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화유수-36화 (37/38)

33장. 기원(祈願)

연회장은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고운 옷을 차려입은 무희(舞姬)들은 흥겨운 가락에 맞춰 춤을 췄고, 평소에는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느릿하게 궁궐을 활보하던 귀족들도 술잔을 높이 들어 용사들의 용맹함을 칭송했다.

전쟁에 나섰던 용사들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 제 무용담을 털어놓기 바빴다. 사람들은 그들의 말에 감탄했다가 허풍 떨지 말라며 손사래를 치기도 했다.

궁인들은 바쁘게 움직이며 술과 음식을 내놓았다. 고소한 음식 냄새가 멀리 궁궐 밖까지 흘러 나갈 것만 같았다.

어두운 밤인데도 곳곳을 밝힌 등불로 궁궐은 환한 대낮 같았다. 그 풍경을 보고 있으니 술 한 모금 마시지 않았는데도 거나하게 취한 듯 마음이 들떴다.

“어찌 연회를 즐기지 않으십니까?”

운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내 곁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운 역시 담덕과 함께 후연전에 출정했다가 막 귀환한 몸이었다. 전쟁에 나서는 건 처음이 아니지만 근위대장으로서는 첫 출정이었다.

“잘 다녀왔어요? 다친 곳은 없고요?”

운의 몸 곳곳을 살피며 물으니 그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보시다시피 멀쩡합니다.”

“다행이네요. 그런데 국내성에 돌아오자마자 일인가요? 함께 출정했던 근위대원들은 다른 병사들과 어울려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데.”

나는 연회장을 지키고 있는 근위대원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지금 연회장을 지키고 있는 근위대원들은 모두 후연전에 출정하지 않은 이들이었다. 운 역시 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몸이니, 이렇게 경계를 서고 있을 것이 아니라 병사들 틈에 섞여 술을 마시고 있었어야 했다.

“근위대장이라는 자리가 생각보다 성가시더군요. 부하들이 일하고 있는데 대장이라는 놈이 늘어져 있을 수는 없잖습니까.”

의외의 말이었다.

운이라면 조금 더 여유를 부릴 줄 알았는데.

내 눈빛에 담긴 생각을 읽었는지 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절 도대체 어떻게 보신 겁니까?”

“어떻게 보긴요. 여태까지 제게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는 본인이 가장 잘 알 텐데요?”

“뭐, 그다지 모범적인 사내는 아니었지만…….”

운이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그 얼굴에 여전히 전쟁의 피로가 남아 있어 나는 조금 따뜻한 말을 해 주기로 했다.

“그래도 좋은 사람인 건 알아요.”

웃으며 말하자 운이 입을 꾹 다물고 나를 보았다.

“그걸 아신다고요?”

“그럼요. 몇 년을 지켜봤는데 그걸 모르겠어요?”

“그렇습니까…….”

나의 강력한 주장에도 운은 애매하게 웃으며 말끝을 흐릴 뿐이었다. 그 모습이 꼭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이라니까요! 내가 운 도령을 얼마나 꿰고 있는데요. 지금처럼 실없이 웃는 게 진지한 속내를 감추기 위해서라는 것도 다 안다고요.”

“재밌네.”

“뭐가요?”

“들키고 싶지 않았던 건 간단하게 알아채면서, 알아줬으면 하는 건 끝내 눈치채지 못한다는 게. 참 재밌어.”

내 두 눈을 바라보고 하는 말투가 마치 오래전의 운처럼 친근했다. 내가 황후가 된 후로 이처럼 편안하게 말하는 운은 본 적이 없었다.

“꼭 몇 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네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지.”

“하지만 이런 모습이 더 좋아요. 예의를 차리는 운 도령은 어딘가 어색해서.”

“하지만 황후와 근위대장이니까요. 그에 맞는 예의가 필요하죠. 그렇지 않습니까?”

어느새 운의 말투는 깍듯하게 변해 있었다.

“그거야 그렇지만…….”

운 도령은 내가 황후가 되더라도 변함없이 가벼운 태도로 나를 대할 줄 알았는데.

담덕과 혼인한 후 태도가 바뀐 사람들이 많았지만, 나를 황후가 아닌 ‘우희’로 대해 준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가장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운의 태도가 제일 극명하게 변했다.

“대장님.”

미묘한 침묵이 내려앉은 우리 두 사람 사이에 태림이 나타났다. 평소에도 표정이 별로 없는 태림이지만, 지금은 얼굴이 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긴 걸까?

걱정스럽게 태림을 보고 있으니 그가 내 눈치를 살피며 운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고추가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절노부의 고추가께선 저곳에 계시니 새삼 보고할 일은 아닐 테고…….”

운이 근처에 앉아 떠들썩하게 술잔을 주고받는 백부를 힐끗거렸다.

연회 시작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던 백부가 아니라면……

이 나라에 고추가로 불릴 사람은 단 하나뿐이었다. 소노부의 해서천이었다.

“예. 소노부의 고추가께서.”

태림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작은 인영이 보였다. 사방을 밝히는 등불에 일렁이는 얼굴에는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화병으로 앓아누웠다는 자가 어째서 지금 여기에?

의문으로 미간을 찌푸리자마자 운이 말했다.

“내가 가 보지. 자네는 마마의 곁을 지켜.”

“예.”

운이 해서천을 향해 걸음을 옮김과 동시에 멀리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태왕 폐하!”

때마침 담덕 역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연회장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그가 다가오고 있는 쪽에서부터 사람들의 환호가 점점 커졌다.

하지만 나는 담덕에게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나를 향하는 형형한 두 눈 때문이었다.

해서천의 두 눈이 흔들림 없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멀리 있었지만 그 두 눈만은 선명했다.

그의 눈에 담긴 감정을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까?

분노인가. 체념인가. 후회인가.

수많은 감정이 가득해 오히려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모든 감정이 그의 두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하늘에 뜬 담덕의 별빛도 저 눈빛에 빨려 들어간 것이 아닐까?

불길함에 손끝이 저릿했다. 나는 애써 해서천의 두 눈에서 시선을 돌리며 태림을 불렀다.

“태림.”

“예.”

대답하며 내 얼굴을 살피는 태림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염려할 정도로 내 얼굴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늘은 담덕의 곁을 지켜 줘요.”

“하지만.”

“태림도 알잖아요?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태림은 태왕의 별이 흐려졌다는 사실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내 말에 반박하려던 태림의 입이 꾹 다물렸다.

“이 자리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담덕을 안전하게 지켜 줬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내 마음이 놓일 것 같아서 그래요.”

“저는…….”

잠시 고민하던 태림이 마음의 결정을 내린 것인지 고개를 숙였다.

“전 언제나 제가 모시는 분의 명을 따릅니다. 오래전 폐하께서 저를 마마께 보낸 이후, 제가 모시는 분은 고구려의 황후 우희 님이십니다. 그러니 지금은 우희 님의 명에 따라 폐하를 누구보다 안전하게 지키겠습니다.”

“태림이 그렇게 말해 주니 마음이 놓여요.”

“부족한 사람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놓이신다니 다행입니다.”

“태림이 부족하다면 이곳에 믿을 만한 용사는 아무도 없을걸요.”

내 말에 태림이 보기 드물게 웃으며 담덕의 곁으로 떠났다. 떠나기 전 다른 근위대원을 내 옆에 남겨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태림이 담덕의 곁에 서 있는 모습을 보자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사실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태왕을 위협하기는 힘들었다. 태왕을 지켜보는 눈도, 그를 지키는 검도 많았다.

제아무리 해서천이라도 이런 상황에서 태왕을 해하진 않을 것이다. 소노부의 위세는 여전히 대단했지만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 짓고 귀환한 태왕과 정면으로 대치하는 것은 여러모로 어리석었다.

그러니 태림을 담덕의 곁에 보낸 것은 순전히 나의 마음을 위한 처사였다.

담덕은 웃으며 연회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활보했다. 용사들과 귀족들에게 직접 술을 따라 주고, 그들이 따라 주는 술을 마시기도 했다.

모두가 담덕을 반겼다. 선대왕의 병이 깊어져 급하게 즉위한 어린 왕을 못 미덥게 보던 사람들이 어느새 담덕을 위대한 태왕으로 대하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을 바꾸기 위해 담덕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던가.

모든 변화는 담덕 스스로 쟁취한 것이었다. 경외심에 차 그를 바라보는 시선을 멀리서 바라볼 때면 치열했던 지난 시간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폐하.”

또렷한 목소리가 공간을 갈랐다. 담덕을 둘러싼 사람들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옮겨 갔다. 꼿꼿하게 선 해서천이었다.

딸의 죽음 이후 온갖 소문이 팽배했다. 그가 완전히 폐인이 되었다더라,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더라 하는 소문들이 대부분이었다.

한데 그런 사람이 정정한 모습으로 연회에 나타났다.

사람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 해서천의 얼굴은 수척했지만 갖춰 입은 옷이며 당당히 선 자태가 오래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추가.”

담덕은 반갑게 웃으며 해서천을 환대했다.

“폐하.”

해서천 역시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노신(老臣)의 화답에는 생각지 못했던 여유와 위엄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해서천이 앞을 향해 걸을 때마다 담덕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뒤로 물러나 길을 터 주었다. 누구도 어색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연회장을 가득 채웠던 가락이 뚝 끊어졌다. 춤을 추던 무희들도 조용히 구석으로 물러섰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지나쳐 해서천이 담덕 앞에 섰다.

“고추가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들어 염려했습니다만, 오늘 이렇게 얼굴을 보니 이제 그만 걱정을 떨쳐도 될 것 같습니다.”

“이 늙은이의 건강을 염려하셨습니까?”

“저는 고구려 모든 이의 안녕을 염려합니다.”

“과연 고구려의 태왕다운 배포이십니다.”

담덕의 말에 해서천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퍽이나 호탕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저 역시 폐하께서 무사히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고추가께서 내 귀환을 이리 환영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뼈 있는 말이었다. 그간 태왕에게 적대적이었던 소노부의 고추가라면 담덕이 전쟁터에서 눈먼 화살에 맞아 죽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귀족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해서천은 웃고 있었다. 그가 다시 한번 깊게 고개를 숙였다.

“언제나 고구려에 승리를 안겨 주시는 분 아닙니까. 폐하의 영광이 곧 고구려의 영광이니, 이 해서천, 고구려 사람 된 자로서 응당 폐하의 무사 귀환을 환영해야지요.”

이어지는 말에 여유롭게 웃고 있던 담덕의 미소가 조금 흔들렸다. 이상하리만치 호의적인 해서천의 태도가 마음에 걸린 것이 분명했다.

“지금 제 말이 진심으로 들리지 않으시겠지요. 당연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폐하를 어찌 대했는데요.”

해서천이 힘없이 웃으며 탁자 앞으로 걸어갔다. 모두의 시선이 그의 움직임을 좇았다.

해서천의 손이 망설임 없이 병 하나를 들었다. 용사들과 귀족들이 어울려 마시던 술이 담긴 병이었다.

“하지만 전부 진심입니다.”

남은 술의 양을 가늠하려는 듯 가볍게 병을 흔든 해서천이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술과 함께 해서천의 말이 이어졌다.

“전쟁의 승리를 축하드리는 것도, 용사들의 무사 귀환을 기꺼워하는 것도, 지금 폐하께 올리는 이 술에 담은 경외도.”

해서천이 어느새 술로 가득 찬 잔을 담덕에게 내밀었다.

“모두 진심입니다.”

술이 금방이라도 넘칠 듯한 잔에 담덕의 시선이 닿았다.

“그러니 노신이 올리는 이 술 한 잔, 기꺼이 받아 주시겠습니까?”

단지 술 한 잔일 뿐이다. 하지만 가득 찬 술 한 잔을 두고 맞부딪치는 해서천과 담덕의 기세는 범상치 않았다.

팽팽한 긴장감에 모두가 숨죽여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담덕의 눈이 해서천과 제 앞에 내밀어진 잔을 천천히 오갔다.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요를 깨뜨린 사람은 해서천의 뒤에서 나타난 운이었다.

“드시지 마십시오.”

두 번째로 흘러나온 말은 첫 번째보다 더 단호했다.

하지만 운의 말에도 해서천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뒤돌아 운을 보지도 않았다.

“폐하. 신하가 올리는 술 한 잔이 두려우십니까? 겨우 술 한 잔입니다.”

담덕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이제 그는 술잔이 아닌 해서천의 두 눈만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요? 제가 올리는 술은 받지 못하시겠습니까? 지금껏 이 많은 사람들과 술잔을 마주 기울이셨으면서, 저와는 안 된다고요?”

해서천의 말에 운이 한숨을 내쉬며 한 걸음 앞으로 움직였다.

“더 들으실 것도 없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니까요.”

운이 해서천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운의 손이 그에게 닿기 전 담덕이 손을 들어 그를 저지했다.

“아니. 됐다.”

“폐하.”

운이 미간을 찌푸리며 담덕을 불렀다. 하지만 담덕의 뜻이 더 강했다.

“괜찮으니 물러서.”

재차 들려온 명에 운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담덕이 싱긋 웃으며 해서천을 보았다.

“그 술, 받지요.”

“폐하.”

담덕의 결론에 가만히 뒤를 지키고 있던 태림이 굳은 얼굴로 그를 불렀다.

하지만 이미 운의 만류마저 뿌리친 담덕이었다. 그런 사람이 태림의 말이라고 들을 리 없었다.

“이리 주세요. 고추가께서 주시는 술맛은 어떤지 한번 봅시다.”

“술이 올리는 사람에 따라 맛이 달라지더이까?”

“좋은 사람과 마시면 달고, 불편한 사람과 마시면 쓴 것이 술 아닙니까. 응당 올리는 사람에 따라 맛이 달라지지요.”

“하면 제가 올리는 술은 맛이 어떨지요?”

“그건 한번 마셔 봐야 답을 알겠습니다. 여태까지 고추가께서 올리는 술을 마셔 본 적이 없어서 말입니다.”

담덕이 해서천이 내민 술을 받아 들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치맛자락을 꼭 쥐었다.

해서천이 내민 술이라니.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따른 술이지만 누구도 모르는 새에 수작을 부렸을 수도 있다. 해서천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담덕은 해서천의 술을 마시기로 결정했다. 그의 결정이라면 이유가 있겠지만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담덕이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그의 목울대가 움직이며 천천히 불길한 술을 삼켰다.

마침내 술잔이 깨끗하게 비었다. 재빨리 담덕의 안색을 살폈지만 그의 얼굴은 멀쩡했다.

담덕이 텅 빈 잔을 다시 해서천에게 내밀자 긴장하고 있던 몇몇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안심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맛이 어떻던가요?”

“술이 달군요.”

무덤덤한 질문에 간단한 대답이었다.

“하하하!”

술이 달군요. 다섯 글자 그 짧은 대답이 뭐가 그리 즐거운지 해서천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이었다. 그는 지나치게 기쁜 것 같기도, 지나치게 슬픈 것 같기도 했다.

혼자서 한참이나 배를 잡고 웃던 해서천이 겨우 웃음을 갈무리하고 담덕에게 물었다.

“폐하, 어찌 제가 건네는 술을 모두 비우셨습니까? 제가 술에 무슨 수작을 부렸을 줄 알고요?”

“수작을 부리셨습니까?”

“아니요.”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술을 마셨지요.”

“아무런 수작을 부리지 않았다는 제 말을 믿으십니까?”

“멀쩡한 제 몸이 증거지요. 당연히 믿습니다.”

“시간이 지나 효과가 드러나는 독을 썼을 수도 있잖습니까?”

“고추가는 그러지 않았을 겁니다.”

확신에 찬 말투였다. 그 말에 연회에 등장한 후 줄곧 웃고 있던 해서천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어째서 저를 믿으십니까?”

“한 나라의 군주가 신하를 믿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처음부터 내게 선택권은 없었습니다. 고추가의 술잔을 받는 것 외에는.”

담덕이 픽 하고 웃으며 빈 잔에 술을 따랐다.

“혹여 고추가의 술에 독이 들었더라도 나는 그 잔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신하에게 독이 든 술을 받을 정도로 형편없는 왕이라면, 그냥 그리 죽어도 할 말이 없지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 정도로 형편없는 왕은 아닌 듯하여.”

이번에는 가득 찬 술잔이 해서천 앞에 내밀어졌다. 달라진 상황에 이번에는 해서천이 술잔을 빤히 보았다.

“받으시겠습니까? 이 술.”

“저는……”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진 해서천이 멍하니 입을 열었다.

“저는 못 받습니다, 폐하.”

해서천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담덕을 보았다.

“만약 제가 당신이었다면 저 같은 사람이 내미는 술잔을 받지 못했을 겁니다. 도대체 무엇을 믿고 수없이 나를 해치려 했던 사람이 주는 술을 받습니까?”

마지막 말에는 허탈한 웃음이 섞여 있었다.

“그런데 폐하께선 받으시는군요. 이 사람이 내민 술을…… 내 아들마저 나를 믿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해서천이 그제야 제 뒤에 선 운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은 운이 복잡한 얼굴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한때는 자신의 희망이었으나 어느 순간 적이 되어 버린 아들의 모습에 해서천이 픽 웃었다.

“사실 폐하께서 제가 내민 술잔을 거부하시길 바랐습니다. 그래야 마음껏 하늘을 원망할 수 있으니까요.”

이제 해서천의 시선이 어두운 하늘을 향했다. 곳곳을 밝힌 등불 때문에 하늘에는 별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하늘은 온통 어둠이었다. 해서천은 짙은 어둠을 향해 혼잣말을 쏟아 냈다.

“왜 하필 당신이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갖게 되었는지. 어째서 나는 수없이 좌절해야만 했는지. 당신이 무엇이라고, 왜 내가.”

마지막으로 한 번 하늘을 훑어본 해서천의 두 눈이 다시 담덕을 향했다.

“그런데 이제 알 것 같습니다. 나는 할 수 없고,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이 당신을 선택한 거지요.”

해서천이 웃으며 담덕의 손에 든 술잔을 받아 들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그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폐하께서 하늘이 선택한 왕이셨습니다. 내가 욕심냈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었는데. 어찌 그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을까. 천하를 담을 그릇은 따로 있었거늘…… 결코 넘을 수 없는 태산을 넘으려 했으니 이렇게 고꾸라질 수밖에…….”

담덕을 향하던 말은 어느새 혼잣말이 되어 있었다. 후회가 가득한 말을 몇 번이나 읊조리던 해서천이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선언했다.

“역시 이 술은 안 받겠습니다.”

“어째서요?”

“제가 여전히 당신의 몰락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단 한 번이라도 좋아요. 내가 겪었던 좌절과 통한에 당신 역시 고꾸라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내가 어찌 미쳐 갔는지 당신도 이해하겠지.”

해서천이 소리 내어 웃었다. 정말 미치기라도 한 것처럼 낄낄거리며 웃던 그가 곧 웃음기를 지우고 손에 든 술잔을 기울였다.

가득 차 있던 술이 그대로 땅을 향해 쏟아졌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바닥에 버린 해서천이 술잔을 제 발밑에 던졌다.

“제 마음이 이러하니 저는 평생 당신이 바라는 신하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술, 받지 않겠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잔이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해서천은 물기 어린 땅에 흩어진 조각을 짓밟으며 그대로 몸을 돌렸다.

누구도 해서천을 붙잡지 않았다. 따라나서는 사람도 없었다.

그는 홀로 환한 등불을 지나 저 멀리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그의 걸음이 늘 그랬던 것처럼 당당하고 고상했다.

* * *

해서천이 떠난 이후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던 연회장은 금세 그를 잊은 듯 떠들썩해졌다. 조금 전의 소란을 지우려는 것처럼 사람들은 더 크게 웃고 떠들었다.

담덕은 사람들이 술과 분위기에 취한 틈을 타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근위대원들이 담덕을 뒤따르려고 했지만 태림이 손을 들어 저지했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조심스레 담덕의 뒤를 따랐다. 태림이 나를 힐끗거렸지만 다행히 그는 내가 뒤따르는 것을 막지 않았다.

연회장에서 조금 멀어지자 금세 어둠이 찾아왔다. 드문드문 길을 밝히는 등불이 있었지만 방금 전까지 밝은 연회장 속에 있었던 탓인지 어둠이 더욱 짙게 느껴졌다.

나는 어둠 속에 반쯤 묻힌 담덕의 뒷모습을 따라 걸었다. 내가 뒤따르는 것을 눈치챘는지 담덕의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왜 따라와?”

담덕이 계속 앞으로 걸으며 물었다. 나도 계속 그를 따라 걸으며 대답했다.

“그냥. 네가 가니까.”

“내가 가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따라와?”

“응. 네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럴 건데?”

내 대답에 픽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담덕이 걸음을 멈췄다. 나는 멈춰 선 담덕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그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여.”

“그래?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알아챘구나.”

“다른 사람들은 몰랐을 거야. 나니까 알아보는 거라고.”

일부러 젠체하며 밝게 말했더니 담덕이 제 허리를 두르고 있는 내 팔을 풀어내며 돌아섰다.

마주 본 담덕의 얼굴은 어두웠다. 주변이 어두워서가 아니었다. 나는 그의 기분이 가라앉은 이유를 알 것 같아 손을 뻗어 그의 뺨을 매만졌다.

“해서천 때문이야?”

“응.”

“그리 보낸 게 마음에 걸려서?”

“그것보다는……”

담덕이 할 말을 찾기 힘들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뺨에 닿은 내 손 위에 제 손을 포개었다.

“상대가 굴복했어. 내가 바라던 결말이었으니 기뻐야 하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워.”

“그가 널 인정하고 충직한 신하가 되어 주길 바랐어?”

“그랬다면 기뻤겠지. 나를 그토록 부정하던 사람이 날 인정하고 충성을 맹세하는 거니까. 하지만 해서천이 그러리라 생각하진 않았어. 우린 너무나 오래 대립했고, 그 시간만큼 골이 깊어. 이런 식으로 마무리될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속이 시원하지 않은 거구나?”

담덕이 대답 대신 미소 지었다. 미소가 시원찮은 것을 보면 여전히 마음이 복잡한 모양이었다.

“뭐…… 원래 그런 거 아닌가?”

나는 웃으며 담덕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쉽고 마음에 차지 않는 결말이 현실적이지. 누구나 속 시원한 결말을 바라지만, 사실 그런 결말은 평생에 한 번 만나기도 힘들잖아. 그건 만들어진 이야기 속에나 존재하는 환상 같은 거라고.”

“그러니 이 찜찜한 기분은 당연한 것이라고?”

“담덕. 해서천 같은 대단한 자를 굴복시키면서 마음까지 편하길 기대했다니, 너무 욕심이 많은 거 아냐?”

나의 타박에 눈을 껌뻑이던 담덕이 씨익 웃었다. 조금은 개운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듣고 보니 그러네. 그리 대단한 자와의 결말이니, 마음까지 편하길 기대했던 건 내 욕심이겠지.”

“좋아. 이제 마음이 조금 풀린 것 같으니 제단으로 갈까? 이른 아침부터 제관이 기원제를 준비하며 기다리고 있어.”

“그래. 하늘의 뜻을 읽는 이를 오래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

담덕이 내 손을 붙잡고 제단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나는 담덕과 나란히 걸으며 별이 뜬 하늘을 바라보았다. 밝은 등불 아래를 벗어난 탓인지 하늘을 무수히 수놓은 별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저 수많은 별 속에 빛을 잃어 가는 담덕의 별이 있다.

아직 담덕의 결말을 보기에는 이른 시간일 거라고. 아직 그의 마지막은 멀리 있을 거라고.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담덕의 손을 꼭 마주 잡았다.

* * *

담덕은 하얀 옷을 갖춰 입고 제를 주관하는 제관과 함께 제단 위에 섰다. 그 아래에는 다른 제관들이 등불을 들고 도열해 있었다.

동맹제나 기우제를 지낼 때 자주 보던 풍경이었다. 평소와 다른 것은 제단 위의 등불 정도였다.

제단의 중앙에 커다란 등불 하나가 밝은 빛을 내며 일렁이고 있었는데, 그 등불을 호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제단의 모서리에 작은 등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제관은 모서리에 놓인 4개의 등에 차례로 불을 붙여 나갔다. 등불 하나가 타오를 때마다 제관이 하늘을 향해 기원의 말을 외쳤고, 아래에 도열한 제관들이 그의 말을 돌림노래처럼 따라 했다.

이런 의식을 믿지 않는 편이지만 공간을 울리는 제관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공연히 마음이 경건해진다.

그건 이들의 목소리에 담긴 소망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일까?

멍하니 의식을 지켜보고 있는 동안 제단 위의 모든 등불에 불이 켜졌다.

그러자 아래에 도열해 있던 제관들 중 다섯이 제단 위로 올라와 등불 앞에 한 명씩 섰다. 그들 역시 담덕처럼 새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제를 주관한 제관이 그들에게 무어라 당부의 말을 전한 뒤 담덕과 함께 제단을 내려왔다. 등불 앞에 선 제관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킨 채였다.

“제는 무사히 끝난 건가요?”

제관의 앞으로 다가가 질문하니 그가 빙긋 웃었다.

“하늘에 기원을 올렸으니 이제는 기다릴 차례입니다.”

“무엇을 기다리죠?”

“저 제단 위의 등불 말입니다.”

제관이 제단 위에서 타오르는 등불을 가리키며 설명을 덧붙였다.

“가장 큰 중앙의 등이 폐하의 별을 상징하는 불입니다. 보름 동안 중앙의 등불이 꺼지지 않고 무사히 타오르면 하늘에 우리의 뜻이 전해진 것입니다.”

“그 안에 중앙의 등불이 꺼지면요?”

“하늘께서 우리의 소망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그 뜻이겠지요.”

제관의 말에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보름 동안 불을 지켜야 한다니…….”

보름은 긴 시간이었다. 강한 바람이 불거나 거센 비가 내리면 불은 금세 꺼지고 말 것이다.

내 걱정을 읽어 냈는지 제관이 부드럽게 웃었다.

“불가능하다 생각하십니까?”

“등불을 하루 꼬박 태우는 것도 힘들지 않습니까. 조금만 정신을 놓고 있으면 금세 불이 꺼지는데요.”

“예, 맞습니다.”

제관이 나의 불만에 순순히 동의했다.

“하지만 하늘이 폐하의 별을 보호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저 등불은 보름 동안 타오를 겁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 그것이 하늘의 뜻이지요. 하늘의 뜻은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등불을 바라보니 어느새 그 앞에 앉은 제관들이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싼 동서남북 네 개의 등불은 보름 동안 별을 위협하는 액운을 막아 줄 방패입니다. 폐하의 명과 세를 위협하는 네 번의 위기를 무사히 넘기게 해 줄 불이지요.”

“그럼 등불을 더 많이 놓으면 안 되나요?”

백 개의 등불을 켜면 백 번의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다는 뜻 아닌가. 그렇다면 등불을 많이 켜는 것이 유리했다.

하지만 제관은 고개를 저었다.

“하늘은 많은 기회를 주지 않는답니다.”

결국 네 번이 한계라는 뜻이었다.

이왕 기회를 줄 거라면 많이 주면 안 되는 건가?

“폐하의 운을 믿고 하늘의 응답을 기다려 주십시오. 간절한 소망은 결국 하늘에 닿는답니다.”

그렇게 말한 제관이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하늘을 향해 기원의 소리를 올렸다. 그러자 제관의 뒤에 도열해 있던 이들이 그의 말을 똑같이 따라 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들의 말을 따라 하며 담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설프게 미래를 알고 있으니 모든 것이 불안했다.

담덕이 언제, 어떻게 죽는지 알고 있다면 그 사건을 막아 볼 텐데.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는 것뿐이었다.

역시 한의학이 아니라 역사를 공부했어야 했어!

소용없는 후회와 함께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 * *

다음 날 소노부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해서천이 수장의 자리를 내려놓고 이를 해사을에게 넘긴 것이다.

“어제 그 말이 이런 뜻이었군.”

공적인 서신으로 전한 소식에 담덕이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내용은 간략했다. 나이가 들어 대단한 직위를 수행하기 힘드니 이만 낙향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난 어제의 선언을 조금 다르게 해석했었는데…… 권력은 포기했지만, 여전히 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니 앞으로도 계속 나와 대립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거든. 한데 아예 이 판을 떠나겠다는 뜻이었나.”

사실 나의 해석도 담덕과 비슷했다. 여태까지 지켜본 해서천은 왕위에 대한 욕심을 버려도, 이미 제 손에 쥔 권력까지 놓을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해서천이 깔끔하게 소노부의 수장 자리를 내놓았다.

은퇴한 해서천이라니?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술잔을 바닥에 버리고 돌아서던 해서천의 당당한 자태를 떠올려 보면 더 그랬다.

그는 여전히 정정했다. 늙고 쇠약해졌으나 여전히 귀족들을 휘어잡을 기운이 넘치는 호랑이였다.

“이렇게 물러설 사람은 아닌 것 같았는데.”

“내 생각도 그래. 낙향하겠다는 이에게 예의는 아니지만, 한동안 사람을 붙여 감시해야겠군. 이 서신이 진심인지 아닌지 가늠해 봐야겠어.”

나는 담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해서천의 서신이 진심이기를 바랐다.

가장 성가신 정적이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이 가장 컸지만, 한구석에는 가질 수 없는 것을 향해 불나방처럼 달려든 한 인간에 대한 연민도 있었다.

해서천은 야심만만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여태까지 그가 꾸며 낸 계략을 돌이켜보면 머리를 굴리는 솜씨가 보통은 아니었다.

다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원했던 권력을 손에 쥐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상대가 나빴다.

역사에 길이 남을 광개토 대왕을 끌어내려야 원하는 것을 손에 얻을 운명이라니.

가혹하다면 가혹한 운명이었다.

어떤 짓을 해도 넘어설 수 없는 벽을 만난 해서천의 기분은 어땠을까?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좌절하고 분노하다 끝내 체념하며 절망했을 것이다.

해서천뿐만이 아니었다. 담덕을 적으로 둔 모든 이들이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이를 갈았을 것이다.

당장 백제의 왕 아신의 얼굴이 떠올랐다. 담덕과의 전쟁을 치를 때마다 패배를 이어 가며 그도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을 실감했을 터.

직접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아신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는데. 한 나라의 왕이 될 만한 위엄이 있었다고. 그런데…….

“잘나도 너무 잘났어.”

나는 턱을 괸 채 담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백 년, 아니,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위인이니 당연히 대단하겠지.

내 말에 담덕이 눈을 껌뻑였다.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담덕. 이게 다 네가 너무 잘난 탓이야. 네가 적당히 잘났으면 주변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열등감을 느끼겠어?”

“뭐?”

“생각해 보면 정말 인간미 없단 말이야. 전쟁은 나가기만 하면 이겨, 내치를 할 때도 실수가 없어, 부인은 또 얼마나 고운지.”

“……마지막 말이 조금 이상한 것 같습니다, 부인?”

진지하게 내 말을 듣고 있던 담덕이 웃음을 터트리며 내 머리를 헤집었다.

“내게 유일하게 인간적인 부분을 찾으라면, 그게 바로 너라고 생각하는데.”

“음. 그 말은 다른 부분에서 인간미가 없다는 건 인정한다는 건가요, 폐하?”

“어느 정도는 그렇지.”

담덕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말했다.

“전쟁에서는 실수가 용납되지 않아. 한순간의 실수로 수백, 수천의 사람이 죽어 나가니까. 내치도 마찬가지야. 내 실수 하나에 나라가 흔들려. 어떻게든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고민하고 또 고민하지. 하지만 넌 아니잖아.”

나를 바라보는 담덕의 눈은 진지했다. 그의 눈빛에 내 입가에 맴돌던 장난스러운 미소가 자취를 감추었다.

“난 네 앞에서 실수하지 않으려고 애쓰지 않아. 어떤 것도 의식하지 않고 그저 내가 될 수 있어. 다른 사람들은 내게 완벽한 태왕을 모습을 요구하지만, 넌 내가 보잘것없는 사내라도 괜찮다고 해 주니까. 그러니 내가 태왕이 아닌 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순간은 네 앞에서뿐이야. 네가 없는 날의 나는 담덕이 아닌 고구려의 태왕일 뿐이거든.”

“틀렸어.”

“틀렸다고?”

나의 단호한 말에 담덕이 미간을 찌푸렸다. 제 말이 틀렸다는 지적을 받을 줄은 전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할 말이 아주 많았다.

“그래. 이젠 연이와 승평도 있잖아. 그 아이들의 앞에서 넌 태왕이 아니라 여느 아버지처럼 웃고, 당황하고, 고민하지.”

담덕은 아이들에게 친구 같은 아버지였다.

승부욕이 대단해서 내기를 하면 기를 쓰고 이기려 하고, 아이들과 함께 사냥을 나가면 누구보다 신이 난 얼굴로 활을 쏜다. 한 손으로 연과 승평을 번쩍 들어 올릴 때면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소년처럼 유쾌하게 웃기도 했다.

그건 모두 고구려의 태왕이 아닌 두 아이의 아버지 담덕으로서의 모습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런 부분들이 더 많아질 거야. 태왕이 아닌 담덕으로서 네가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매일매일 늘어나겠지. 연이와 승평이 혼인해서 아이를 낳아 봐. 그럼 넌 이제 할아버지로서의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음.”

내 말에 담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전부 네가 내게 준 것인데? 그러니 넌 여전히 나의 유일이야.”

그렇게 말한 담덕이 내 눈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그 웃음이 무척이나 예뻤다. 담덕처럼 커다란 사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였지만, 지금 이 웃음에는 예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어쩐지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나는 민망함에 고개를 푹 숙이며 외쳤다.

“아무튼, 그러니까, 내 결론은!”

“결론은?”

횡설수설하는 나의 외침에 담덕이 흥미롭게 되물었다. 나는 고민 끝에 진심으로 하고 싶었던 말을 그에게 전했다.

“……정말 오래 살아야 돼. 무병장수! 그게 가장 중요해.”

제법 진심이 담긴 말이었지만 담덕은 대수롭지 않게 흘려 넘겼다. 오히려 별 우스운 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젊고 건강한 태왕에게 늙은 노인에게 할 법한 이야기를 했으니까.

“결론이 뭐 그래? 오래 살라고? 무병장수?”

내 말을 되짚으며 한참이나 웃던 담덕은 내가 자신을 따라 웃지 않자 곧 웃음을 멈추었다. 내 말이 제법 진심이라는 걸 알아챈 것 같았다.

“역시 마음에 걸려? 내 별이 흐려졌다는 이야기? 너 원래 이런 거 안 믿잖아.”

고작 별 하나에 흔들린 마음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역사가, 그 역사가 말하는 담덕의 단명이 마음에 걸렸다.

“내가 널 두고 죽기라도 할까 봐 그래? 그런 일은 절대 없어. 난 꼭 너보다 나중에 죽을 거야.”

“그게 어디 사람 마음대로 돼?”

“인간미 없는 담덕이라며? 그런 사람이면 이 정도는 마음대로 할 수 있겠지.”

실없는 소리라는 걸 안다. 하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이 담덕이라서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쩍 벌리자 담덕이 웃으며 내 허리를 끌어당겼다.

“걱정하지 마. 널 외롭게 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테니까. 약속할게.”

* * *

담덕은 제단의 등불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고구려의 대소사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제관의 말에 따라 기원제를 지내기는 했지만, 사실 그 역시 나처럼 하늘의 뜻을 맹신하지 않는 축이었다.

애초에 그가 하늘의 뜻을 두려워하고 복종하는 사람이었다면 나와 국혼을 올릴 때 제관이 일러 준 길일을 몇 번이나 바꾸지도 않았을 것이다.

등불에는 개의치 않고 국내성 곳곳을 활보하는 담덕의 행보에 그를 지키는 근위대와 비로만 죽을 맛이었다.

특히 두 조직의 수장인 운과 제신은 마주칠 때마다 고생으로 얼굴이 핼쑥해 보였다.

“오라버니, 괜찮은 거 맞아?”

여러 사정으로 근래에 궁궐 출입이 잦은 제신은 더 얼굴이 좋지 않았다.

근위대야 평소 하던 호위 업무의 강도를 조금 더 높였을 뿐이지만, 비로는 감시하는 사람의 범위를 넓히는 바람에 일거리가 배로 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제신을 괴롭히는 건 비로의 업무만이 아니었다.

해서천의 은퇴 선언 이후 실질적으로 제가 회의를 이끌고 있는 백부가 제신에게 관직을 제안했다.

태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박사 자리였다.

사실 제신에게는 적합한 자리였다. 그는 아직 젊은 축이기는 했으나, 어린 시절 태학에서 수학하며 좋은 성과를 보였기 때문에 이만한 적임자도 없었다.

문제는 제신이 이미 비로의 수장이라는 요직을 맡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더 큰 문제는 일부 사람을 제외하고 누구도 그 사실을 모른다는 점이었다.

“괜찮지 않으면 어찌하겠어? 다 내가 자초한 일인 것을.”

제신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제 머리를 헤집었다. 제신의 말처럼 어느 정도는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모든 일은 제신이 ‘좋은 아가씨가 있으니 혼인하는 것이 어떠냐’는 백부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시작되었다.

나이도 제법 찼고 외모며 집안도 멀쩡한 제신이었다. 적절한 상대를 만나 혼인하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애초에 다로의 문제로 속앓이를 하지 않았더라면 혼인이 더 빨랐을 것이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백부는 제신이 비로의 수장이라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제신이 놀고먹는 한량인 줄로만 알았으니, 혼인을 시키기 전에 그를 번듯한 자리에 앉혀야겠다 생각했고, 그 결과가 태학박사였다. 이유가 그렇다는데 거절을 할 명분이 없었다.

그리하여 제신은 울며 겨자 먹기로 박사직을 받아들이고 얼마 전부터 태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태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연이 새로운 스승 제신에 대해 호평을 쏟아 내는 것을 보면 박사직이 적성에는 썩 맞는 것 같았다. 물론 그가 외숙부라는 점에서 가산점이 꽤 많이 들어간 평가였겠지만 말이다.

낮에는 태학박사로, 밤에는 비로의 수장으로.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지만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애매한 상황이었다.

사정을 알고 있는 비로의 대원들이 수장의 괴로움을 위로했지만, 말뿐인 위로는 그에게 큰 위안이 되지 못했다.

“그래도 어여쁜 부인을 맞게 되었잖아. 백부께서 중매를 제대로 하셨다며? 서가 부러워서 어쩔 줄 모르던데.”

나는 분노와 부러움으로 가득 찬 서의 서신을 떠올리며 말했다.

서의 말에 따르면, 제신의 부인이 될 사람이 절노부에까지 소문이 자자한 순노부의 미인이라 했다.

까다로운 백부가 고르고 또 고른 여인이었다. 서의 반응을 보면 제신에게 부족함 없는, 어쩌면 그에게 과분할지도 모르는 여인을 찾아왔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의 말에도 제신은 시큰둥했다.

“말로만 들었지 아직 얼굴 한번 본 적도 없다. 게다가 그런 소문이 어디 사실인 적이 있더냐?”

“그건 그렇지만.”

“너만 해도 봐라. 아버지께서 하도 자랑을 하고 다니신 탓에 도압성에서는 네가 고구려 제일의 미인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문이……”

“오라버니.”

나는 이어지는 제신의 말을 끊으며 씨익 웃었다.

“위로해 줄 때 조용히 위로를 받는 게 좋지 않을까? 어떻게든 오라버니를 도와주고 싶은 내 마음이 변하기 전에?”

의미심장하게 웃는 나를 보며 제신이 서둘러 말을 돌렸다.

“그, 아니, 뭐, 소문이라는 게 그렇다는 거지. 진실도 있고 거짓도 있고.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확신할 수가 없다, 뭐 그런 거 아니겠냐.”

제신이 횡설수설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지만 웃음도 잠시뿐이었다. 그는 곧 웃을 기운도 없다는 듯 초췌한 얼굴로 돌아와 탁자에 늘어졌다.

“후. 혼인은 무슨. 그 전에 과로로 죽게 생겼다.”

“비로의 수장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건 어때? 태학박사는 외부에 드러나는 자리라 쉽게 그만둘 수 없지만, 비로는 내부에서 조율이 가능하지 않아?”

“으음…….”

내 말이 혹하는지 잠시 고민하던 제신이 끝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맡길 만한 자가 없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

고민하는 동안 빠르게 비로의 대원들을 꼽아 본 모양이었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인물이 없어.

운이라면 잘하겠지만, 그는 이미 근위대장직을 맡고 있었다. 지설이 그랬듯 비로의 수장까지 겸직하긴 힘들었다.

태림도 역할 수행이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외부에 존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으니 비밀스럽게 움직이는 수장의 역할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어떻게든 승평 님이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을 때까지는 버텨 봐야지.”

“승평?”

“아. 지금은 이른 이야기인가? 하지만 10년만 지나도 충분할 것 같은데.”

“나이가 문제라는 게 아니잖아. 승평을 비로의 대원으로, 그것도 수장으로 생각하고 있어?”

나의 반응에 오히려 제신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로의 수장은 가장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긴다는 게 원칙이야. 우리 조카님은 폐하의 뒤를 이어 태왕이 될 사람이니 힘들고…… 승평 님은 먼저 비로의 대원으로 영입해 지켜본 다음 수장의 자리를 물려주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어린애를 두고 벌써부터 비로라니.”

“벌써부터 자질이 보이던데?”

승평이 총명한 아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배움이 빠른 데다 호기심도 대단해 지식을 빠르게 넓혀 가는 중이었다.

“게다가 부자와 형제의 정이 두터우니 신뢰 측면에서 가장 좋은 후보 아닌가?”

제신이 담백하게 말했다. 비로의 수장으로서 내리는 객관적인 평가였다.

하지만 나는 다분히 계산적인 그의 평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계산을 하기엔 연이도 승평도 너무 어려. 애들은 그냥 애들답게 크는 게 좋아.”

“두 사람은 평범한 아이들이 아니잖아.”

“평범하지 않다고 아이들이 아닌 건 아니잖아. 어른이 되기 전까진 아이답게 대할 것, 그게 내 원칙이야.”

“우리 황후께서 그러시다면야.”

제신이 과장스럽게 인사하며 고개를 숙였다. 장난스러운 대꾸였지만 내 말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는 아니었다.

“그럼 한동안은 이렇게 바쁘게 지내야한다는 거네.”

내 말에 제신의 얼굴이 다시 흙빛으로 변했다. 잠시 잊고 있었던 현실이 머릿속에 떠오른 것 같았다.

“문제의 보름만 지나면 나아질 거야. 그럼 잠잘 수 있는 시간 정도는 조금 늘어나겠지.”

“음. 백부께선 혼례도 최대한 빠르게 올리고 싶어 하시던데. 오라버니가 태학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았으니까 된 거 아니냐고. 그쪽에서도 최대한 빠르게 날을 잡자고 했대.”

“뭐? 빠르게? 얼마나?”

“정확한 날짜가 잡히면 오라버니에게 말씀하실 것 같은데.”

“아.”

제신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머리를 짚었다.

“설마…… 오늘 보자고 하신 이유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제신이 느릿한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백부께 가 봐야겠다.”

* * *

길게만 느껴졌던 보름은 생각보다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담덕이 흔들림 없이 평소와 같은 일상을 보내며 중심을 잡아 준 덕분이었다.

나는 매일같이 담덕의 맥을 짚어 그의 건강을 확인했다.

유난스럽게 보일까 봐 그간 담덕의 건강 문제는 태의에게 맡겨 두었지만, 마음에 한번 불안을 품고 나니 직접 그의 상태를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하늘의 별이 암시하는 불행이 세(勢)에 관한 것이라면 내 힘이 크게 쓸모가 없지만, 명(命)에 관한 것이라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터였다.

매일 밤 잠들기 전, 내가 맥을 짚을 때마다 담덕은 눈에 띌 정도로 싱글벙글이었다.

“왜 그리 웃어? 맥 짚는 것이 그리 재미있는 일도 아닌데.”

“그냥.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 싶어서.”

“이런 것?”

“보호받는 입장이 되는 거 말이야. 제단에 등불을 켠 뒤로 네가 꼭 날 지키는 용사가 된 것 같다.”

“널 보호하는 사람들은 많잖아. 근위대부터가 그렇고.”

“하지만 네가 날 지켜 주는 건 처음이니까.”

지금까지는 담덕이 나를 지키고, 나는 그의 보호를 받았다. 하지만 이번은 반대였다.

담덕에게는 그런 상황이 새롭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이런 걸 좋아하는 줄은 몰랐는데.”

“이 세상에 귀하게 여겨지는 걸 싫어하는 사람은 없어, 우희.”

“난 늘 우리 폐하를 귀하게 여기는걸?”

“글쎄. 그랬던가?”

장난스러운 담덕의 대꾸가 얄미워 그의 등을 내리쳤다. 하지만 근육으로 채워진 담덕의 몸은 바위처럼 단단해서 괜히 내 손만 아팠다.

“아!”

그리 큰 비명도 아니었다. 혼잣말에 외마디 소리와 함께 얼얼한 손목을 붙잡으며 미간을 찌푸리자 담덕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다친 거 아냐?”

장난기로 가득했던 담덕의 얼굴이 순식간에 걱정으로 물드는 것을 보니, 이번에는 내 차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일부러 더 아픈 척 울상을 지었다.

“모르겠어. 너무 아파.”

“어디가 아픈데? 손목?”

“응.”

“어디 봐. 접질린 거 아냐?”

담덕이 다급하게 내 손목을 이리저리 매만졌다.

평소에는 검을 잡던 투박한 손이 손목을 매만질 때마다 몸 전체가 간지러워졌다.

“부어오르지는 않았는데…….”

커다란 사내가 몸을 숙여 작은 손 하나를 붙잡고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퍽이나 귀엽게 느껴졌다.

이 사람이 전쟁터에서 날고 기는 무신(武神)이라는 사실을 누가 믿을까?

“푸훗.”

결국 나는 오래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내 웃음소리에 손목을 살피던 담덕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미소 가득한 내 모습을 본 그의 얼굴에 안도와 원망이 동시에 스쳐 갔다.

“거짓말이었어?”

“거짓말하진 않았어. 정말 아팠단 말이야.”

나는 씩 웃으며 손가락으로 담덕의 팔을 쿡쿡 찔렀다.

그의 팔에 가득 찬 근육이 내 손가락을 가볍게 밀어냈다. 나 같은 사람이 이런 몸에 정면으로 달려들면 어디 한 군데가 부러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난 역시 이쪽이 좋은 것 같아.”

“이쪽?”

담덕이 물었다. 나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보살핌 받고, 귀하게 여겨지는 쪽.”

내 말에 담덕이 제 팔을 찌르는 손을 잡아 내리며 픽 웃었다.

“나쁘지 않네. 사실 나도 이쪽이 좋거든.”

“이쪽?”

이번에는 내가 물었고, 담덕이 웃으며 대답했다.

“널 보호하고 귀하게 여기는 쪽.”

담덕이 웃는 낯 그대로 내 손등에 입술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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