서도 성격이 서글서글한 미남 근위대장과 과묵한 고구려 최고의 용사 태림, 두 사람을 남몰래 흠모하는 궁인들이 많았다.
여기저기서 궁 안의 소문을 잘 물어 오는 달래는 궁인들이 근위대장파와 태림파로 나뉘어 은근히 신경전을 벌이기도 한다며 내게 알려 주었다.
그러면서 자기는 근위대장파라고 진지하게 덧붙였었지.
쓸데없이 비장하던 달래의 얼굴이 떠올라 웃고 있는데, 세 사람은 자신들을 향한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하게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까 봐 마차를 타지 않은 건데, 이래서는 마차를 포기한 의미가 없잖아.
이미 늦은 후회였다. 나는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앞장선 운을 따라 걸었다.
그렇게 부지런히 움직여 우리는 미리 꼽아 둔 세 곳의 저택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궁에서 가깝지만 크기가 상당히 작은 저택이었다. 두 사람만 살기에는 적당했지만, 후에 아이가 생겨 식구가 늘어날 것을 생각하면 좁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두 번째로 찾은 곳은 외곽과 궁궐 중간 지점에 위치한 저택이었다. 빈집임에도 관리가 잘되었는지 건물이 아주 깨끗했지만 저잣거리와 가까워 어딘가 어수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외곽에 가까운 저택이었다. 셋 중 궁궐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었지만, 그만큼 조용한 데다 규모가 컸다.
세 곳을 모두 둘러보면 금세 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오히려 고민이 더 깊어졌다. 세 곳의 장단점이 뚜렷해서 어느 것 하나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이곳이 제일 마음에 드는데. 정원이 멋지잖아.”
담덕이 고민에 빠진 나를 향해 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찾은 저택의 정원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회랑에 걸터앉아 풍경을 살피고 있었다.
“난 내가 언젠가 이런 집에서 가정을 꾸릴 줄 알았어. 아주 어렸을 적에 말이야.”
선대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 평범하게 살았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나는 옛날 생각을 하는 담덕의 곁에 나란히 앉아 그가 바라보는 정원으로 눈을 돌렸다.
“사실은 나도 그랬어.”
조용히 말하자 담덕의 시선이 내 뺨에 닿았다. 나는 눈을 감고 한때 내가 꿈꾸었던 미래를 그려 보았다.
“조용한 저택에 소담스러운 정원이 있어. 연못에는 물고기가 살지. 그 옆에는 커다란 나무가 있는데, 이건 아이가 태어났을 때 심은 거야. 아이가 자라는 만큼 나무도 같이 자라. 커다란 그늘 아래 낮잠을 자도 좋고, 가지에 그네를 묶어 타도 좋아.”
“그런 소박한 꿈을 꾸기엔 궁궐이 너무 크지.”
웃음 섞인 담덕의 목소리에는 묘한 아쉬움이 섞여 있었다. 나는 눈을 떠 담덕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미소가 그려졌다.
“너는 태왕이 될 줄 몰랐고, 나는 대단한 사내를 사랑하게 될 줄 몰랐지.”
“그래서 싫어?”
“그렇다고 하면 놓아주려고?”
“놓아주기엔 너무 늦었지.”
담덕이 나를 타박하며 손가락으로 가볍게 내 이마를 툭 쳤다. 불만스러운 눈으로 담덕을 보니 그가 픽 웃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언젠가 가능하지 않을까?”
“뭐가?”
“조용한 저택에 소담스러운 정원 말이야.”
담덕의 시선이 다시 정원으로 향했다.
“조금 더 나이가 들면 그런 곳에서 살자. 이 땅에 평화가 찾아오고, 연이가 왕좌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자라면…… 그때는 가능하겠지.”
중간에 연에게 양위를 하고 왕위에서 내려오겠다는 뜻인가?
담덕은 간단한 일처럼 말했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말로 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다.
풍경은 고요하고 앉은 자리는 아늑하니 찰나의 안온함에 취해 꿈꾸기 좋지 않은가.
그때 고요함을 깨뜨리는 미묘한 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나는 소리를 따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아슬아슬하게 처마 끝에 걸린 기와가 조금씩 아래로 밀려 내려오고 있었다.
오래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집이라 보수가 필요한 부분이 많구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다시 아래로 시선을 돌린 순간 결국 기와가 아래로 떨어졌다.
그런데 기와의 방향이 미묘했다. 떨어지는 기와 끝에 정원을 빤히 보고 있는 담덕이 있었다.
이대로 기와가 떨어지면……!
나는 놀라서 담덕의 이름을 외쳤다.
“담덕!”
동시에 담덕의 옷깃을 잡아당기자 정신을 놓고 정원을 바라보던 그의 몸이 가볍게 내 쪽으로 끌려왔다.
담덕의 몸이 뒤로 끌려오자마자 그가 서 있던 자리에 기와가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기와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 났다.
나와 담덕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운과 태림이 순식간에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걱정스럽게 묻는 태림의 목소리에 담덕이 내 얼굴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괜찮은데…….”
나를 보는 담덕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우희. 많이 놀랐어?”
“당연히 놀라지!”
나는 아직도 놀라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하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전쟁터에서 날고 긴다는 사람이 머리 위에서 뭐가 떨어지는지도 몰라? 맞았으면 큰일 났을 거야.”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그래도 머리 가까이 왔다면 피할 수 있었을 거야. 이런 반응은 빠른 편이니까.”
“그걸 어떻게 장담해? 완전히 넋을 놓고 있던데 뭐.”
나는 바닥에 떨어진 기와 조각을 보며 담덕의 옷깃을 꽉 쥐었다. 저 기와가 그대로 담덕의 머리에 떨어졌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누가 일부러 떨어지게 한 건 아닌 듯합니다. 인위적인 손상 흔적은 없더군요.”
그사이에 기와를 살펴보고 온 것인지 운이 차분하게 말했다.
누군가 담덕을 다치게 하려고 일부러 손쓴 것이 아니라니.
누군가의 음모가 아니라는 사실에 한시름 놓아야 할지, 누가 손쓰지 않았는데도 크게 다칠 뻔한 불운에 긴장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별의 빛은 곧 명(命)과 세(勢)를 뜻합니다. 그러니 그 빛이 희미해졌다는 것은…….
깨진 기와를 바라보는 귓가에 불길함을 속삭이던 제관의 목소리가 아른거렸다.
* * *
나는 일부러 제단의 등불을 확인하지 않았다. 제관의 예언을 비웃기라도 하듯 멀쩡하게 살아 있는 불길을 본다면 마음이 놓일 테지만, 그 반대라면 불안함에 평소와 같은 일상을 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제관의 말을 머릿속 한구석에 밀어 넣기 위해서는 정신없이 몰두할 일거리가 필요했다.
담덕이 전쟁터에 나가 있는 동안 만들기 시작한 도감은 좋은 일거리가 됐다. 아이들과 함께 체스를 두며 담덕을 이길 수를 고민하는 것도 시간 보내기에 좋았다. 거기에 제신의 혼례 준비까지 더하니 나는 적당히 바빠졌다.
제신에게 선물할 집은 두 번째로 살펴보았던 저택으로 정했다. 세 번째 저택도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기와가 떨어지는 불길한 일을 겪고 나니 그다지 좋은 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선물할 집을 마련한 뒤 사람을 시켜 보수하고 적당히 세간을 채워 놓으니 하루라도 빨리 제신에게 저택을 보여 주고 싶어졌다.
누이에게 집을 선물받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있겠지?
놀라면서도 기뻐할 제신의 얼굴이 벌써부터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얼굴을 생각하니 오래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제신을 만나기 위해 직접 태학으로 향했다. 궁인들이 빠르게 내 뒤에 따라붙었으나, 조용히 다녀올 생각으로 달래만 남겨 두고 모두 물렸다.
태학에 도착하니 강의가 한창이었다.
“애공이 재아에게 지신의 신주에 대해 묻자 재아가 답하기를, 하후씨이송(夏后氏以松), 은인이백(殷人以柏), 주인이률(周人以栗), 왈사민전률(曰使民戰栗)이라 하였다.”
제신은 귀족 아이들 앞에 서서 진지한 얼굴로 유학을 강설(講說)하고, 아이들은 그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이들 중에는 연도 있었다. 연은 제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듣고 심각한 얼굴을 했다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했다.
“하후씨는 소나무를 썼고, 은나라 사람은 측백나무를 썼고, 주나라 사람은 백성이 두려워하게 하려고 밤나무를 썼다는 말이다. 재아는 어찌 이런 말을 했을까?”
제신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연이 입을 열었다.
“밤나무 율(栗)과 떨릴 율(慄)의 발음이 같다는 것에 주목한 재아가 신주의 의미를 임의로 해석한 것입니다.”
연의 대답에 제신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이 제대로 해석했다는 뜻이었다.
“하면 이를 전해 들은 공자가 무어라 말했는지도 아십니까?”
“성사불설(成事不說), 수사불간(遂事不諫), 기왕불구(旣往不咎)라 하였습니다.”
“그 뜻은 무엇입니까?”
“완성된 일은 거론하지 않고, 끝난 일은 간언하지 않고, 과거는 탓하지 않는 법이라는 말입니다. 재아의 해석이 틀렸지만 이미 지난 일이니 나무라기 힘들다는 뜻이지요.”
신라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라 서책을 하나둘 읽던 연은 또래들보다 빨리 글을 습득했다.
단순히 글만 읽을 줄 아는 게 아니었다. 연은 지금처럼 서책에 담긴 의미까지 빠르게 알아차리는 총명한 아이였다. 고구려로 와 제대로 된 교육을 받기 시작하자 금세 그 총명함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제신과 연의 대화를 듣느라 멈춰 선 나를 보며 달래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들어가지 않으십니까?”
기세 좋게 태학에 들어설 때는 언제고 이제 와 전각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내가 이상한 모양이었다.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아. 강의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겠다.”
내 말에 고개를 배꼼 내밀고 강의하는 모습을 살핀 달래가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달래가 보기에도 쉽게 깨뜨리기 힘든 진지함이 느껴진 것 같았다.
나는 강의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주변을 살폈다.
태학은 내게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북부 절노부를 떠나 국내성에 왔을 때 처음으로 온 장소도, 담덕을 처음으로 만난 장소도 모두 태학이었다.
그때만 해도 내가 담덕과 혼인해 고구려의 황후가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어느새 나와 담덕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자라 태학에서 강의를 듣고 있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게 인생이라더니.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제신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누이에게 활 쏘는 걸 가르치며 투덜거리던 작은 소년이 번듯한 청년이 되어 태학박사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어쩐지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 시절의 내가 상상했던 미래에 지금 같은 모습은 없었다.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던지 이어지던 제신의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던 제신의 시선이 어느새 나를 향해 있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평소보다 커진 눈으로 나를 보는 제신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로 하자.”
제신이 서둘러 강의를 마무리했다.
예정보다 일찍 끝나는 수업은 어느 시대에나 학생들의 기쁨이었다. 아이들은 밝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제신에게 인사하고 전각을 빠져나갔다.
“어?”
아이들과 섞여 전각을 나서던 연이 나를 보고 제신과 똑같은 얼굴을 했다.
금방 달려올 줄 알았던 연이 아이들과 나를 번갈아 보며 머뭇거렸다. 조용히 태학을 찾은 나를 아는 척해도 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나는 웃으며 연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그러자 연이 금세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 앞으로 달려왔다.
“어머니!”
“연아.”
나는 몸을 낮춰 연과 눈높이를 맞추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참 무릎을 굽혀야 했는데, 이제는 키가 훌쩍 자라 선 채로 허리만 조금 숙여도 충분했다.
“어찌 여기까지 오셨어요?”
“네 외숙을 만나러 왔지.”
“에이. 전 저를 보러 오신 줄 알았는데.”
실망해서 입을 비죽하는 연의 뒤로 제신이 다가왔다.
“날 보러 왔다고?”
“응. 줄 것이 있어서.”
“줄 것? 내가 네게 받을 것이 있었나?”
제신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줘. 주려고 했던 거.”
나는 내 앞에 내밀어진 제신의 손을 보며 픽 웃었다. 내가 준비한 저택을 저 손바닥 위에 올리는 건 무리였다.
“여기서는 안 되고, 궁 밖으로 나가야 해.”
“궁 밖으로?”
“응. 그러니 내가 직접 왔지. 황후의 권력을 휘둘러서 오라버니를 데려가려고. 태학박사의 강의를 멈추게 하려면 나 정도 되는 사람이 직접 와야 하는 법이잖아?”
내 말에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던 제신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황후 누이를 둬서 좋구나. 이렇게 강의도 접고. 그런데 황후의 권력을 이런 일에 써도 되나?”
“원래 권력은 사소한 데 써야 제맛이지. 앞으로도 오라버니를 위해서라면 몇 번이고 황후의 권력을 휘둘러 줄게.”
사실 황후의 권력이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말로는 못 할 것이 없었다. 나의 너스레에 제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으음…… 그것 참 고마운 말이기는 한데…… 그거 자라나는 새싹 앞에서 해도 되는 말인가?”
내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너스레를 떨자 제신이 눈을 가늘게 뜨고 우리 사이에 선 연을 가리켰다. 연은 나와 제신의 대화를 들으며 눈을 껌뻑이고 있었다.
“어…….”
우리 두 사람의 시선을 동시에 받은 연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손으로 제 귀를 막았다.
“저는 아무것도 못 들었어요. 그러니 마음껏 권력을 휘두르세요, 어머니.”
“뭐라고?”
예상하지 못한 연의 반응에 나와 제신의 입에서 동시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 * *
나는 연의 말처럼 마음껏 권력을 휘둘러 제신과 함께 궁 밖으로 나섰다. 태림을 비롯한 근위대 몇 명이 우리의 외출에 함께했다.
“도대체 뭘 주려고 이렇게 거창한 외출을 해?”
함께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제신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주겠다는 사람을 왜 그렇게 봐? 누가 보면 뭘 뺏어 가려는 사람인 줄 알겠어.”
“왜기는. 네가 이렇게 일을 벌여서 조용하게 넘어간 적이 있어?”
“음……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나?”
“없었어.”
“한 번은 있었을 텐데.”
“없었다니까.”
제신과 그런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마차가 멈춰 섰다. 아마도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도착했습니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태림이 문을 열어 도착을 알리자 나와 제신이 차례로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제신은 경계심에 찬 눈으로 저택을 살피며 내게 물었다.
“여긴 어디야?”
“우선 들어가자.”
“누구 집인데 막 들어가?”
“내가 이상한 곳에 데려갈까 봐 그래? 그냥 들어와.”
내가 그렇게 말하며 앞장서자 제신이 마지못해 나를 따랐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마주한 고요한 풍경에 제신이 미간을 찌푸렸다.
“인기척이 전혀 없는데.”
“당연하지. 사람이 없으니까.”
“……아무래도 난 모르겠으니 이제 네 속셈을 말해 봐. 여기까지 와서 내게 줄 것이 뭔데?”
“이미 보고 있잖아.”
씨익 웃으며 대답하자 그렇지 않아도 찌푸려져 있던 제신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인데. 지금 보고 있는 거, 전부 오라버니에게 줄 내 선물이야.”
제신은 여전히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제신의 팔을 잡아끌어 하나씩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아주 넓은 저택은 아니지만 두 사람이 살기에는 문제없을 거야. 궁에서 조금 더 가까웠다면 좋았을 텐데…… 그쪽은 전부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어서 구할 수가 없더라고.”
제신은 내가 천천히 저택 안을 소개하는 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내가 하는 말을 제대로 듣고 있기는 한 건지 내내 멍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저쪽으로 가면 정원이……”
“잠깐만.”
마지막으로 정원을 안내하려는데 제신이 걸음을 멈추며 머리를 짚었다.
“그러니까 우희 네 말은……”
“여기가 오라버니 집이라는 거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답을 돌려주니 제신이 입을 쩍 벌렸다. 나는 활짝 웃으며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혼인을 축하하는 내 선물이야, 오라버니. 황후의 권력을 마구 휘둘러서 하나 마련했어. 혼례를 올린 뒤에도 백부의 집에서 계속 신세를 질 수는 없잖아.”
“……언제 준비한 거야?”
그렇게 물은 제신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표정도 썩 밝아 보이지 않았다.
혹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제신이 기뻐할 것으로만 생각했던 나로서는 당황스러운 반응이었다. 여태까지 들떴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생각은 오라버니의 혼례 이야기가 나오면서부터 했고, 제대로 마련한 건 얼마 전이야.”
나는 제신의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럼 다른 저택을……”
“마음에 들지 않을 리가 없잖아. 네 선물인데.”
제신이 내 말을 자르며 두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정말 생각지도 못해서……”
제신이 말을 끝까지 마무리 짓지 못하고 다시 한번 저택을 둘러보았다. 처음 저택을 살필 때의 경계심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받아도 될지 모르겠어. 난 네가 혼인할 때 아무것도 못 해 줬는데.”
“그건 내가 평범한 혼인을 하지 않아서잖아. 할 수만 있었다면 오라버니는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을 내게 줬을걸. 그러니 나도 그러고 싶었어.”
나는 제신의 두 손을 잡으며 저택을 바라보았다.
“우린 오래전에 집을 떠나왔잖아.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이후에는 감히 그곳에 돌아갈 생각도 못 했어. 그곳은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꾸린 집이니, 그분들 없이 우리가 그곳에 터를 잡을 수는 없지.”
나와 제신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집을 떠나 고향을 잊고 산 것이 오래되었다. 이제 우리에게도 새로운 집이 필요했다.
“나는 이미 혼인해 새 터를 잡았으니 이제 오라버니 차례야. 부디 오라버니가 이곳에서 좋은 가정을 이루고 오래도록 행복했으면 좋겠어.”
진심을 담은 바람에 제신이 내 손을 마주 잡았다.
“참으로 오래 살고 볼 일이구나. 세상 어떤 오라비도 누이에게 저택을 선물받지는 못했을 텐데. 이제 정말 내 누이가 다 컸구나 싶다.”
“내 나이가 몇인데 이제 와 그런 소리야? 난 이미 오래전에 다 컸어. 심지어 혼례를 올리지 않은 오라버니보다 내가 더 어른이라고.”
나의 지적에 제신이 웃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내 누이는 어느새 이렇게 어른이 되어 있었는데 나만 모르고 있었구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제신은 그 역할까지 짊어진 채 나를 지켜 왔다. 누구도 강요한 적 없는, 그 스스로 기꺼이 짊어진 역할이었다.
이제는 그 역할에서 벗어날 시간이었다.
“난 이제 정말 다 컸어. 더 이상 오라버니가 날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고. 이젠 오라버니만 생각하고 살아.”
“진심이야?”
“응. 진심이야.”
“거짓말. 정말 내 생각만 하고 살면 서운해할 거면서.”
“음. 그건 그럴지도. 서운해하는 것 정도는 봐줄 거지?”
“뭐, 그 정도는 봐주지.”
“날 너무 신경 쓰지 않는다면서 투덜거릴 수도 있는데 그게 다 진심은 아닐 거니까 그냥 웃어넘겨. 알았지?”
“알았어.”
“그리고 혼인 축하해, 오라버니. 이 말은 아직 안 한 것 같아서.”
“날 벌써 보내려고 그래? 혼인은 아직 하지도 않았다 이 녀석아.”
제신이 입으로 타박하면서도 두 손으로는 나를 따뜻하게 끌어안았다. 나는 제신을 마주 안으며 그의 미래를 위해 기도했다.
* * *
궁으로 돌아오니 어느새 해가 떨어져 날이 어두워졌다.
돌아오자마자 달래의 성화에 넘어가지 않는 저녁을 먹고, 잠시 서책을 읽고 있었더니 늘 그랬던 것처럼 태의가 나를 찾아왔다.
태의는 담덕이 임신 소식을 알게 된 이후 매일같이 내 처소에 찾아와 나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아마 담덕이 따로 명을 내린 것 같았다.
태의가 몸 상태를 봐 주는 건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내가 아무리 의술을 잘 안다 하더라도 스스로의 몸을 살피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매일 찾아오는 건 과하지 않나?
담덕은 지나칠 정도로 나를 귀하게 대접했다. 나로서는 임신이 두 번째 경험이었지만, 담덕에게는 첫 번째인지라 과하게 노심초사하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담덕이 보낸 태의를 물리지 않았다.
내가 매일 담덕의 상태를 확인해야 마음이 놓이는 것처럼 담덕도 비슷한 불안을 안고 있는 거라 생각하면 이런 일도 이해할 수 있었다. 태의를 만나는 짧은 시간으로 그의 마음이 편해진다면 진맥을 받느라 소비하는 이각(二刻:30분) 정도는 아깝지 않았다.
담덕은 노심초사하고 태의는 매일같이 내 처소에 드나들고.
덕분에 따로 선언하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레 내 임신 소식이 궁 안에 퍼졌다. 궁인들은 물론이고 궐에 자주 드나드는 귀족들까지 모두 이 소식을 알게 되었다.
완연한 안정기에 들어서기 전까지 최대한 임신 사실을 감추고 싶었지만 이미 공공연하게 퍼진 소문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몸이 많이 허해지셨습니다. 요즘 식사는 잘하고 계십니까?”
진맥을 마친 태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최대한 먹으려고 하고는 있지만…….”
아이를 가졌을 때 입맛이 뚝 떨어지는 건 여전해서 좀처럼 먹을 것이 끌리지 않았다.
거기다 신경 쓰이는 일들이 많아지니 자연스레 식욕이 줄었다. 출출함도 잘 느껴지지 않아 좋아하는 과편이나 몇 개 집어 먹는 게 전부였다.
“배불리 드시고, 충분히 주무시고, 많이 웃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복중에 있는 아기씨에게 좋지요.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요.”
태의가 묘하게 엄한 눈으로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입맛을 돋우는 데 도움이 되는 탕약을 지어 올리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탕약에 의존하지 마시고 의식적으로 많이 드시려고 노력하셔야 합니다.”
“그리하지.”
순순히 대답했지만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았는지 태의가 내 옆을 지키고 선 달래에게도 당부를 잊지 않았다.
“자네의 역할이 중요하네. 마마께서 무엇이라도 드실 수 있게 도와 드려야 해.”
“걱정 마십시오. 제가 신경 써서 보필하겠습니다. 배불리 드시고, 충분히 주무시고, 많이 웃으실 수 있게요.”
달래가 손가락을 접어 태의의 말을 하나씩 꼽으며 대답했다. 사명감에 불타오르는 달래의 눈빛에 태의가 그제야 만족한 얼굴로 처소를 떠났다.
나는 떠나는 태의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늘 의원의 입장에서 환자를 다그치기만 하다가 반대의 입장이 되니 상당히 피곤했다.
나도 저렇게 피곤한 의원은 아니겠지?
스스로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그때, 달래가 진맥하느라 걷어 올렸던 소매를 정돈해 주며 내게 속삭였다.
“오늘 그 사람이 입궁했답니다.”
“그 사람?”
“근위대장님의 아버지 말입니다.”
이제는 소노부의 고추가가 아니라 근위대장님의 아버지인가.
한결 소박해진 호칭이 어색하기만 했다.
“그 사람이 궐에 올 이유가 뭐라고?”
“국내성 생활을 접고 서쪽 소노부로 돌아가기 전에 폐하께 마지막 인사를 올리러 왔다던걸요. 지금 폐하의 집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라 합니다.”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신하가 왕에게 마지막 인사를 올리는 건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담덕을 제대로 된 왕 취급도 하지 않던 자가 이제 와 마지막 인사라니.
달래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이어지는 목소리에 불만이 가득했다.
“폐하께서 어찌 만나 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여태껏 그 사람이 얼마나 폐하를 힘들게 했는데요.”
“그래도 평생을 고구려를 위해 일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마지막 인사를 올린다는데 어떻게 외면하겠니. 마지막 명예는 지켜 줘야지.”
“고구려를 위해 일하긴요. 자기 좋으라고 일했지요. 그런 사람이 뭐가 예쁘다고 마지막 명예를 지켜 줍니까?”
“달래야.”
입조심하라는 의미로 낮게 달래의 이름을 불렀더니 그녀도 아차 싶었는지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궁은 빠르게 소문이 도는 곳이다. 언제, 어떤 소문이, 어떤 식으로 퍼져 나갈지 알 수 없었다.
내 처소를 지키는 궁인들도 완전히 믿기는 힘들었다. 그러니 언제나 말을 조심해야만 했다.
그러나 조금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도 달래와 비슷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리했다가는 귀족들의 비판을 피하기 힘들었다.
담덕과 대립각을 세우기는 했으나 귀족들 사이에서 해서천은 명망 있는 어른이었다. 그의 체면을 살려 주는 쪽이 귀족들과의 원만한 관계 유지에 좋았다.
무엇보다 이곳은 궁 안이야. 근위대가 도처에 깔려 있으니 해서천도 함부로 일을 벌일 순 없지. 만남을 피할 이유가 없어.
“그래도 달래 네가 그리 말해 주니 내 속은 시원하구나.”
시무룩해진 달래의 귀에 속삭이니 금세 그녀의 얼굴이 환해졌다.
“역시 그렇지요? 우리 아가씨께서 말 못 하는 걸 속 시원하게 말해 주는 게 이 달래의 역할 아닙니까.”
달래는 이따금씩 나를 혼인하기 전처럼 ‘우리 아가씨’라고 불렀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말 같았다.
나의 말 한마디에 다시 환해진 달래가 수다를 시작하려는 그때.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올까요?”
“그래.”
하지만 달래가 밖으로 나서기도 전에 밖에서 태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마.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태림의 목소리가 조금 굳어 있었다.
“손님?”
나는 의아해져 고개를 갸웃거렸다. 태림이 저렇게 굳은 목소리로 말할 손님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누가 찾아오셨습니까?”
나를 대신해서 달래가 물었다. 하지만 곧장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태림 님?”
달래가 한 번 더 재촉했지만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성격 급한 달래가 결국 기다리는 걸 포기하고 직접 다가가 문을 살짝 열었다.
“누가 찾아오셨는데 그러세요?”
열린 문틈으로 태림의 난처한 얼굴이 보였다. 그가 손님이 서 있는 곳을 힐끗거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소노부 해씨의 어르신께서 마마를 뵙고자 하십니다. 고향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인사를 올리시겠답니다.”
“예?”
달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열린 문 사이로 고개를 뺐다. 그렇게 손님의 정체를 확인한 그녀가 화들짝 놀라 문을 닫고 내 앞으로 달려왔다.
“해서천입니다! 그 사람이 왔어요!”
작게 속삭이는 달래의 목소리에 그제야 태림의 망설임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해서천을 부를 마땅한 호칭을 떠올리지 못해 손님의 정체를 고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고민 끝에 나온 호칭이 해씨의 어르신이라니.
그 말을 들은 해서천의 얼굴 표정이 어땠을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달래야, 손님을 안으로 모셔라.”
“만나시려고요?”
달래가 놀라서 펄쩍 뛰었다.
“조금 전에 나눴던 이야기를 벌써 잊었니? 애초에 거절할 수 있는 만남이 아니다.”
게다가 해서천이 이곳에 왔다는 건 담덕과의 대화를 별문제 없이 마쳤다는 뜻이다.
정말 마음을 접고 고향으로 가려는 것인가?
예상하지 못한 해서천의 마지막에 기분이 묘해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달래가 서둘러 자리를 마련하고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해서천을 향해 고개 숙이는 달래는 언제 그의 험담을 했나 싶을 정도로 공손한 얼굴이었다.
달래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은 해서천은 예전과 인상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 늘 발견했던 야망은 이제 흔적을 찾을 수도 없었다.
역시 꾸며 낸 얼굴은 아닌 것 같아.
해서천의 얼굴을 보며 내린 결론에 조금 긴장이 풀렸다.
“달래야. 차를 내오겠니?”
“예.”
차를 준비하기 위해 달래가 밖으로 나서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야기를 시작한 쪽은 나였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신다고요.”
“더 이상 이곳에 남아 할 일이 없으니까요.”
“고추가의 자리를 내려놓으신 뒤에도 계속 국내성에 머무르며 내정에 도움을 주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만.”
내 말에 해서천이 픽 하고 웃었다.
“그건 이 늙은이에게 참으로 잔혹한 바람이시군요. 제가 이곳에 남아 하려 했던 일이 겨우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건 아시잖습니까.”
세상 모든 것에 초연한 사람처럼 소탈한 웃음이었다. 늘 비웃음이나 조롱을 담고 있던 그의 미소가 소탈하다는 것이 어색하기만 했다.
“……떠나기 전에 제게도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색함을 지우기 위해 웃으며 말했더니 해서천이 예전과 같은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감사하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그저 제 마음 편하자고 하는 일이니까요.”
그렇게 마주한 해서천의 눈에는 여전히 힘이 있었다. 초연함 속에 숨겨져 있던 강인한 의지였다.
“많이 달라지신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여전하시군요.”
“하고자 하는 일을 잃었다고 해서 제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아시다시피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특히 해서천처럼 강한 뜻을 가졌던 사람일수록 그럴 것이다. 동의한다는 뜻으로 침묵을 지켰더니 그가 은근하게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마마께 저는 철천지원수지요. 아비를 죽게 하고, 국내성을 떠나게 하고, 끝없이 태왕을 흔들었으니 둘도 없는 악연입니다. 이런 제가 당신을 찾아왔을 때 어떤 대화를 나누길 기대하셨습니까?”
“좋은 이야기를 나누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어요. 폐하께도 지난 일들을 사죄하지 않는다 하셨으니, 제게도 같은 마음이실 테죠.”
“그것이 전부입니까?”
“다른 것이 더 필요한가요?”
“비난을 하실 줄 알았는데요. 뻔뻔한 자라고 말입니다.”
해서천은 진심으로 나의 반응이 신기하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웃으며 짧게 대답했다.
“성사불설(成事不說), 수사불간(遂事不諫), 기왕불구(旣往不咎)입니다.”
오늘 연이 제신에게 말했던 구절이었다.
“논어로군요.”
해서천 역시 그 구절을 알고 있었다.
“완성된 일은 거론하지 않고, 끝난 일은 간언하지 않고, 과거는 탓하지 않는다니. 그게 가능합니까?”
“가능하게 만드는 거지요. 계속 과거를 생각하다 보면 괴로운 것은 결국 저니까요.”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선명하게 해서천을 향했다.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으면 제 대답은 하나뿐입니다. 당신이 미워요. 꼴도 보기 싫습니다. 당신은 내 인생에서 많은 것을 앗아 갔어요. 어떻게 해도 곱게 볼 수가 없습니다.”
적나라한 말에 해서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보며 괴로워하지도 않을 거고, 당신을 향한 원망으로 밤잠을 설치지도 않을 겁니다. 당신이 했던 수많은 일들이 결국 내 인생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는 거. 복수라면 그게 복수겠죠. 당신 같은 사람에게는 그것이 가장 괴롭지 않은가요?”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해서천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도무지 웃을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슬쩍 미간을 찌푸리자 해서천이 겨우 웃음을 갈무리하고 입을 열었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두 분이 부부는 부부인 모양입니다. 폐하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시더군요. 성사불설, 수사불간, 기왕불구라니…….”
해서천이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선은 내게 고정한 채였다.
“확실히 우리는 다른 부류입니다. 저는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가 없거든요. 받은 만큼 돌려준다. 그게 제 방식입니다. 이처럼 다르기 때문에 폐하와 제가 한배를 탈 수 없었던 거겠죠.”
나는 해서천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떠나시려고요?”
“예.”
“아직 차가 나오지 않았는데요.”
“마지막 길에 차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손님이 되었다는데 차를 강요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게 예의라 하더라도 해서천에게 그렇게까지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었다.
“그러시다면 붙잡지 않겠습니다. 부디 고향 가는 길이 편안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과연 친절하시군요.”
해서천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는 문을 향해 걸었다. 나는 굳이 그를 배웅하지 않았다.
“회임을 하셨다면서요.”
밖으로 나서려는 듯 문고리에 손을 얹었던 해서천이 제자리에 멈춰서 물었다.
“소식이 거기까지 흘러갔나요?”
“제가 아무리 힘을 잃었다 한들 그런 소문까지 모를까요. 여전히 제 사람들이 남아 있는데요. 감축드립니다. 폐하께서도 참으로 기뻐하셨겠군요.”
돌아서 있는 탓에 해서천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표정을 읽을 수 없으니 그의 축하가 진심인지 아닌지도 파악할 수 없었다.
“참으로 좋은 때가 아닙니까. 기쁨이 클수록 좌절도 큰 법이니.”
해서천이 문고리에서 손을 놓고 천천히 돌아섰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무엇인가 이상했다.
“갑자기 왜……”
입을 떼는 순간 코끝으로 기묘한 냄새가 흘러들었다.
기름 냄새?
반사적으로 코를 막음과 동시에 발끝에 무엇인가가 닿았다. 고개를 숙여 보니 병 하나가 데구르르 굴러 내 발 앞에 멈춰 있었다.
“기름입니다.”
해서천이 태연하게 말했다. 고개를 번쩍 드니 문이며 그의 발아래가 기름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놀라움으로 입이 떡 벌어졌다.
“이봐요, 고추가.”
“이젠 고추가가 아니지요.”
그가 싱긋 웃으며 입구에 놓여 있던 등불을 손에 들었다.
손에 든 불과 바닥에 흥건한 기름. 좋지 않은 예감이 머릿속을 스쳐 감과 동시에 손이 바르르 떨렸다.
저 등불이 바닥에 떨어지면…….
“무슨 짓이에요! 죽기라도 할 작정인가요?”
“죽기라도 할 작정이냐고요?”
해서천이 내 말을 따라하며 픽 웃었다.
“이상한 질문이군요. 저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습니다. 내 목표를 잃고 좌절했던 바로 그때, 나는 이미 죽었어요.”
이상하게 초연한 사람처럼 굴더라니.
완전히 미쳐 버린 게 틀림없었다. 대화를 나눌 가치가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태림을 불렀다.
“태림!”
하지만 밖에서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태림?”
당황해서 다시 한번 더 태림을 부르자, 해서천이 큭큭거리며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여전히 제 사람들이 남아 있다고. 수를 써서 이곳을 지키는 사람들이 잠시 자리를 비우게 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제가 하려는 일은 충분히 할 수 있지요.”
해서천이 손에 든 등불을 흔들며 말했다. 일렁거리는 불길을 따라 내 눈동자도 흔들렸다.
“몇 번이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태산같이 굳건한 사람이 나처럼 좌절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더군요. 이 세상에 태산을 흔드는 방법은 없지 않습니까?”
해서천이 등불을 흔들던 손을 멈추고 나를 빤히 보았다. 텅 빈 눈동자를 보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래서 생각했지요. 태산을 흔들 수 없다면, 태산을 덮은 나무를 모두 불태워 버리자고. 나무 하나 없는 벌거숭이 산이라니. 자리를 지켜도 평생 찬바람에 몸을 떨겠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지금 하려는 게 얼마나 정신 나간 짓인지 모르겠어요?”
잠시 자리를 비우게 했다고 했으니 조금 더 시간을 끌면 사람들이 돌아올 것이다. 나는 최대한 머리를 굴려 해서천과의 대화를 이어 가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압니다. 제가 얼마나 정신 나간 상태인지.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평생을 갈고 닦아 온 목표가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는데, 제가 어찌 제정신이겠습니까? 저는 미쳤습니다. 완전히 미쳐 버리고 말았어요.”
해서천이 다시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도저히 설득이 통할 상태가 아니었다.
“하여 저도 폐하를 미치게 만들기로 했습니다. 제가 맛본 좌절을 그분도 느껴 봐야지요. 그래서 여기에 온 겁니다. 폐하께 가장 소중한 것. 그분을 흔들 유일한 존재. 당신을 데려가려고.”
그렇게 말한 해서천이 망설임 없이 등불을 바닥에 던졌다. 기름이 닿은 문에서 순식간에 불길이 치솟더니, 그대로 해서천의 몸에까지 불이 옮겨붙었다.
“으하하! 으하하하!”
몸에 불이 옮겨붙었는데도 해서천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크게 웃었다.
“이제 당신도 나와 똑같은 사람이 되는 거야!”
해서천이 허공을 향해 외쳤다. 아마도 담덕을 향해 하는 말인 것 같았다.
그의 외침과 함께 불길이 방 전체로 퍼지기 시작했다. 사방이 붉게 물들었다.
“꺄아아악!”
바깥에서 달래의 비명이 들려왔다. 뒤이어 무엇인가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사람들의 다급한 발걸음 소리까지 귓가에 닿았다.
“우희 님!”
온몸에 불길이 타오른 채로 웃고 있는 해서천의 뒤로 불에 타오른 문이 부서져 내렸다. 태림이 발로 차 문을 부순 것 같았다. 하지만 불길이 너무 심해 그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모든 모습이 느리게 흘러갔다. 소리가 멀어지고 숨이 턱 막혔다. 나는 입을 틀어막고 부들부들 떨었다.
불. 화재. 고통. 죽음.
익숙한 기억이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다. 오래 전 나는 지금 이 순간과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타오르는 불길에 몸이 뜨겁고, 매캐한 공기에 숨이 턱 막힌다. 쉴 새 없이 눈물이 나고 정신은 점점 희미해져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도 알 수 없어지겠지.
불길이 타오르는 건물 속에서 김소진이 그런 식으로 죽었다.
머리는 도망치라고, 어서 사람들이 기다리는 밖으로 달리라고 말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익숙한 공포가 온 몸을 덮쳤다.
그때 웃음소리가 가까워졌다. 불길에 휩싸인 해서천의 검은 몸뚱이가 눈앞에서 쓰러졌다.
다리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숨 막혀. 뜨거워.
머릿속의 공기가 부족해지자 시야가 어둠으로 물들었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멀어졌다.
* * *
빛과 소리가 모두 사라진 그 순간.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강한 힘이 온 몸을 짓눌렀다. 정확히는 몸을 짓누르는 게 아니었다. 힘은 몸속 깊은 곳에서 ‘나’를 밀어내고 있었다.
나는 저항할 수 없는 강한 힘에 떠밀려 ‘몸’에서 튕겨 나왔다. 그렇게 억지로 ‘몸’에서 벗어나는 순간 잃어버렸던 빛과 소리가 한꺼번에 내게 돌아왔다.
다시 돌아온 풍경은 무척이나 현실감이 없었다.
눈을 감기 전보다 더 거세진 불. 그 위로 물을 끼얹는 사람들. 애타게 나를 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불길 가운데 누워 있는……
나?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믿을 수가 없어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눈앞에 있는 여자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죽은 사람처럼 늘어져 있는 여자는 분명히 나였다.
그럼 지금 여기에 서 있는 ‘나’는 누구지?
나는 황당한 심정을 안은 채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반투명한 손바닥 아래로 뿌옇게 바닥이 보였다.
뭐지?
더 자세히 살피니 두 손뿐만 아니라 온몸이 반투명했다. 그러고 보니 활활 타오르는 불길의 뜨거움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반투명한 내 손과 누워 있는 몸을 번갈아 보며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유체 이탈 같은 건가? 어떻게 다시 들어가지?
조심스럽게 몸 앞으로 다가가 손을 뻗어 보았지만 몸이 만져지지 않았다. 반투명한 손이 그대로 몸을 통과했을 뿐이다.
난처하게 몸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으니 입구가 시끄러워졌다. 고개를 돌리자 타오르는 불길 사이로 딱딱하게 굳은 담덕의 얼굴이 보였다.
“연우희!”
‘담덕!’
서둘러 대답했지만 눈을 감은 채 누워 있는 몸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대답 없는 나의 몸을 보며 담덕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 태림에게 물었다.
“왜 안으로 들어가지 않지?”
“불길이 너무 셉니다. 먼저 불길을 잡고……”
태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장에서 불에 탄 서까래가 떨어지며 불길이 더 크게 일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던 달래가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럴 시간 없어.”
단호하게 말한 담덕이 불에 물을 끼얹으려던 근위대원의 손에서 들통을 뺏어 들더니, 제 머리 위에 그대로 물을 끼얹었다. 축축하게 젖은 그의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폐하!”
담덕의 의도를 알아챈 태림이 담덕의 팔을 붙잡았다.
“위험합니다. 절대 안 됩니다.”
“그러면 이 꼴을 가만히 지켜보라는 건가?”
담덕이 매섭게 쏘아 붙이고는 태림의 손을 쳐 내고는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미쳤어? 불길이 이렇게 강한데! 안 돼!’
불길이 너무 거세 태림조차 안으로 들어오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게 강한 불길이, 담덕이 다가온다고 알아서 줄어들 리 없었다.
‘이러다 너까지 다쳐!’
나는 다급하게 담덕에게로 다가가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반투명한 손은 이번에도 물리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담덕의 몸을 통과했다.
담덕은 물에 젖은 소매로 코와 입을 가리고 불길을 통과했다. 망설임 없이 나를 향해 걷는 담덕의 머리 위에서 불에 탄 나뭇조각들이 쉴 새 없이 떨어져 내렸다.
불길을 뚫고 깊은 곳까지 들어온 담덕이 물에 젖은 겉옷을 벗어 내 몸에 둘렀다. 그는 젖은 옷에 싸인 채 인형처럼 축 늘어진 나를 품에 안아 들어 다시 불길을 헤치고 밖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