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장. 시대의 군왕(君王)
말 그대로 총력전이었다. 고구려를 침략한 백제와 왜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 생각한 듯 온 힘을 다해 싸웠고, 우리 역시 이를 막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상황은 마냥 낙관적이지 않았다.
그간 고구려는 후연과 길고 긴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곧 후연과 일전을 벌일 계획으로 많은 병력을 후연의 연군(燕郡) 쪽으로 이동해 놓았는데, 그 시기를 놓치지 않고 연합군이 쳐들어왔다.
북방의 전선 역시 얼음 위를 걷는 듯 위태로운 상황이라 많은 병력을 빼내 올 수 없었다. 때문에 담덕은 급하게 일부 병력을 귀환시킨 뒤 백제와 왜의 연합군을 상대해야만 했다.
이번 연합군의 침입은 지난 침략들과 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지금까지 백제는 북으로 향하기 위해 임진강 방어선을 무너뜨리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이번 공격은 임진강 방어선이 아닌 대방 지역을 향했다. 대규모의 병력이 배를 타고 와 고구려 땅 깊숙한 곳에 상륙한 것이다.
담덕은 어렵지 않게 연합군의 의도를 알아챘다.
-아마 우리의 보급로를 끊어 낼 생각이겠지.
대방 지역은 국내성과 임진강 이남의 땅을 연결하는 통로였다. 이곳을 차지하면 보급로가 끊겨 임진강 아래에 위치한 고구려 요새들을 무력화할 수 있었다.
연합군이 수군을 움직였으니 우리도 수군으로 대응해야만 했다. 고구려는 기병 중심의 군대로 수군이 약하다는 편견이 있었지만, 담덕은 지난 전쟁들에서 수군을 훌륭하게 운용해 낸 전력이 있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천해의 요새 관미성이 있었다. 백제의 손에 있을 때 지독하게 우리를 괴롭혔던 그 요새가 이번에는 우리의 방패가 되어 줄 터였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쪽이 우리의 보급을 끊으려고 한다면, 우리 역시 그들의 보급을 끊어 줘야지. 추가적으로 대방 지역에 도달하는 연합군의 보급선을 모두 차단해야 해. 그럼 대방 지역에 고립된 병력들은 서서히 궤멸하겠지.
이를 위해 담덕은 먼저 수군을 압록강에 보내고, 자신은 육로를 통해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평양성으로 향했다. 평양성은 육로와 해로 모두에 접근성이 좋아 이번 전쟁의 거점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연합군과의 전쟁이 장기화되면 후연과의 전쟁에서 손해를 피할 수 없었다. 때문에 담덕은 초반부터 매섭게 연합군을 몰아붙였다.
침략 초기 대방 지역을 확보했던 연합군은 추가 보급 없이 고립되어 어려운 싸움을 이어 가더니, 결국 고구려군의 매서운 기세에 조금씩 무너져 나갔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연합군의 작전은 처음부터 위험성이 많았다. 고구려 병력 대다수가 북방에 배치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시도조차 불가능했을 방법이었다.
하지만 아신에게도 선택권이 없었을 것이다. 정면으로 부딪친다면 필패가 예견된 상황이었다.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엿보이는 도박에 모든 것을 거는 수밖에 없었겠지.
그러나 아쉽게도 그들의 도박은 실패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하늘은 아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마도 아신이 간절하게 바랐을 단 한 번의 승리. 하늘은 그 한 번의 승리조차 아신에게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땅에는 하늘을 수놓은 별처럼 수많은 나라들과 그 나라를 이끄는 군왕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하늘이 승리를 허락하는 별은 언제나 단 하나뿐.
나는 미래를 알고, 그리하여 하늘이 선택한 단 하나의 별이 누구인지도 안다.
고구려의 태왕 담덕.
그가 바로 이 시대가 선택한 군왕이었다.
* * *
연합군을 완전히 물리치고 난 뒤에도 담덕은 국내성에 돌아오지 못했다. 고구려가 남쪽에서 연합군과 요란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연이 남하를 시작한 탓이었다.
연합군과 싸우느라 일부 병력이 빠져 있던 상태라 기세 좋게 내려오는 후연을 막을 길이 없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요동성까지 도달해 고구려를 위협했다.
후연의 군대는 모용희가 직접 이끌고 있었다. 상대 쪽 왕이 나섰다면 우리도 왕이 나서야 균형이 맞았다.
때문에 담덕은 연합군과의 전투를 마무리 지은 후 곧장 요동성으로 향했다. 새해가 밝아 영락 15년의 일이었다.
2년 전 직접 병력을 이끌고 후연을 친 이후 담덕의 후연전 첫 친정이었다. 그간 담덕은 후연과의 공방전에 직접 나서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였다.
담덕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될 정도로 후연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모용희의 폭정 때문이었다.
고운은 후연에 머무르고 있는 우리 쪽 세작을 통해 모용희의 행보를 자세히 전해 왔는데, 전해지는 소식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뿐이었다.
지난해 모용희는 정무가 아닌 소의 부융아의 간병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가 곧 죽을 사람처럼 심하게 앓아누운 탓이었다.
부융아가 앓아누운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모용희는 어떻게든 부융아를 살리겠다고 각지를 수소문해 용한 의원을 찾았으나, 병이 심각한지 선뜻 그녀를 고치겠다고 나서는 의원이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용성 출신 의원 왕온(王溫)이 소의를 살려 보겠다고 나섰다. 모용희는 반갑게 그를 맞이했지만 심혈을 기울인 치료도 소용없이 소의가 사망했다.
총애하는 소의의 죽음에 분개한 모용희는 왕온의 사지를 찢어 불태웠다. 잔혹한 처사에 후연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민심이 크게 흔들리는 상황에서 후연이 힘을 쓸 수 있을 리 없었다. 담덕은 이를 믿고 연군까지 병력을 보냈다.
중간에 연합군의 공격이 없었더라면 끝까지 병력을 물리지 않고 그대로 후연을 공략했을 것이다. 하지만 주변의 상황이 어려워 병력의 일부를 철수시켰고, 모용희가 이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소의를 잃은 분노를 전쟁으로 해소하려는 것처럼 맹렬하게 고구려로 향했다.
썩어도 준치라고, 모용희는 대를 이어 우리 고구려를 괴롭힌 후연의 군주였다. 녹록하게만 볼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으니, 그가 친정을 결정한 이상 담덕이 상대로 나서는 것은 당연했다.
나는 담덕의 승리를 기원하며 연이은 전쟁으로 어수산한 국내성의 분위기를 바로잡으려고 애썼다. 그것이 지금의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전쟁을 숙명처럼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전쟁을 즐기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에게 전쟁은 오로지 살아남기 위한 수단일 뿐.
아마 다른 나라 백성의 사정도 비슷할 터였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는 많은 곡식이 군대에게로 보급된다. 적과 맞서 싸우는 용사들의 배를 곯릴 수 없으니 우선적으로 전쟁터에 식량이 보내졌다.
고구려는 대부분의 시간을 전쟁으로 보냈다. 그러니 자연스레 일반 백성이 먹을 식량이 늘 부족했다.
그나마 담덕이 즉위한 이후에는 가뭄이나 기근이 적어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선대왕 시절에는 툭하면 가뭄이 오는 바람에 매번 중앙의 창고를 열어 쌀을 나눠 주어야만 했다. 그 점이 선대왕의 내치를 더욱 힘들게 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밖이 소란스러울수록 내치가 중요했다. 그러니 내가 국내성에 남아서 할 일은 식량에 대한 고민이었다.
나는 농사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다. 전생에서는 한의사, 지금은 팔자 좋은 귀족 아가씨였으니 어떤 삶에서도 농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당연히 쌀을 잘 키우는 방법 같은 건 배우지 못했다.
대신 나는 산과 들에 자라는 식물들 중 어떤 것을 먹어도 괜찮은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약초와 독초를 구분하는 건 한의학의 기본이었으니 아주 간단했다.
쌀과 콩만 식량이 아니었다. 시야를 조금 더 넓혀 보면 산과 들에서 나는 모든 것들이 훌륭한 식량이었다.
하지만 산과 들에서 자라는 식물들은 독성이 있는 경우가 많아서 이에 무지한 사람들이 곯은 배를 채우려다 비명횡사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먹어도 좋은지 구분하는 방법을 알려 주면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시발점이었다.
나는 담덕이 전쟁에 집중하는 동안 국내성에서 도감을 만들기 시작했다. 먹어도 좋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아마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다. 하루아침에 끝날 일은 아니었지만 천천히 시간을 들여 완성해 볼 생각이었다. 어차피 황후로서의 일상에는 남는 게 시간이었다.
“자. 읽어 볼래?”
나는 여태까지 작성한 도감을 달래에게 내밀었다. 차를 따르던 달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다는 걸 깨닫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지금 제게 읽어 보라 하신 겁니까?”
“그럼 여기 너 말고 누가 있니?”
“하지만 전……”
달래가 내 눈치를 살피며 우물거렸다.
“아시다시피 글을 모르는데요…….”
기실 달래뿐만이 아니었다. 이 시대에는 문맹률이 상당히 높아서 평민들 중에는 글을 아는 자가 드물었다. 귀족들 중에도 까막눈이 많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설마 그걸 모를까 봐? 괜찮으니 읽어 봐.”
내가 한 번 더 권하자 달래가 마지못해 도감을 받아 들었다.
“어?”
머뭇거리며 도감을 펼친 달래가 눈을 크게 떴다.
“글이 아니라 그림입니다!”
“어때? 글을 몰라도 무슨 내용인지 알아보겠지?”
“그림을 못 알아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당연히 알아보지요. 그런데 무슨 그림들입니까?”
이 도감은 민간의 백성을 위한 것이니 실용성을 생각하면 어려운 글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글이 아닌 그림을 택했다.
“붉은 도감에 그려진 건 절대 먹어서는 안 되는 것, 푸른 도감에 그려진 건 먹어도 괜찮은 것들이야.”
달래에게 준 것은 푸른 표지의 도감이었다.
내 말을 들은 달래가 자신이 펼친 책의 표지 색을 확인하더니 놀라서 펄쩍 뛰었다.
“먹을 수 있는 것이요? 이걸 다 먹을 수 있다고요?”
“그럼. 땅에서 나는 모든 것이 귀한 식량이지. 조금만 조심하면 도처에 먹을 것이 있어.”
내 말에 잠시 생각하던 달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적에 꽃을 따다 먹은 적이 있습니다. 생각보다 쓴맛이 강해서 먹자마자 뱉었지만요.”
“꽃도 좋은 식재료지. 하지만 함부로 먹었다간 큰일 날 수도 있어. 독을 품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잘 손질한 뒤에 먹어야 한다.”
“예에? 독이요?”
내 말에 달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세상에. 제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죽을 뻔한 겁니까? 꽃을 먹고 죽다니…… 세상에서 이보다 황당한 죽음이 어디 있겠습니까?”
“호들갑 떨기는.”
웃으며 달래를 타박했지만 그녀의 호들갑이 나쁘지 않았다. 담덕이 없어 고요한 국내성에서는 이렇게 곁에서 요란하게 떠들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역시 꽃은 먹는 것보단 보는 것이 낫습니다. 얼마 전에 보니 매화가 봉오리를 틔웠던데…… 꽃구경을 핑계 삼아 산책이라도 하시겠습니까? 이걸 만드시느라 온종일 안에만 계셨잖아요.”
달래가 도감을 탁자에 올려놓으며 물었다.
“온종일 안에만…….”
달래의 말을 듣자마자 간사하게도 몸이 비명을 질렀다. 어깨가 뻐근하고 눈도 뻑뻑했다. 일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피로가 밀려온 것이다.
“그래. 지금 내게는 바깥 공기가 필요해.”
“아무렴요.”
달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내 어깨에 두툼한 겨울용 포를 걸쳐 주었다.
“너무 두툼하지 않아?”
“무슨 말씀이세요? 아직 바깥 공기가 많이 차가운걸요.”
달래를 비롯한 궁인들은 온도계 없이도 정확한 온도를 맞추는 능력이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대로 옷을 입어 실패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이번에도 순순히 달래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어느 나무에 꽃봉오리가 올라왔어? 그쪽으로 가 보자.”
그렇게 물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순간 머리가 빙글 돌았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리니 옆에서 달래가 황급하게 손을 뻗어 나를 붙잡아 주었다.
“괜찮으십니까?”
달래의 손에 의지해 눈을 몇 번 깜빡이니 금세 시야가 돌아왔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달래의 손을 놓았다.
“아무래도 너무 오랫동안 앉아 있었나 봐.”
“어디 몸이 상하신 게 아닐까요? 얼굴도 창백하시고, 요즘 도통 기운이 없어 보이십니다. 식사도 잘 못하셨잖아요.”
“그거야…….”
담덕을 전쟁터에 보내고 나면 항상 그랬다. 걱정이 많아져 입맛이 뚝 떨어지고, 신경이 예민해져 잠을 제대로 못 잤다. 매일 그렇게 보내고 있으니 몸에 기운이 없는 건 당연했다.
“안 되겠습니다. 태의를 불러와야겠어요.”
이런 호들갑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내가 반대하기도 전에 달래가 피할 수 없는 이유를 댔다.
“폐하께서 돌아오셨을 때 건강한 모습으로 맞이하셔야지요.”
담덕의 이름이 나오니 나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이자 달래가 웃으며 밖으로 나섰다.
“그럼 태의를 모셔 오겠습니다. 산책은 태의를 만난 뒤에 하셔요.”
* * *
달래가 무슨 말을 했는지 태의가 나보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처소에 들이닥쳤다. 달래가 어찌나 야단스럽게 굴었는지, 태의가 긴장한 얼굴로 내 상태를 살폈다.
“요즘 도통 식사를 못 하신다고요?”
태의가 내 맥을 짚으며 물었다.
“매번 그렇지. 폐하께서 위험한 곳에 계시니 내가 어찌 마음 편히 식사를 하겠어?”
나도 전쟁터가 어떤 곳인지 안다. 먹을 것이며 잠자리가 모두 열악했다.
담덕의 성격상 병사들을 두고 혼자만 호사스러운 취급을 받을 리 없었다. 그들과 똑같은 식사를 하고, 그들 사이에 섞여 잠을 잘 것이다.
그러다 ‘폐하께서 여기서 주무시면 저희가 불편해서 잠을 못 잡니다!’ 하는 병사들의 투덜거림에 마지못해 제 막사로 걸음을 옮기겠지.
보지 않아도 뻔한 풍경이었다. 그 풍경을 상상하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태의가 내 손목에서 손을 뗐다.
“마마.”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제법 심각했다. 무엇인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직감한 달래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마마께서는 의술에 일가견이 있으시지요. 혹, 평소와 몸 상태가 다르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셨습니까?”
“평소보다 식욕이 없고 몸이 무겁긴 해. 하지만 이건 폐하께서 출병하셨을 땐 늘 그랬던 거라…….”
단순히 심리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걸까?
나는 내 손으로 직접 손목을 붙잡았다. 지그시 눈을 감고 손끝에 닿는 맥에 집중하니, 태의가 심각해졌던 까닭을 금세 알 수 있었다.
“최근에 달거리를 하셨습니까?”
“달거리는 없었지만, 이것 역시 늘 불규칙한 편이라…….”
태의와 나의 대화에 심각해졌던 달래의 얼굴이 밝아졌다. 태의가 달거리 여부를 물을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회임하신 겁니까?”
달래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지만 나는 손을 들어 그녀를 저지했다.
연을 가졌을 때도 외관상으로는 전혀 임신의 징후가 보이지 않았다. 입맛이 떨어지거나 달거리가 없는 것도 주변 상황이 좋지 않을 때면 늘 있던 일이다.
“두 사람 모두 확실해질 때까지는 입단속을 잘하시게.”
나는 전쟁에 집중하고 있는 담덕에게 확실하지도 않은 소식이 전해져 그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후연은 만만치 않은 상대이니, 그들과 대치한 상황에서는 오로지 승리만을 생각하고 움직여야만 했다.
“예, 마마. 걱정 마십시오.”
내 뜻을 이해한다는 듯 태의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약을 지어 올리는 것은 허락해 주십시오. 근래에 몸이 많이 허해지셨으니, 어떤 이유에서든 몸을 보하는 약을 드셔야 합니다.”
“어찌 그것까지 막겠나.”
나의 대답에 태의가 만족한 얼굴로 물러났다. 하지만 달래는 납득하지 못한 듯 부루퉁한 얼굴로 내 옆에 다가왔다.
“어찌 회임하신 걸 알리지 않으세요?”
“아직 확실하지 않잖니.”
“확실하지 않긴요! 달거리도 없으셨고, 입맛도 없다 하시고, 맥도 그렇다는데. 이게 회임이 아니면 뭡니까?”
달래의 말이 모두 옳았다. 확실하지 않아서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 나도 거의 확신한 상태였다. 나를 진맥하고 돌아간 태의도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단단히 입단속을 시킨 건 배 속의 아이가 갖는 의미 때문이었다.
연은 담덕의 아이지만 내가 밖에서 낳아 온 아이다. 담덕이 연을 제 아이로 인정하고 입적한 뒤에도 더러운 소문들이 줄을 이었다.
밖에서 데려온 건 승평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승평은 연보다 상황이 나빴다. 연에게는 절노부라는 뒷배가 있었지만, 승평은 출신조차 불분명했다.
그간 제가 회의의 귀족들이 승평을 지지했던 것도 그의 정통성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뒷배가 없는 왕자를 자신들이 휘두르기 좋다 생각해서였다. 여차하면 정통성 문제를 내세워 계루부의 다른 핏줄을 데려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배 속의 아이는 다르다. 이 아이는 나와 담덕이 혼인한 뒤 가지게 된 아이였다. 출생에 어떠한 흠결도 없는 완전한 태왕의 핏줄이라는 뜻이었다.
이 아이가 태어나면 담덕의 후계는 더욱 단단해져.
담덕에게는 기쁜 소식이었지만, 그의 적들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특히 소노부가 이를 갈 것이다.
담덕이 국내성을 비운 상황에서 그들이 먼저 이 소식을 접하게 된다면…….
나는 정치적인 셈에 약한 편이었다. 그럼에도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 속의 아이가 안정기에 접어들 때까지, 담덕이 국내성으로 돌아와 든든한 방패가 되어 줄 수 있을 때까지.
임신 소식은 최소한의 사람만 아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달래에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달래야, 오늘 보고 들은 것은 폐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비밀이야. 알겠니?”
진지한 나의 당부에 달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 * *
요동성의 상황이 좋지 않았다. 순식간에 밀려 내려온 모용희의 군대에 요동성은 담덕이 도착하기 전부터 함락 위기에 처해 있었는데, 담덕이 도착하고 난 뒤에도 일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도 패배를 생각하지 않았다. 고구려의 태왕은 이제 승리의 상징이었다. 사람들은 담덕이 나타난 이상 어떻게든 승리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정공법으로만 이겨 내기에는 전황이 너무 불리했다. 힘으로 이겨 낼 수 없다면 계책을 써야만 한다.
담덕은 세작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후연에 심어 둔 고구려의 가장 강력한 세작, 다로였다.
소의 부융아가 죽은 후 모용희는 홀로 남은 부훈영에게 더욱 절절해졌다. 그녀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기꺼이 들어주었고, 그녀의 말 한마디에 중요한 결정을 스스럼없이 내렸다.
전쟁도 마찬가지였다. 모용희는 친정을 할 때마다 황후인 부훈영과 함께했다. 황후가 전쟁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다 청을 올렸기 때문이었다.
황후는 전쟁터에 유람이라도 나온 듯 모용희의 옆에서 전투를 구경했다. 전쟁을 놀이처럼 여기는 사람 같았다.
조용히 구경만 했다면 큰 문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종종 모용희의 귀에 말도 안 되는 청을 속살거렸다.
하나 남은 황후가 애틋해 어쩔 줄 모르는 모용희는 그녀의 말을 모두 들어주었다. 그리하여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종종 벌어졌다.
누가 보아도 전력이 기우는 상황에서 후연의 병력을 투입해 보라고 하여 대규모의 병력을 잃게 하거나, 승리가 확실한 상황에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뜸을 들여 상대가 반격할 시간을 주거나 하는 일들이 생겼다.
후연의 군대는 강했지만 그런 어이없는 짓을 벌이고도 승리할 만큼 무적은 아니었다.
부훈영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말들이 후연을 패배로, 또 쇠락의 길로 이끌고 있었다.
이번 요동성 전투도 마찬가지였다. 후연으로서는 승리가 확실한 상황에 모용희가 성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버텼다.
황후가 연(輦:왕이 이동할 때 타고 다니는 가마)을 타고 성안에 들어가야겠다 주장한 탓이었다.
요동성은 주변 지형이 험하고 성벽이 견고한 요새 중의 요새였다. 그런 곳에 연을 타고 들어가겠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모용희는 황후의 청을 들어주었다.
연을 준비하고 길을 내는 동안 고구려는 성을 보수하고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을 벌었다. 그사이 담덕이 도착해 바닥에 떨어졌던 사기까지 하늘을 찔렀다.
상황이 달라졌음을 깨달은 후연군이 뒤늦게 공격을 개시했지만 이미 승기는 고구려로 넘어와 있었다.
결국 모용희는 요동을 탈환하지 못하고 빈손으로 발길을 돌렸다. 다 잡은 승기를 어이없이 놓쳐 버린 탓에 돌아가는 군대의 분위기가 장례를 치르는 듯 우중충하다고 했다.
그에 반해 고구려는 축제 분위기였다. 연이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쥐었을 뿐만 아니라, 요동성을 훌륭하게 지켜 내며 요동 지역이 고구려의 영향권 아래에 있음을 다시 한번 증명한 것이다.
신라는 속국이나 다름없었고, 백제는 재기를 꿈꾸지 못할 만큼 완전히 무너뜨렸으며, 후연마저 내부에서부터 몰락하고 있었다.
이제 이 시대의 패자(霸者)가 고구려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요동성에서 귀환하는 군대를 맞이하는 환영 행사는 평소보다 더 크고 화려하게 준비되었다.
공식적으로는 병사들의 귀환을 환영하는 행사였지만, 사실은 고구려가 이 땅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보여 주는 자리였다. 준비에 부족함이 있어서는 곤란했다.
준비를 주도하는 건 제가 회의였다. 예전이라면 소노부의 해서천이 목소리를 높였겠으나, 그가 영의 죽음 이후 두문불출하고 있어 유일한 고추가인 백부가 제가 회의를 주도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이처럼 순조로운 날이 오랜만이라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던 와중에 제관(祭官)이 나를 찾아왔다. 담덕이 있다면 응당 그를 찾았겠지만, 그가 외부에 있는 상황이라 나를 찾은 듯했다.
제관은 고구려의 모든 제를 주관하는 사람이었다. 이 시대에는 여전히 ‘하늘의 뜻’이 중요했으므로, 하늘과 소통하고 제를 올리는 제관의 입김이 상당했다.
나는 예의를 갖춰 제관을 맞이했다. 역시 예의를 갖춰 내게 인사한 제관이 조금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祭)를 올려야겠습니다.”
“하지만 제를 올릴 시기가 아닌데요.”
제관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구려의 가장 큰 제사는 매년 10월에 열리는 동맹(東盟)이다. 수확을 기념하며 하늘에 감사제를 올리는 것이다.
그 외에도 비정기적으로 크고 작은 제들이 있었다. 대부분은 농사를 위해서였다.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홍수가 걱정이면 기청제를 올렸다. 출병하는 군대의 승전을 위해 기원제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시기에 맞지 않았다.
“예. 하지만 하늘의 흐름이 심상치 않아서…….”
사실 나는 하늘의 흐름이라는 걸 믿지 않았다. 현대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비가 오고 내리는 건 하늘의 뜻이 아니라 과학적 현상일 뿐이다.
하지만 이 시대 사람들에게 하늘의 뜻은 중요했다. 나는 고구려의 황후로서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하늘의 흐름이 어찌 안 좋은가요?”
“그것이…….”
가볍게 물은 질문에 제관이 곤란한 듯 말을 흐렸다. 기껏해야 날씨 이야기나 생각하고 있던 나는 더욱 의아해졌다.
눈으로 제관을 재촉하니 그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하늘에 폐하의 별이 있습니다. 저는 그 별을 폐하께서 태자로 책봉되시던 그날부터 지켜봤지요. 하늘에서 폐하의 별을 읽는 건 아주 쉽습니다. 고개를 들어 하늘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을 찾으면 그게 바로 폐하의 별이니까요.”
아직 낮이었다. 하늘을 바라보아도 별은 보이지 않을 테지만, 제관은 보이지 않는 별의 위치를 짐작이라도 하는 양 창밖의 하늘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혹시나 싶어 제관을 따라 고개를 돌려 보았지만, 예상했던 것처럼 푸른 하늘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데 얼마 전부터 폐하의 별이 희미해졌습니다. 일시적인 것이라 생각해 한동안 두고 보았으나, 후연을 훌륭하게 물리치신 후에도 별이 빛을 회복하지 않으니…… 더 이상 손을 놓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별이 희미해졌다는 건 무엇을 뜻하죠?”
“별의 빛은 곧 명(命)과 세(勢)를 뜻합니다.”
명은 목숨이고 세는 권력이었다.
이를 뜻하는 별이 희미해졌다는 건 둘 중 하나가, 혹은 둘 모두가 위태롭다는 뜻.
“그러니 그 빛이 희미해졌다는 것은……”
나는 손을 들어 제관의 말을 막았다.
불길한 이야기를 굳이 입 밖으로 꺼낼 이유는 없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나.
“이해했습니다. 제를 올리도록 하지요. 준비하세요.”
* * *
나는 곧장 제신을 찾았다. 모두 담덕이 무사하다고 말했지만, 내가 걱정할 것이 염려되어 일부러 전하지 않은 말이 있을지도 몰랐다.
제관의 말을 완전히 믿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불길한 이야기를 들은 이상 마음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담덕에게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걸 제신에게 제대로 확인받고 싶었다.
“말해 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무슨 일이라니?”
하지만 나의 재촉에 서둘러 입궁한 제신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정말 아무 일 없어?”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고. 갑자기 무슨 일? 뭘 말하는 거야?”
어리둥절한 얼굴이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진 않았다.
제신은 비로의 수장으로 누구보다 고구려 돌아가는 사정에 밝았다. 특히 담덕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일이 없었다.
그런 제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면 정말 별일이 없다는 뜻이었다. 나는 조금 안심해서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별일 없다면 다행이고.”
“무슨 일인데 그래?”
“오전에 제관이 나를 찾아왔어. 담덕의 별이 희미해져 불안하니 제를 올리고 싶다고.”
“폐하의 별이?”
제신의 눈이 커졌다. 그도 하늘의 뜻을 믿는 고구려 사람인지라 금세 얼굴이 심각해졌다.
“폐하의 별을 흐리게 할 일이라. 그런 건 없는데. 백제와 왜의 연합군은 이제 완전히 무너졌고, 후연도 다로가 잘해 주어서 소득 없이 물러갔지. 제가 회의는 백부께서 워낙 잘 잡고 계시니 문제가 생길 구석이 없고.”
“그렇지?”
“이것 말고 문제가 생기려면 소노부 쪽이겠지만…….”
“그쪽은 요즘 워낙 조용해서.”
“뭐, 수장인 해서천이 그 상태니까 말이야. 오늘내일한다는 소문이 파다하던걸.”
사나운 맹수 같던 해서천의 얼굴이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했다. 그랬던 자가 모든 세력을 잃고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었다니 기분이 묘했다.
“평생 담덕을 괴롭힐 정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팔과 다리를 모두 잃었으니…… 아무리 해서천이라도 방법이 없겠지.”
운은 해서천을 권력으로 향하게 할 다리였고, 영은 해서천이 권력을 잡게 할 팔이었다. 다리를 잃었을 때는 손이라도 뻗어 보았으나 팔마저 잃은 지금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었다.
“그럼 이제 좋은 시간만 남은 걸까?”
“왜? 지금까지는 좋지 않았어?”
제신이 짓궂게 물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좋았지. 지나치게 좋았어. 하지만 그렇게 좋은데도 마음 한구석엔 늘 불안이 있었어. 밖으로는 늘 전쟁이 이어지고, 안에서는 권력 싸움에…… 난 늘 불안했어. 우습지?”
“전혀 우습지 않아. 나 역시 매일이 불안한걸. 살아가며 불안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제신이 짓궂은 미소를 지우고 씁쓸하게 웃었다.
“모두가 그래. 매일을 불안 속에 살아. 지금 행복한 사람은 이 행복을 놓칠까 봐, 지금 불행한 사람은 이 불행이 계속될까 봐. 불안은 미래로 향하는 모든 인간의 숙명이야.”
“모든 인간의 숙명…….”
나는 제신의 말을 입안에서 굴려 보았다. 나 혼자만 불안을 안고 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자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하지만 넌 마음 편히 살아라. 이 오라비가 그렇게 만들어 줄 테니까. 특히 지금은 더 그래야 돼.”
제신이 나의 배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태의와 달래를 제외하고 나의 임신 소식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국내성에 남아 나를 호위하고 있는 태림에게도 임신 소식은 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태의가 드나드는 것이나 달래의 의심스러운 행동을 보며 대충 짐작을 하기는 한 것 같았다.
사실 길게 숨길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아직 초기라 외형의 변화가 크지 않았지만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배가 불러 올 것이다. 연을 가졌을 때에도 이맘때쯤 배가 부르기 시작했다. 담덕의 귀환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폐하께서 기뻐하실 거야. 처음을 챙겨 주지 못하셨으니, 그만큼 더 귀하게 대해 주시겠지. 매일 네 곁에 붙어 떨어지지 않으려 하시면 어쩌나 벌써부터 걱정이 크다.”
“설마 그러려고.”
“충분히 가능해. 폐하께서는 네 문제에 대해선 종종 비상식적인 결정을 내리시거든.”
제신의 말에 나는 임신 소식을 들은 담덕의 반응을 상상해 보았다. 연을 가졌을 때에도 비슷한 상상을 했었으나 상황이 이상하게 꼬이는 바람에 그에게 직접 임신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나는 황후로 담덕의 곁에 있었다. 담덕이 승전 소식과 함께 당당하게 국내성으로 귀환하면 우리는 첫 기회에 제대로 누리지 못했던 즐거운 순간을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태몽은 꿨어?”
담덕과 만날 순간을 상상하는 내게 제신이 물었다.
“태몽?”
“응. 연이를 가졌을 때는 꿈을 꿨다며? 용이 품에 안기는 꿈.”
“아. 이번엔 꿈을 꾸지 못했어.”
백제 땅에 있을 때 피눈물을 흘리는 용이 꿈에 나온 적이 있었다. 연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기도 전이었다.
처음에는 불길함을 알려 주는 예지몽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후에 연을 가진 사실을 알고 보니 태몽이었다.
태몽에 대해 들은 이리 부인은 배 속의 아이가 제 존재를 알리며 훗날의 위협까지도 함께 알려 준 것일 거라고, 참으로 영특하고 마음이 따뜻한 아이일 거라고 말해 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임신 소식을 듣고 난 후에도 특별한 꿈을 꾸지 못했다.
태몽을 가까운 사람이 대신 꾸는 경우도 있다기에 제신이나 서, 백부에게 묻기도 했는데 모두 특별한 꿈을 꾸지 않았다고 했다. 혹시 몰라 태림에게도 물었지만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폐하께서 태몽을 꾸셨을 지도 몰라.”
“그런 꿈을 꿨다면 당장 내게 서신을 보냈을걸. 담덕이 얼마나 아이를 갖고 싶어 했는데.”
“그런가? 그럼 이번에는 태몽이 없는 건가?”
아쉬운지 제신의 입꼬리가 아래로 축 처졌다.
그는 연의 태몽이 용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제 조카가 용의 기운을 타고났다며 뿌듯해했다. 생각보다 귀여운 구석이 있는 외숙이었다.
“아이가 그렇게 좋으면 오라버니도 혼인을 해.”
“백부님과 손이라도 잡은 게냐? 어째 백부님과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구나.”
제신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억울해져 두 손을 들었다.
“백부님께선 제가 회의로 바쁘신데 나와 말을 맞출 시간이 어디 있어? 오라버니의 혼인 이야기는 나이가 찼으니 자연스레 나오는 말이지. 이제 적은 나이가 아니잖아?”
적은 나이가 아니다 뿐인가. 나이는 차고 넘쳤다.
백부는 나와 제신의 혼사를 제 몫으로 여기고 있었다. 집안의 큰 어른이기도 하거니와, 아버지를 전쟁터에 내보낸 것이 자신이니 우리를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생각한 듯했다.
나의 혼사는 이미 해결되었고 남은 건 제신뿐이었다. 백부가 어찌나 제신의 혼사에 신경을 기울였는지, 아직 혼인을 못 한 서가 서운하게 여길 정도였다.
백부는 좋은 혼처가 생기면 제일 먼저 제신에게 찔러 넣었다. 아직 혼인을 하지 못한 서가 서운해하는 것은 당연했다.
-아버지. 누가 보면 제신 형님이 친아들인 줄 알겠습니다! 독수공방하는 이 아들은 신경도 안 쓰십니까?
-너보다 제신이 나이가 더 많으니 그쪽이 더 급하지 않느냐? 그리고 하는 알아서 연애도 잘하고, 혼인도 잘하는데, 너는 왜 이 모양이야? 언제까지 이 아비의 손에 의지할 셈이냐?
-아버지!
나는 소란스러운 부자의 대화를 떠올리며 웃었다.
“마음에 차는 아가씨가 없었어?”
“마음에 차지 않다니. 모두 내게 과분한 여인들뿐이었는데. 다만 지금까지는 내 마음이 너무 복잡했고…….”
제신이 멋쩍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하지만 이젠 다 정리된 거지?”
“응.”
제신이 시원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함께 술잔을 기울인 이후 그는 정말 오래된 마음을 털어 내버린 것 같았다.
“백부께서 또 다시 혼처를 가져오시면 그 사람과 혼인하려고. 네 말대로 이젠 적은 나이가 아니니까 나도 가정을 꾸려야지. 그래야 백부님께서도 이제 걱정을 놓으실 거고.”
“그걸로 괜찮은 거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그 사람과 혼인하면 제일 좋겠지. 하지만 모두 폐하와 너처럼 운이 좋은 게 아니니까.”
제신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차피 우리 5부의 귀족들은 집안에서 정해 주는 대로 혼인하는 게 익숙하니까. 백부께서 좋다고 생각한 여인이라면 나쁜 사람일 리 없고, 그런 사람이라면 나도 마음을 줄 수 있을 거야.”
꼭 첫 번째 기회를 이뤄야만 성공한 인생이 아니었다.
제신은 이미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곧 다가올 두 번째 기회를 잘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없었다. 나는 진심으로 제신의 행복을 바라며 그의 곁에 설 여인을 그려 보았다.
“백부께서 좋은 사람을 알아 오셨으면 좋겠다.”
제신의 지난 과거를 밝게 비춰 줄 화사하고 밝은 여인이라면 좋을 것 같았다. 고민과 감출 것이 많은 제신과 달리 마냥 해맑고 꾸밈없는 사람이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오라버니가 혼인하면 조금 서운할 것도 같아.”
“왜?”
“이제 나 말고 더 소중한 사람이 생긴다는 거니까 당연히 서운하지. 혼인하면 이젠 부인이 첫 번째가 될 거잖아. 오라버니는 내가 혼인할 때 서운하지 않았어?”
“그런 의미에서라면 당연히 서운했지. 내 누이에게 나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생긴다니 기분이 이상하더라고. 하지만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니 오히려 기뻤어.”
“다른 방향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데?”
내 질문에 제신이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우린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너와 나 단둘뿐이었잖느냐. 백부님과 사촌들이 있기는 해도 거리감이 있는 건 사실이고…….”
우리는 사촌들과 가까운 편이었다. 다른 집안 사람들이 친형제처럼 지낸다고 신기해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친형제와는 달랐다. 보이지 않는 미묘한 거리감이 느껴질 때마다 나와 제신은 더욱 똘똘 뭉쳤다.
“그런데 네가 혼인하고 새로운 가족이 생겼어. 하필 그 가족이 태왕 폐하라 불편한 점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어쨌든 난 좋아. 너와 나의 가족이 늘어난다는 게.”
“역시 오라버니는 아이를 많이 낳을 것 같아. 한 다섯 명쯤?”
“다섯 명? 나야 많으면 좋지만…… 여인들은 아이를 많이 낳는 게 힘들지 않나? 넌 어땠는데?”
“어…… 음…….”
제신의 말에 나는 잊고 있던 출산의 고통을 다시 떠올렸다. 오래전 일이라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애를 낳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나 아파서 죽을 뻔했는데. 속으로 담덕 욕도 몇 번 했고.”
“그 정도야?”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야. 확신해.”
내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맹세하자 제신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힘든 거라면 역시 둘이 좋겠어.”
“둘이 웬 말이야. 하나로도 충분해. 평생에 한 번이면 충분한 고통이라고.”
“하지만 넌 이미 두 번째를 앞두고 있는데?”
“……그러게.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내가 배를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리자 제신이 웃음을 터트렸다.
* * *
요동성을 지켜 낸 병사들의 귀환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행렬이 국내성 지척에 다다랐다는 소식에 성안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제가 회의는 귀환하는 태왕과 병사들을 위해 화려한 연회를 준비했고, 백성은 너 나 할 것 없이 거리로 나와 술을 나눠 마시며 승리의 기쁨을 누렸다.
온 국내성이 축제 분위기였다. 하지만 나는 제관과 함께 조용히 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태왕의 별이 불안해 제를 올린다는 소문이 퍼지면 적에게 빌미를 줄 뿐이었다. 나는 최대한 비밀을 지켜 제를 올리는 데 필요한 소수의 인원만이 이 사실을 알 수 있도록 소문을 막았다.
제를 준비하는 동안 담덕의 별이 다시 빛나길 바랐으나, 나의 소망과 달리 하늘의 별은 여전히 흐렸다. 제관의 표정도 흐린 별만큼이나 좋지 않았다.
“폐하의 별이 이처럼 오래 흐렸던 적은 처음입니다.”
제관이 밤하늘을 보며 불안하다는 듯 말했다. 그의 말에 나의 마음도 무거웠다.
미신을 숭배하는 것은 아니지만, 좋지 않은 소리를 듣고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을 정도로 무던한 사람은 아니었다.
“전쟁터에 나가 수세에 몰리셨을 때에도 언제나 밝게 빛나던 별이었습니다. 하여 모두가 불안해할 때 저만은 확신했었지요. 우리의 태왕께서 또 승리하실 거라고요. 한데 이번에는 승전보를 가지고 오셨는데도 별이 이리 흐리니…….”
제관이 하늘을 가리키며 내게 별의 위치를 일러 주었다.
“보이십니까? 제 손끝을 따라가면 한 무리의 별이 보이실 겁니다. 고구려 제왕의 별이 나는 자리지요.”
“제왕의 별이 나는 자리인데, 왜 하나가 아닌가요?”
“현재와 미래의 제왕을 모두 담은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폐하의 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왕자님들과 마마의 배 속에 있는 분의 별도 있지요. 폐하를 위협하는 경쟁자들의 별도 있습니다.”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제관에게는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말한 적이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 이야기가 샌 거지?
딱딱하게 굳어지는 내 얼굴을 보며 제관이 빙긋 웃었다.
“몇 달 전 하늘에 새 별이 떴습니다. 제왕의 자리에 새로운 별이 났으니, 마마께서 회임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했고요. 제가 잘못 읽은 겁니까?”
무해하게 웃고 있는 제관을 보니 경계심이 약해졌다. 본디 제관은 정치와 멀리 떨어진 자로 오로지 고구려의 미래를 위해서만 하늘을 읽었다.
“……그런 것까지 읽을 수 있습니까?”
“하늘이 일러 주는 이야기는 무궁무진하지요. 귀를 기울이면 수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내 경계심이 옅어진 것을 느꼈는지 제관이 다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무리의 중앙에 있는 것이 폐하의 별입니다. 그 옆으로 연 님과 승평 님의 별이 있지요. 그 아래에 보이는 별이 몇 달 전 새로 떴다는 별입니다.”
제관의 말을 따라 시선을 돌려 보니 네 개의 별이 사이좋게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저 별들의 주변으로 제가 이름조차 모르는 수많은 제왕의 별들이 있습니다. 이 땅에 왕의 재목이 이토록 많은 것이지요. 하지만 수많은 별들 중 가장 빛나는 별만이 제왕의 운을 가져갑니다.”
지금 가장 밝은 것은 연의 별이었다.
원래는 담덕의 별이 더 밝았겠지만…….
최근 알 수 없는 이유로 가장 중앙의 별이 흐려졌다. 제관은 이를 바로잡고자 제를 올리려고 하는 것이다.
나는 가만히 별들을 살펴보았다. 배 속의 아이를 상징하는 별은 아주 희미했다.
“새로운 별은 아주 희미하네요.”
“아직 태어나지 않으셨으니까요. 어머니의 몸 밖으로 나와 세상을 만나는 날, 저 별도 더욱 빛날 겁니다.”
제관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한참이나 별을 바라보았다.
제왕의 자리에는 뜨지 못했지만, 저 넓은 하늘 어딘가에 나의 별도 있을까?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제관이 웃으며 물었다.
“마마의 별을 찾으십니까?”
불안한 담덕의 별을 두고 내 별을 찾고 있었다니 어쩐지 민망해졌다. 하지만 제관은 나를 타박하지 않고 친절하게 반대쪽 하늘을 가리켰다.
“후(后)의 자리는 저곳입니다. 고구려 황후의 별들은 늘 저곳에서 나타났지요.”
나는 제관이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곳에는 어떤 별도 보이지 않았다. 어둡게 물든 하늘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니 제관이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즉위하신 뒤 후의 자리에 별이 뜬 적이 없습니다.”
“……예?”
“황후의 별이 없다는 뜻입니다.”
제관의 말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영문을 몰라 눈을 껌뻑이니 제관이 희미하게 웃었다.
“저는 항상 그것이 궁금했습니다. 어찌하여 황후마마의 별이 보이지 않는 것인가 하고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별은 모두 이 하늘에 있는데 말입니다.”
제관이 하늘을 한 번 훑어보았다. 맑은 하늘에는 수없이 많은 별들이 존재감을 빛내고 있었다.
그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별이라니.
나는 우희면서 소진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온전한 이 시대의 사람이 아니었다.
나의 사상, 나의 지식, 나의 성격.
많은 부분이 소진으로부터 왔으니 나의 별은 이 시대가 아닌 수천 년 후의 대한민국에 떴을 것이다.
당장이라도 제관이 ‘당신은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을 것만 같아서 심장이 쿵쿵 뛰었다.
하지만 제관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어쩌면 제가 후의 자리를 잘못 읽은 것일지도 모르지요. 나이가 늘어 천안(天眼:하늘을 보는 눈)이 무뎌졌나 봅니다.”
그렇게 말한 제관이 내게 당부했다.
“폐하께서 돌아오시면 이곳 제단으로 오셔야 합니다. 제를 올리기 전에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 * *
담덕 일행의 행렬이 성문을 통과했다. 군대가 국내성 가까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자리를 잡고 있던 사람들은 안으로 들어서는 병사들을 향해 꽃을 뿌리며 그들을 환영했다.
연회 준비를 마친 궁궐도 바쁘게 돌아갔다. 제가 회의의 주요 귀족들은 승전을 하고 돌아온 태왕을 맞이하기 위해 정복을 갖춰 입은 채 모여 있었고, 나는 담덕의 처소에서 목욕을 준비했다. 아이들도 오랜만에 담덕을 만나겠다고 잔뜩 들떠 있었다.
한참 목욕물에 집중하고 있으니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아무래도 담덕이 처소에 도착한 것 같았다.
담덕이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먼저 문을 활짝 열자, 손잡이에 손을 뻗고 있던 그가 놀라지도 않은 얼굴로 웃으며 나를 반겼다.
“우희.”
달로 치면 겨우 몇 개월이 지났을 뿐인데도 해가 하나 넘어간 탓인지 담덕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 같았다.
“놀라지 않았어?”
“왜 놀라? 기척이 다 느껴지는데. 욕탕에서부터 달려온 거잖아?”
담덕이 정확하게 나의 경로를 맞혔다. 나는 맥이 빠져 깊게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래서 용사들이란. 도무지 낭만이 없다니까. 이럴 땐 놀라기도 해 주고 그래야지.”
“다음엔 참고할게.”
담덕이 웃으며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가 곧 자신이 갑옷을 입은 상태라는 것을 깨닫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먼저 목욕부터. 지금은 너무 더러워서…… 오다가 늑대 떼를 만나서 피도 묻었고…….”
담덕이 어색한 얼굴로 변명을 쏟아 냈다. 나 역시 옷에 피가 묻는 건 사양이었다. 나는 감사히 담덕의 배려를 받아들여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목욕이라면 내가 준비해 뒀어.”
“같이 하는 거야?”
“그러고 싶지만 오늘은 일정이 많잖아. 당장 연회에 가야 해서 나도 준비를 해야 하고, 또…….”
날이 어두워지면 제를 올리기 위해 제단으로 가야 했다.
담덕에게는 비로를 통해 일러두었지만 궁인들이 들어서는 곤란한 이야기였다.
이어지지 못한 말 뒤에 남은 내 말을 알아챈 담덕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네. 연회는 무슨 연회야?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것이 한두 번도 아닌데.”
“다른 나라 왕들이 들으면 큰일 날 소리를……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
“하지만 사실이잖아?”
“그래. 그거야…… 사실이지만…….”
담덕의 이유 있는 자신감에 웃음이 터졌다. 보통 이런 경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며 타박을 해야 하는데, 담덕은 정말 이기고 돌아오는 게 일상이라 할 말이 없었다.
백제의 아신이 들으면 아주 배 아파할 소리였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담덕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섰다.
“목욕은 함께 못 하지만 갑옷 벗는 건 도와줄게.”
“준비하러 가야 하는 거 아니야? 바쁜 거면 나 혼자 할게. 혼자서도 할 수 있어.”
“담덕.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나.”
나는 과장스럽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원래 이러는 게 부부야.”
“뭐?”
“밥 먹는 거, 머리 빗는 거, 씻는 거. 전부 다 혼자 할 수 있는 건데, 굳이 내가 해주겠다는 핑계로 괜히 붙어 있는 거지. 갑옷 벗는 것도 마찬가지야.”
“그런 거야?”
“그래. 그런 거야. 그러니 내게 얌전히 네 갑옷을 맡겨.”
“예, 부인. 그렇게 하지요.”
고개를 치켜들며 하는 말에 담덕이 웃으며 등을 내주었다. 갑옷은 등 뒤에서 끈으로 복잡하게 묶여 있었지만, 남편을 숱하게 전쟁터에 보낸 내게는 풀어내는 것이 간단했다.
“참, 담덕.”
나는 등 뒤의 끈을 풀어내며 가볍게 담덕을 불렀다.
“응.”
부담 없이 부른 이름에 가벼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 목소리를 들으니 꺼내려는 이야기가 생각보다 쉽게 흘러나왔다.
“나 임신했어.”
“응. 그렇구……나?”
이번에도 가볍게 대답하려던 담덕이 뭔가 이상한 것을 깨닫고는 딱딱하게 굳었다. 더 이상의 말도, 작은 움직임도 없었다.
나는 딱딱하게 굳은 담덕의 뒤에서 태연하게 그의 갑옷을 모두 풀어냈다.
“다 됐어. 이제 목욕하러 가.”
그렇게 말하며 담덕의 등을 툭 쳤더니 그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돌아섰다. 돌아선 그의 얼굴이 여전히 멍했다.
“아직 정신 못 차렸어?”
“너 뭐라고 했어?”
“정신 못 차렸냐고 물었잖아.”
“아니, 그 전에.”
“목욕하러 가라고 했지.”
“아니, 그거 말고!”
“다 됐다고 한……”
이번에는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담덕이 두 손으로 내 뺨을 잡고 입을 맞춘 탓이었다. 그의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떨어져 나갔다.
“임신했다고 했지?”
“……들었으면서 왜 몇 번이나 다시 물어?”
“실감이 안 나서.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아? 네 입으로 다시 한번만 더 말해 줘.”
담덕이 잔뜩 기대에 찬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쩐지 민망해져 고개를 푹 숙이며 작게 웅얼거렸다.
“임신했어……. 몇 달은 됐는데…… 짐작 가는 날이 너무 많아서 언제 이렇게 됐는지는 모르겠고…….”
“언제인지가 뭐가 중요해!”
담덕이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발이 허공에 떠오르자 놀라서 나도 모르게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담덕이 허둥대며 나를 다시 땅에 내려놓았다.
“아, 이러면 안 되지. 안정…… 그래, 안정을 취해야지. 이렇게 돌아다니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왜 안 쉬고 나와 있었어? 연회에도 안 나오는 게……”
이번에는 내가 두 손으로 담덕의 뺨을 감쌌다. 까치발을 들어 어쩔 줄 몰라 허둥대는 담덕의 뺨을 감싸니 그의 입이 꾹 다물렸다.
“이봐요, 애 아버지. 이런 게 처음이라 당황한 건 알겠는데 그렇게까지 소란 피울 것까진 없거든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담덕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소란을 안 피울 수가 있냐고. 이렇게 기분이 좋은데.”
“그래도 조금 자제해 봐. 태왕께서 바보처럼 헤실거리면 체면이 안 서잖아. 곧 연회에도 가야 하는데.”
“그건 그렇지만.”
내 말에 납득한 듯 무표정한 얼굴을 연습하던 담덕이 곧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을 내쉬는 얼굴에 낭패감이 가득했다.
“아, 어떡하지? 표정 관리 못 할 것 같은데. 계속 웃음이 나올 것 같아.”
“그러게. 이미 웃고 있네.”
담덕이 그림처럼 씨익 웃으며 고개를 숙여 내게 입을 맞추었다. 다정하고 따뜻한 입맞춤에 담덕의 모든 말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