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유수 5권
31장. 빈자리
영을 죽은 것으로 위장해 데리고 나온다. 황당하게만 들리는 그 계획은 대수롭지 않은 나의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태왕을 지키는 근위대장 지설과 태왕의 가장 큰 적수인 해서천의 딸 영. 절대 이어질 수 없을 것 같았던 두 사람의 마음이 통했다니…… 로미오와 줄리엣이 따로 없잖아?
우연히 떠올린 소설 하나. 신기하게도 맞아떨어지는 이야기가 많았다.
줄리엣의 아버지는 그녀가 원수의 자식인 로미오와 사랑에 빠지자, 그녀를 서둘러 다른 사람과 결혼시킬 계획을 세운다.
줄리엣은 이를 피하기 위해 조력자인 신부가 건네준 약을 마시고 죽은 사람인 척 위장한다. 혼담을 파기하고 로미오와 멀리 도망가기 위해서였다.
적대적인 두 집안, 딸을 다른 곳으로 시집보내려는 아버지, 그것을 피하려는 여자. 지설과 영의 상황도 비슷했다.
이곳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재현하면 어떨까? 내가 줄리엣에게 약을 건네준 신부가 되는 거지.
하지만 소설과 현실은 다르다. 소설 속 줄리엣을 죽은 사람처럼 재운 약이 현실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슷한 약이라면 내가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완벽하게 심장을 멈추고 숨을 멎게 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맥과 호흡을 약하게 하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았다.
한의학은 일률적으로 약을 제조하지 않는다. 같은 처방이라도 사람의 몸 상태, 체질, 성향에 따라 사용하는 약재와 용량을 조금씩 다르게 한다.
그러니 약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건 그 사람의 몸을 아는 일.
다행히도 나는 영의 지병을 고치기 위해 수십, 수백 번이나 그녀의 몸 상태를 살핀 적이 있었다.
영의 지병을 고치는 데까지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지만 덕분에 그녀의 몸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다.
게다가 몇 번이나 처방을 바꾸는 동안 특정한 약재를 썼을 때 영의 몸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도 관찰했다. 그녀에게 맞는 약재와 그렇지 않은 약재를 구분해 기록으로 정리해 두었으니 재료는 제대로 차려진 셈이었다.
나는 작성해 두었던 기록들을 천천히 살펴보며 고민을 거듭했다.
영의 몸을 해치지 않으면서 일시적으로 맥과 호흡을 극도로 미약하게 하는 약이 필요해.
가장 핵심적인 약재는 역시 초오(草烏)였다. 초오는 용법에 따라 심장 박동수를 떨어뜨리고 맥박과 호흡을 약하게 하는 효능이 있었다.
또한 강한 진통 작용이 있어 마취에도 쓰였다. 술에 타서 마시는 초오산이 대표적인 처방이었다.
하지만 초오는 또 다른 목적으로도 쓰이지.
바로 독약이었다. 초오는 강한 독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용량에 따라 사람을 죽일 수도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사약의 재료로 초오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니 초오의 사용량을 세심하게 조절하는 것이 의원의 일이야.
나는 약재 배합에 많은 시간을 기울였다. 다른 약재들과 균형을 맞춰 초오의 비율을 정한 뒤 조금씩 양을 늘려 나갔다.
그렇게 나온 배합으로 탕약을 만든 뒤에는 임상 실험에 나섰다. 탕약을 직접 마시며 맥을 짚어 보니 초오의 비율을 늘려 갈수록 확실히 맥이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왜 직접 마시는 거야? 위험한 약재라며?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며?
-그러니 실험이 필요한 거지.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
-왜 굳이 그런 위험한 약재를 쓰는데?
-잘 쓰면 절대 위험하지 않아. 너도 초오를 쓴 적이 있을걸. 전쟁터에서 몸에 박힌 화살을 빼낼 때 고통을 줄이려고 초오산을 쓰거든. 생각보다 널리 쓰이는 약재야.
담덕이 불만스럽게 탕약을 노려보았다. 내가 직접 실험을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비율을 잘 조절하고 있으니 괜찮아. 게다가 내 환자에게 먹일 약이니 당연히 내가 시험해야지. 내가 안심하고 마실 수 없는 약을 환자에게 줄 수는 없잖아?
그 뒤로 담덕은 말이 없었다. 제 몸에도 쓴 약재라니 나를 막을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실험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생각보다 빠르게 적당한 배합을 찾아낸 탓이었다.
나는 손목의 맥이 아주 미세하게 잡힐 무렵 실험을 멈추었다.
의원이라면 이 정도 맥을 분명 짚어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은 나보다 몸이 약하니 지금의 나보다 맥이 더 미약할 터. 이 정도 배합으로도 우리가 원하는 효과를 충분히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약은 준비됐어. 남은 건 작전의 실행뿐이야.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종이 위에 계산한 만큼 약재를 올려놓았다.
* * *
“준비됐어요.”
나는 지설과 운에게 약첩을 건네며 짧게 말했다. 약첩을 받아 든 사람은 운이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간단해요. 영이는 매일 탕약을 마시잖아요? 기존의 약재와 제가 준 약재를 바꿔치기하면 돼요.”
“약을 먹으면 곧장 효과가 나타나는 겁니까?”
“짧으면 한두 시진(時辰), 길어도 반나절 이내에는 효과가 나타나요.”
내 말에 운이 창밖을 힐끗 쳐다보았다. 해가 가장 높은 곳을 향해 서서히 움직이고 있는 시간이었다.
“그럼 오늘 밤이 지나기 전에 결판이 나는 거군요. 한바탕 집안이 시끄러워지겠습니다.”
“부디 의원이 잘 속아 넘어가 줘야 할 텐데…….”
“너무 걱정 마십시오. 지금 영이를 봐 주고 있는 의원은 의술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라 쉽게 알아차리지 못할 겁니다.”
“고추가께선 어찌 그런 자에게 영이의 병을 맡긴 거예요?”
“실력 좋은 의원이 한 저택에 상주하며 사람을 돌보려고 하겠습니까? 한곳에 묶여 있을 사람을 찾다 보니 선택권이 없었지요. 그래서 약은 모두 바깥에서 지어 옵니다. 그자는 약을 달이고 긴급한 일에 대처하는 정도만 하고 있지요.”
그렇게 상황을 설명한 운이 이번에는 지설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점심에 약재를 바꿔치기하겠습니다. 그럼 해가 떨어질 무렵에는 일이 터질 겁니다.”
“이미 비로의 대원들이 준비 중입니다. 아가씨를 빼낸 뒤 빈소에 사고로 위장한 화재를 낼 겁니다.”
고구려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3년 동안 집안의 빈소에 시신을 안치하고 그사이에 무덤을 만든다.
지설은 죽은 듯 잠든 영이 빈소에 안치되어 있는 때를 노리기로 했다. 비로의 대원들과 함께 영을 빼내고, 비어 버린 빈소를 불에 태우는 것이다.
화재와 함께 영의 시체도 불타 버렸다 생각하게 만드는 계획이었다. 빈소는 지금 영의 처소보다 훨씬 경계가 덜할 것이니 어렵지 않게 성공할 수 있을 듯했다.
“영이를 데려오면 곧장 이걸 달여서 먹여요.”
나는 준비했던 또 다른 약첩을 지설에게 건넸다. 죽은 듯 잠든 영을 깨울 수 있도록 초오를 중화시키는 약재들로 배합한 약이었다.
“이 탕약을 마시면 맥과 호흡이 강해지고, 심장 박동이 회복되어 혈색이 좋아질 거예요.”
“예. 그리하겠습니다.”
“혹 탕약을 마셨는데도 맥과 호흡이 돌아오지 않거나 여전히 혈색이 창백하면 곧장 내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와요. 무엇인가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니까. 그 경우에는 시간이 생명이에요. 내게만 데려오면 꼭 영이를 깨어나게 해 줄 테니, 괜히 공황 상태에 빠지지 말고 침착하게 나한테 와요. 알았죠?”
내 말을 한자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진중한 얼굴로 듣고 있던 지설이 약첩을 꼭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것도 명심하겠습니다.”
“잘될 거예요. 전부 다요.”
“감사합니다.”
나의 격려에 지설이 희미하게 웃었다.
대단한 계획의 실행을 앞둔 터라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마음속에는 일이 잘 풀릴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렇게 좋은 예감이 들어서 일이 나쁘게 돌아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계획의 성공을 예감하며 기분 좋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해가 중천이었다.
* * *
나는 소노부에서 들려올 소식을 기다리며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다. 며칠간 약재 문제에 몰입하느라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어머니!”
승평은 처소로 들어서는 나를 보며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연은 아직 태학에 있을 시간이라, 그 전까진 승평과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뭘 하고 있었어?”
“그게…….”
승평이 쭈뼛대며 탁자를 힐끗거렸다. 함께 나눠 먹으려고 가져온 과편을 내려놓으며 탁자를 보니 익숙한 놀이판이 한창이었다. 체스였다.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승평을 보았다.
“이걸 어찌 알고?”
“아버지께서 알려 주셨어요. 그런데…….”
“그런데?”
“아무리 해도 이길 수가 없어서…….”
승평이 시무룩한 얼굴로 놀이판을 바라보았다. 홀로 열심히 공부를 했는지 말이 어지럽게 판 위에 널려 있었다.
“한 번도 이기지 못했어?”
“네. 단 한 번도요.”
승평의 얼굴이 더 시무룩해졌다.
애한테도 져 주지 않는 게 담덕답다고 할까. 승부에는 양보가 없단 말이야.
어린 승평을 앞에 두고서 진지하게 체스를 두었을 담덕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승평도 그래. 제 아버지에게 한 번도 못 이긴 것이 분해서 혼자 연습을 하고 있었다니.
담덕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는데도 승평은 담덕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지금과 같은 승부욕이 특히 그랬다.
어려서부터 담덕을 보고 자랐으니 그를 닮아 가는 건 당연한 일인가?
나는 놀이판의 말을 정리하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럼 나와 같이 고민을 해 볼까?”
“어머니와요?”
“응. 마침 나도 네 아버지를 이겨 보려고 노력 중이거든. 함께 생각하면 좋은 수가 나오지 않겠어? 과편도 함께 먹으면서 말이야.”
과편을 하나 집어 승평의 입에 넣어 주니 아이의 얼굴에 금세 미소가 걸렸다.
“네! 좋아요!”
* * *
내가 승평의 처소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태학을 끝마친 연이 곧장 승평의 처소로 들이닥쳤다.
“저도 같이 할래요!”
나와 승평이 체스에 몰두하고 있는 것을 본 연도 우리의 연구에 합류했다. 연도 체스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연이도 아버지와 이 놀이를 했어?”
“네. 저도 승평처럼 한 번을 못 이겼어요. 그래서 승평이랑 전 이걸 태왕 놀이라고 불러요. 왕을 잡아야 끝나는 놀이잖아요. 놀이판 위에서든, 현실에서든.”
태왕 놀이라. 참으로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나는 아이들의 작명에 감탄하며 연에게 앉을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연은 자리에 앉으며 익숙하게 말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랑 승평은 종종 만나서 같이 수를 고민해요. 매번 아버지께 지기만 하니까…….”
놀이판에 집중한 탓인지 연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더니 결국 입이 꾹 다물렸다.
나는 연과 승평이 너 나 할 것 없이 의견을 나누며 말을 옮기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서로 어색해 할까 봐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두 아이는 친형제처럼 사이가 좋았다.
“어머니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뿌듯하게 두 아이를 지켜보고 있는데 승평이 눈을 반짝이며 내게 물었다.
“응?”
정신을 차리고 되물으니 승평이 놀이판을 가리켰다.
“여기선 어찌 움직이는 게 좋을까요? 형님은 제관을 여기로 움직이는 게 좋다고 하는데, 전 아닌 것 같아요.”
그 말을 듣고 보니 연도 눈을 반짝이며 나를 보고 있었다. 두 아이 모두 내가 제 답을 선택해 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중간에서 난처해진 나는 한참이나 놀이판을 바라보다 제관을 제3의 장소로 옮겼다.
“여기는 어떨까?”
“네에?”
“거기요?”
나를 바라보던 아이들의 고개가 놀이판에 처박혔다. 나는 고개를 빼고 빠르게 수를 가늠해 보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팔을 걷어붙였다.
“좋아. 함께 더 좋은 수를 고민해 볼까? 나도 너희 아버지를 꼭 이기고 싶거든.”
나의 말에 아이들이 든든한 아군을 얻었다는 양 밝은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좋습니다!”
그렇게 태왕 함락을 위한 모자의 작전 회의가 시작되었다.
“이 수는 어떨까요?”
“아니, 내 생각에는 이렇게 두는 쪽이…….”
나는 아이들과 수를 고민하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사고가 자유로운 탓인지 아이들은 종종 내가 생각지도 못한 좋은 수들을 발견해 냈다. 거기에 내가 배운 정석적인 수들을 결합하면 좋은 수가 나올 것 같았다.
“뭘 그리 열심히 하고 있어?”
말없이 놀이판을 빤히 보며 고민에 빠져 있던 우리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얼굴을 확인하니 담덕이 허리를 숙여 놀이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 돼요, 안 돼!”
“이건 비밀이에요!”
담덕의 등장에 연과 승평이 펄쩍 뛰었다. 연은 손을 뻗어 제 아비의 눈을 가렸고, 승평은 재빨리 놀이판의 말들을 흩어 놓았다.
“도대체 이게 뭐라고 그러는 거야?”
담덕이 황당한 얼굴로 연의 손을 잡아 내렸다. 하지만 이미 놀이판은 깨끗하게 정리가 된 뒤였다.
“날 빼고 재미있는 놀이를 하고 있었나 봐?”
“아뇨. 아무것도 안 했어요. 정말요.”
승평이 어색하게 웃으며 담덕의 말을 부정했다. 눈에 띄게 어색한 태도에 담덕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
“네!”
승평은 제 아비를 속여 넘겼다고 생각했는지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연은 담덕의 눈치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의 작당이 모두 들켰다는 걸 깨달은 것 같았다.
나는 한숨 쉬는 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덕이 이곳에 찾아온 이유를 짐작해서였다.
“기별이 왔어?”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담덕에게 물었다. 얼마나 체스에 집중을 했던지 어느새 해가 완전히 떨어지고 있었다.
“응. 한바탕 난리가 났어.”
“의원이 알아차리지 못했구나.”
“그래. 네 노력이 헛되지 않았어.”
이제 남은 것은 빈소가 차려지길 기다려 영을 몰래 데려오는 것뿐이었다.
나는 연의 어깨를 토닥이며 슬쩍 눈치를 주었다. 눈치 빠른 연이 나의 뜻을 알아채고 승평에게 손을 내밀었다.
“승평, 밖에 나가서 놀자. 활 쏘는 법을 알려 줄게.”
승평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연의 손을 잡았다. 처소를 빠져나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담덕에게 물었다.
“지설이 영이를 무사히 데리고 나오면 어떻게 할 생각이야?”
담덕이 나의 의도를 모르겠다는 듯 두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영이는 이제 공식적으로 죽은 사람이 될 거야. 숨어 살 것까진 없지만, 그래도 국내성은 떠나야겠지. 그럼 지설 님도 함께 떠나야 하는데…….”
나는 조심스럽게 담덕에게 물었다. 지설은 그의 소중한 측근이었다. 근위대장으로서 담덕을 지킬 뿐만 아니라, 전쟁 계획을 세우는 데에도 많은 힘이 되었다.
그런 사람이 국내성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었다. 담덕으로서는 큰 손해였다.
“아. 그 부분이라면 이미 생각해 뒀어.”
“지설이 떠나도 괜찮다는 말이야?”
“그런 생각도 없이 이 계획을 허락했겠어?”
어렵게 물은 말이었는데 생각 외로 담덕은 대수롭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의아해져 그를 바라보았다.
“서운하지 않아?”
“뭐가?”
“결국 네가 아닌 영이를 택한 거잖아. 오랜 측근의 배신 아닌 배신에 속이 많이 상했을 줄 알았는데.”
“소중한 여인과 함께 하고픈 지설의 마음은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거든.”
담덕이 그렇게 말하며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가볍게 닿았다 떨어진 입술이 민망해 그의 입술이 닿았던 자리를 매만지니 담덕이 웃으며 내 손을 붙잡았다.
“지설은 어렸을 때부터 날 지켜 준 사람이야. 평생 나를 위해서 헌신하라고 할 순 없잖아. 시간이 지났으니 지설도 제 행복을 누려야지. 좋은 사람을 만나 그 여인을 위해 살고 싶다는데 내가 어찌 막겠어? 그리고 꼭 내 곁에 있어야만 내 사람인 건 아니니까.”
떨어져 있어도 지속되는 신뢰. 지설과 담덕은 그런 신뢰를 가질 수 있는 사이였다.
납득해서 고개를 끄덕이자 담덕이 이야기를 덧붙였다.
“신라로 보낼까 해. 비로의 대원으로서 세작 노릇을 하며 잠시 쉬라고 하지 뭐. 세작이라고는 해도 신라는 우리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 반쯤은 휴양인 셈이고…… 나중에 소노부와의 일이 완전히 정리되면 국내성에 돌아와도 좋지.”
물론 지설과 영이 돌아오는 건 먼 미래의 일일 것이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나야 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새로운 근위대장을 구해야겠네. 역시 태림을 생각하고 있어?”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지만…… 5부의 귀족이 아닌 자가 근위대장이 된 사례가 없어. 태림도 그 자리를 원하지 않을 거고.”
“그럼?”
“생각해 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제안을 받아들여 줄지는 모르겠군.”
거기까지 말한 담덕이 더 이상 일 이야기는 하기 싫다는 듯 나를 끌어안았다.
“앞으로 급박한 일이 많이 벌어질 거야. 그때까지 조금 쉬자. 일이 시작되고 나면 더 이상 여유가 없을 테니까.”
“응.”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담덕을 마주 안았다. 익숙한 체향과 온기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 * *
소노부의 아가씨가 급사(急死)했다는 소식에 국내성이 발칵 뒤집혔다.
몸이 약하다는 소문이야 예전부터 돌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녀가 이렇게 갑자기 세상을 떠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영은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소노부의 아가씨였다. 모두들 고추가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건강하게 만들 것이라 믿었다.
빈소는 생각보다 늦게 차려졌다. 영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한 해서천이 넋을 놓고 난동을 부린 탓이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의 입을 타고 그가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다 결국 쓰러졌다는 이야기가 흘러 나왔다.
그 광기가 소중한 딸을 잃었기 때문인지, 저를 권력으로 이끌어 줄 다리를 잃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그가 기력을 잃고 쓰러진 후에야 영의 빈소가 차려졌다.
소노부는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조용히 빈소를 꾸렸다. 부모보다 먼저 죽은 자식의 장례는 간소하게 치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생각보다 늦어지는 일 진행에 나는 조금 초조해졌다.
맥과 호흡이 옅은 상태를 오래 유지하면 몸에 무리가 많이 간다. 영처럼 원래 건강이 좋지 않던 사람이라면 그 정도가 더 컸다.
그것까지 고려해 몸을 보하는 약재도 함께 넣었지만, 어쨌든 빨리 해약을 써 영을 깨우는 것이 중요했다.
다행히 지설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빈소가 차려진 그날 밤을 노려 비로의 대원들과 소노부로 향했다.
해서천이 앓아누운 덕에 일은 쉬웠다. 소노부는 전반적으로 어수선했고, 빈소의 경계도 형편없었다.
지설은 손쉽게 계획을 성공시켜 영을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계획이 모두 마무리된 건 아니었다.
내가 준비해 준 해약을 먹고 영이 무사히 깨어나는 것. 그것이 계획의 완성이었다.
영이 무사히 깨어나면 두 사람은 배를 타고 신라로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내가 떠날 때와 똑같은 길이었다.
이번에도 배편은 운이 준비했다. 우리는 이곳을 만남의 장소로 정했다.
나는 두 사람이 무사히 빠져나왔다는 소식에 곧장 나루터로 향했다.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해 각종 약재와 침통까지 챙긴 뒤였다.
담덕과 태림도 나와 함께 은밀히 궁을 빠져나왔고, 운은 두 사람과 함께 이곳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멀리서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이 늦은 밤 나루터를 찾을 사람은 지설 일행뿐이었다.
나는 반갑게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지만, 가까이 다가온 사람들의 얼굴이 밝지 않았다.
“우희 님.”
지설이 심각한 얼굴로 나를 불렀다. 그제야 지설의 등에 업혀 있는 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영의 두 눈은 굳게 닫혀 있었다. 달빛 아래 드러난 얼굴도 창백했다,
“깨어나지 못했군요.”
내 얼굴도 지설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지설이 더욱 심각해진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약을 먹였는데 차도가 없었습니다. 여전히 죽은 사람처럼 맥이 약하고 호흡이 없습니다.”
나는 손을 뻗어 영의 코 아래에 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지설의 말처럼 호흡이 거의 없었다.
예민한 의원의 감각에는 미약한 숨이 느껴졌지만, 사람 살피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자들은 숨이 없다고 오해할 만한 정도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려놓았다.
“미약하지만 숨은 제대로 쉬고 있어요. 아무래도 빈소를 차리는 게 늦어져 내 예상보다 약이 더 많이 퍼진 것 같아요.”
“그럼…….”
지설과 운이 불안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당황하면 모두가 흔들릴 것이다.
의원은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해야 했다. 특히 환자의 상태가 좋지 않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나는 일부러 더 당당하게 가슴을 펴며 지설에게 지시를 내렸다.
“우선 영이를 바닥에 눕혀요. 자세히 살펴봐야겠어요.”
“네.”
지설이 재빨리 나의 지시에 따랐다. 옆에 있던 운은 제 겉옷을 벗어 바닥에 폈고, 지설은 그 위에 영을 눕혔다.
나는 그 옆에 앉아 영의 손목을 붙잡았다. 맥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맥이 약해.
손으로 강하게 눌러도 맥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호흡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초오의 효능에 눌려 있는 것이다.
나는 준비해 온 수통을 꺼내 그 안에 든 감두탕(甘豆湯)을 영에게 먹였다.
감두탕은 흑두(黑豆)와 감초(甘草)를 배합해 만든 탕약으로, 각종 독약의 해독과 당뇨에 많이 이용되어 지금 영에게 꼭 필요한 약이었다. 처음 지설의 손에 건네주었던 약도 감두탕이었다.
초오의 양을 가늠하여 준비한 감두탕이었는데, 생각보다 중독 시간이 길어져 해약의 양이 부족해진 모양이다. 예상보다 더 오래 중독 상태에 있었으니 탕약만으로는 부족했다.
침으로 독기를 더 빼내야겠어.
침을 놓으면 기혈 순환이 촉진되어 탕약이 독기를 몸 밖으로 밀어내는 것을 돕는다.
나는 머릿속으로 혈 자리를 정리하며 영에게 준비한 감두탕을 모두 먹였다.
뒤이어 품에서 침통을 꺼내니 작은 긴장이 몰려왔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시술하는 건 신라에서 귀부인들을 치료해 준 후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미 나는 독을 몰아내기 위해 시침(施鍼)한 경험이 있었다. 백제의 포로로 끌려가 아신을 치료할 때였다.
망설임은 없었다. 나는 익숙하게 눈으로 혈 자리를 찾았다.
먼저 다리의 족삼리(足三里).
침을 놓기 위해 영의 치마를 걷어 올리기 시작하니, 내가 치료하는 모습을 초조하게 지켜보던 사내 셋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당황해서 뒤돌아섰다.
“그런 일을 하기 전에 경고 정도는 하십시오!”
지설이 불만스럽게 외치며 뒷목을 매만졌다. 돌아서 있었지만 목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어 그의 얼굴이 어떨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겨우 다리가 드러난 걸 가지고 왜 그래요?”
“겨우 다리라뇨.”
나의 말에 지설이 투덜거렸다.
짧은 바지도 잘만 입고 다니는 대한민국 사람들과 달리 이 시대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리를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다리를 드러내는 것이 상당히 야릇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래 봤자 다리인데.
여전히 현대의 감성을 지니고 있는 내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건 치료를 위해서거든요? 도대체 무슨 음흉한 생각을 하는 건지.”
내 말에 그렇지 않아도 벌겋게 달아올랐던 지설의 목이 더 붉게 물들었다.
저기서 사람 몸이 더 붉어질 수도 있었구나.
나는 새삼 감탄하며 영의 다리에 집중했다. 종아리 앞쪽의 족삼리에 침을 놓으면 쇠약해진 정기를 회복시킬 수 있었다.
다음은 복부다. 나는 영의 상의를 살짝 위로 끌어 올려 그녀의 배가 드러나게 했다.
이번에 놓을 혈 자리는 배꼽 위의 중완(中脘)이었다. 몸 안에 머무는 사기(邪氣)를 가라앉히는 담음(痰飮)에 좋은 자리이니, 영의 몸에 머물러 있는 초오의 사기를 누를 수 있을 터였다.
마지막은 윗입술과 코 사이의 인중(人中)으로, 정신을 잃은 사람을 각성시킬 때 좋은 혈 자리였다. 우선 영을 잠에서 깨우는 것이 중요했으므로 나는 신중하게 그녀의 인중에 침을 놓았다.
차례로 필요한 자리에 침을 놓은 뒤 영의 얼굴을 살피니 서서히 혈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탕약과 침술의 효과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영의 손목을 붙잡아 맥을 확인했다. 확실히 처음 짚었을 때보다 선명해졌다.
“점점 나아지고 있어요. 곧 눈을 뜰 수 있을 거예요.”
소설 속 줄리엣처럼 개운하게 눈을 뜨지는 못할 것이다. 약한 몸을 강한 약재로 다스렸으니 한동안 기운을 차리기 힘들 터.
나는 침을 거두고 영의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지설에게 따로 준비해 온 약첩을 건네며 당부했다.
“영이가 한동안 기운이 없을 거예요. 아침저녁으로 이 약을 달여 먹이세요. 그럼 닷새 안에 평소와 같은 기력을 회복할 거예요. 추운 자리는 피하고, 최대한 몸을 따뜻하게 해 줘야 하고요.”
지설은 약첩을 받아 들며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는 영을 힐끗거렸다.
“잘된 겁니까?”
“네. 혈색이 돌아오는 건 사기를 제대로 다스리고 있다는 증거거든요. 곧 눈을 뜰 수 있을 거예요.”
나의 말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에 누운 영이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지설과 운이 한달음에 그녀 앞으로 달려 왔다.
“아가씨.”
“영아.”
양쪽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영이 혼란스러운 듯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렇게 두어 번 눈을 깜빡이자 희미하던 그녀의 눈동자가 금세 선명해졌다.
“지설 님? 오라버니? 그리고 우희와 폐하…….”
두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영의 시선이 나와 담덕을 지나쳐 주변을 살폈다. 어두운 나루터의 풍경을 본 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제대로 빠져나온……!”
하지만 갑작스럽게 몸을 움직이는 건 아직 무리였다. 일어나다 말고 쓰러질 듯 휘청거리는 영을 지설이 재빨리 붙들었다.
“조심하십시오.”
“어, 음, 네…….”
지설의 몸에 기댄 영이 붉어진 얼굴로 허둥댔다. 그 모습에 운의 눈이 미묘해졌다.
“죽었다 살아나더니 이 오라비는 보이지도 않는 게냐? 나보다 정인의 품에 먼저 안기는구나.”
타박을 하고 있지만 안도감이 섞인 목소리였다. 그 말에 영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그, 내가 안기고 싶어 안긴 것이 아니고……”
“됐다. 다 큰 누이를 보내 줄 때가 된 거지. 평생 끼고 살 수는 없잖느냐.”
운이 픽 하고 웃으며 영에게 작은 보따리를 내밀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보따리를 건네받는 영을 향해 운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급하게 나오느라 아무것도 챙기지 못했을 듯하여 내가 대신 짐을 꾸렸다. 중요해 보이는 것은 전부 넣었는데……”
말을 하던 운이 영의 옆에 선 지설을 슬쩍 바라보았다.
“혹 부족한 것이 있거든 지설 님께 사 달라고 해라.”
영에게 말하는 것처럼 입을 뗐지만 사실은 지설에게 하는 말이었다. 제 누이를 잘 보살펴 달라는.
그것을 알아챈 지설이 고개를 숙였다.
“……걱정 마십시오. 부족함이 없게 할 겁니다.”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두 사내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멍하니 보따리를 바라보던 영의 눈이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정들었던 고향을 떠난다는 실감이 나는 모양이었다.
“오라버니.”
울상이 되어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지설과 기 싸움 아닌 기 싸움을 벌이던 운이 영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보따리를 꼭 껴안은 영이 운의 품에 뛰어들었다. 운은 영을 끌어안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상당히 복잡한 얼굴이었다.
“좋은 사람을 만나 떠나면서 왜 울어?”
“하지만 오라버니는 남을 거잖아.”
영의 말에 운이 입을 꾹 다물었다.
“같이 가면 안 돼? 오라버니도 아버지에 대한 기대는 접은 지 오래잖아. 그러니까 우리끼리 함께……”
“난 여기서 할 일이 있어. 떠나지 않는다.”
그 말에 영이 운을 밀어내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혹시 날 위해서야? 아버지가 오라버니를 찾아 나서면 함께 있는 나까지 들킬까 봐, 그래서 이곳에 남아 방패를 자처하는 거야?”
운이 입술을 질끈 깨무는 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날 위해서 이곳에 남는 거야. 내가 지키고 싶은 건 모두 여기 있거든. 네가 떠나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믿을 만한 사람이 곁에 있으니 괜찮아. 지설 님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거든.”
영의 머리를 쓰다듬던 운의 손이 그녀의 어깨에 내려왔다.
한참이나 말없이 영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고 있던 운이 곧 싱긋 웃으며 나루터의 배를 가리켰다.
“이제 길을 떠나야지.”
운의 말에도 영은 움직이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이며 눈물만 뚝뚝 흘릴 뿐이었다.
“왜 그래? 다시 만나지 못할 사람처럼. 우린 언제든 만날 수 있어. 이곳 상황이 정리되면 내가 널 보러 신라로 갈게.”
“응.”
“내가 신라에 꽤 오래 있었거든. 그래서 그쪽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어. 아, 맛있는 국밥 만드는 집도 있는데. 다음에 같이 가자.”
“응.”
“그사이에 지설 님과 좋은 소식이 있어도 좋고. 나도 드디어 조카님을 보려나?”
“응.”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운의 말에 대답하던 영이 무엇인가 이상한 것을 깨닫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을 좌우로 굴리며 한참이나 대화를 복기하던 영이 대화의 내용을 깨닫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오라버니!”
달아오른 얼굴로 제 가슴을 툭 치는 영의 손길에도 운은 넉살 좋게 웃을 뿐이었다.
“제신이 매번 조카님들 자랑을 하는 바람에 꽤 부러웠던 참이거든. 난 몇 년이 지나야 귀여운 조카님을 얻으려나?”
“그, 그만하라니까!”
영이 지설의 눈치를 살피며 운의 팔을 잡아당겼다. 이미 지설의 얼굴도 영처럼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색한 남녀를 앞에 두고 다른 사람들만 웃음이 터졌다. 덕분에 두 사람은 한결 풀어진 분위기 속에서 배에 오를 수 있었다.
“건강해라. 그럼 언제든 만날 수 있으니까.”
“서신은 주고받을 수 있지?”
“그럼.”
운의 확답에 영이 한결 안심한 얼굴로 배에 자리를 잡았다.
지설은 그런 영을 보며 운에게 고개를 숙였다. 운도 말없이 고개 숙이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말 한마디 오가지 않았지만 그걸로 충분해 보였다.
이번에는 지설이 나와 담덕 앞에 섰다.
“떠나는 걸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근위대장이라는 무거운 직위를 이렇게 가벼이 내려놓아 죄송합니다.”
“허락이라니. 내가 자네를 좌천시키는 거야. 매일 잔소리만 하는 사람을 근위대장으로 두기가 괴로워서. 신라로 가면 지금보다 급료도 더 줄어든다고. 건사할 식구는 늘었는데 급료가 줄어드니…… 감사할 입장이 아닌 것 같은데.”
지설의 마음이 편하라고 일부러 하는 말이었다.
“참으로 폐하다우신 작별 인사네요.”
픽하고 웃던 지설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고마움을 담아 눈인사를 해서 나도 웃어 주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태림뿐이었다. 오랫동안 동료로 함께해 온 두 사람도 이제는 헤어져야 했다.
“자네에게 홀로 무거운 짐을 맡기게 되어 미안하네. 부디 폐하와 황후마마를 잘 지켜 줘.”
“저 혼자도 문제없습니다.”
담백한 대답에 지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니. 그렇게 말하면 조금 서운한데.”
물론 농담이었다. 지설은 태림과 짧게 포옹하며 서로의 등을 토닥인 뒤 영이 기다리고 있는 배로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모두 배 위에 오르자 기다렸다는 듯 배가 뭍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영은 난간에 서서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런 그녀의 허리를 지설이 단단히 끌어안고 있었다.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마침내 배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야 두 사람이 멀리 떠났다는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떠났네요.”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리자 운 역시 작게 말했다.
“그렇군요. 떠났네요.”
운은 배가 사라진 방향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운을 보며 담덕이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누이와 함께 떠날 줄 알았는데.”
담덕의 질문에 운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영이에게 말했던 것처럼, 제가 지키고 싶은 건 전부 여기에 있으니까요. 그게 무엇이든.”
도대체 운이 지켜야 할 것이 뭘까?
궁금했지만 담덕은 이미 답을 아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 제안을 거절하지 않겠군. 자네가 누이와 함께 떠날 줄 알고 꺼내지 못했던 말이지만, 이곳에 남을 거라면 거리낄 것이 없지.”
의미 모를 미소를 지은 담덕이 제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풀어내 운에게 내밀었다. 근위대장만이 지닐 수 있는 검으로, 지설이 직위를 내려놓으며 담덕에게 다시 돌려준 것이었다.
“자네가 다음 근위대장이 되어 주겠나?”
운이 검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제안이 아니라 명령이신 것 같은데요.”
“그렇게 들렸다면 어쩔 수 없고.”
담덕은 어깨를 으쓱거렸고, 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검을 빤히 보던 운이 무릎을 꿇어 그가 내미는 검을 받았다.
“태왕의 명을 받듭니다.”
* * *
지설은 와병(臥病)을 핑계로 근위대장의 직위를 내려놓았다. 몸이 좋지 않아 요양을 하기 위해 시골로 떠났다는 것이 공식적인 사임의 이유였다.
건강하던 근위대장이 갑자기 병에 걸린 것을 의심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 뒤에 들려온 충격적인 소식이 그런 의심을 덮어 주었다. 소노부의 장자가 새로운 근위대장이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근위대장은 두말할 것 없는 태왕의 최측근이었다. 한데 태왕과 끊임없이 대립하던 소노부의 장자가 그 자리에 올랐으니 여러 귀족들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평소라면 소노부가 발칵 뒤집혔을 테지만 그들은 지금 내부 문제만으로도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영의 죽음으로 야심을 품었던 혼담이 물 건너간 데다 빈소가 불타는 바람에 시신조차 건지지 못했다.
더 나쁜 것은 수장인 해서천의 상태였다. 연이은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그가 앓아누운 탓에 집안을 이끌 사람이 없었다.
고운에게 서신을 보내 물으니, 영의 죽음 이후 소노부와의 연락도 완전히 끊어졌다고 했다. 아마 해서천의 건강 문제로 정신이 없어서일 것이다.
고추가를 대신해 해사을이 집안을 수습하고 있었지만, 애초에 한 집안을 이끌 능력이 없는 자였다.
소노부는 누가 보아도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과 대립하는 담덕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내부의 일이 진정되자 외부의 문제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바로 전쟁이었다.
고구려는 1년 동안 꼬박 후연과의 전쟁을 준비했다.
무리하게 끌어 썼던 군량을 회복했고, 비수기에 움직이느라 체력을 많이 소모한 용사들에게도 충분한 휴식을 주었다.
그리하여 새로 밝아 온 영락 14년. 고구려는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결론을 내리고 후연과의 전쟁을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우리에게는 긍정적이게도, 그 무렵 후연은 여전히 두 미인에 푹 빠진 황제의 향락으로 시끄러웠다.
모용희는 부씨 자매의 언니 융아를 소의로, 동생 훈영을 황후로 책봉했다.
다로가 후연의 황후가 되다니.
그 소식을 제신이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여러모로 마음이 복잡하겠지.
나는 그를 궁으로 초대해 오랜만에 술을 기울였다. 마침 술이 필요했던지 제신은 사양 않고 내가 따르는 술을 받아 들었다.
지난해 고운과의 협상을 위해 후연에 방문했을 때 제신과 다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아직까지 묻지 않았다.
그 일이 두 사람만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데다, 후연에 다녀온 후로 제신의 얼굴이 편안해 보여 일부러 물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를 편안하게 한 긍정적인 결론이라면 무엇이든 좋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로가 황후가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어졌다.
“이대로 둘 셈이야?”
내 질문에 제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대로 두지 않으면 어떻게 하는데?”
“지설과 비슷한 수를 쓸 수도 있지. 훈영은 죽은 것으로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멀리 떠나서 다른 사정은 잊고 행복하게 사는 거야.”
“다른 사정은 잊고 행복하게?”
제신이 술잔을 비우며 되물었다. 내 말이 썩 우습다는 얼굴이었다.
“나도, 다로도 그런 것이 불가능한 사람들이다. 천진한 소노부의 아가씨나 반듯하게만 살아온 순노부 근위대장님에게는 가능했겠지만 말이야.”
그렇게 말한 제신이 빈 잔을 내 눈 앞에 대고 흔들었다.
“채워 주지 않을 셈이냐?”
나는 재빨리 그의 잔을 채우며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럼 후연에서 다로와 만나기는 했다는 거네?”
“만났지. 만나서 긴 이야기를 했어.”
제신이 가득 찬 잔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후연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이 분명했다.
“다로와 나 사이에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더구나.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상처 받았지. 이 모든 것을 어찌 잊을까.”
“상처 받은 사람이 괜찮다고 해도? 그래도 잊을 수 없어?”
“응. 상처 받은 사람이 괜찮다고 해도 잊을 수 없어. 그게 나란 놈인데 어쩌겠냐. 내가 뒤끝이 좀 길다.”
거기까지 말한 뒤 한참이나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제신이 잔을 한 번에 비우며 미간을 찌푸렸다. 제법 쓴 술이라 아무리 술에 강한 제신이라도 입에 받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생에는 인연이 아니었던 거야. 시작부터 잘못된 인연에 아름다운 끝을 기대할 수는 없지 않겠니.”
“하면…….”
“다로를 나의 세작으로 곁에 둔 건, 우희 네가 간파한 것처럼 그녀에게 미련이 있었기 때문이야. 나쁜 것이 그리 많았는데도 좋았던 시절에 대한 기억이 너무도 강렬하여 차마 손을 놓지 못한 게지.”
제신이 씁쓸하게 웃으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우린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고, 함께 앞날을 고민했어. 그러다 인정했지. 우리 둘 다 과거를 잊고 살 만한 깜냥은 없다고.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잖아?”
제신은 스스로 술병을 들어 제 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흘러넘칠 듯 위태로운 술이 꼭 그의 마음 같았다.
“서로를 놓아주기로 했다. 다로는 다로의 인생을, 나는 나의 인생을. 서로를 붙잡는 건 그만하자고 말이야.”
“그게 가능해?”
“당장은 힘들겠지. 하지만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그래서 아직은 술과 술을 함께 나눌 친구가 필요한 것이고?”
“그렇지.”
제신이 씨익 웃으며 잔을 들었다. 나 역시 허공에 잔을 들어 건배하며 그와 다로의 마음을 위해 기도했다.
스스로의 말처럼 제신은 뒤끝이 길다. 그건 다로도 마찬가지였다.
제신과 다로는 성격이 비슷하다. 그러니 두 사람 모두 제 마음을 오랫동안 안고 살 것이다.
그 안에는 과거에 얻었던 상처와 죄책감도 함께 있겠지.
나는 복잡하게 버무려진 그 감정이 어서 빨리 두 사람의 가슴속에서 비워지기를, 그리하여 그 빈자리에 새로운 봄이 오기를 바라며 술잔을 비웠다.
부디 그날이 멀리 있지 않기를.
* * *
후연과의 전쟁을 준비하느라 북쪽에 신경을 기울이고 있던 우리에게 의외의 소식이 들려왔다. 백제와 왜가 서쪽 대방(帶方) 지역의 석성(石城)을 침략해 온 것이다.
지난 전쟁의 패배로 고구려의 영원한 노객이 되겠다 맹세했던 아신은 이를 가볍게 무시하고 또다시 왜와 손을 잡았다. 참으로 끈질긴 침략이었다.
담덕은 처음부터 아신의 맹세를 믿지 않았다. 적에게는 한없이 의심의 날을 세우는 것이 그의 성정이었다. 즉위하면서부터 쉴 새 없이 치고받았던 상대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때문에 비로는 태왕의 뜻을 받들어 백제와 왜를 향한 감시를 늦추지 않았다. 이미 비로 내부에서는 2년 전부터 백제와 왜의 움직임이 마음에 걸린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영락 12년에는 백제가 왜에 사신을 보내고, 그다음 해인 영락 13년에는 왜가 백제에 사신을 보내더니, 올해에도 선물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평화적인 문화 교류라며 당당하게 고개를 들었지만, 고구려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몇 번이나 우리의 목에 칼을 들이민 상대의 말을 믿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아서, 결국 백제와 왜가 손을 잡고 다시 침공을 감행했다.
이미 크게 제압한 상대의 침략이었다. 담덕은 당황하지 않고 가볍게 친정을 선언했다.
“우리가 후연 공략을 준비한다는 소문을 듣고 뒤를 치려고 한 거겠지. 하지만 지난 전쟁으로 잃은 게 많은 두 나라야. 어떻게든 쥐어짜서 전쟁을 준비했겠지만…… 군세가 대단치는 않을 거야.”
전쟁이라면 늘 불안해하는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하는 말이었다.
후연과의 전쟁을 앞둔 지금 조금이라도 병사들을 잃을 수는 없었다. 훌륭한 지휘관이 병력을 이끈다면 손해를 배로 줄일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담덕이 내릴 결정은 뻔했다.
담덕은 직접 전쟁터에 나가 백제와 왜를 물리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밖으로 나설 때마다 불안해지는 나로서는 반갑지 않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담덕은 태왕이었다. 자신이 결정을 내렸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나의 이해를 구하고자 했다.
언제나 나를 향하고 있는 담덕의 배려가 고마웠다. 나는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알아. 우리 폐하께서 왜 직접 나서야 하는지,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 나도 다 알아.”
크고 단단한 손이었다. 작고 여린 내 손과는 완전히 달랐다.
나는 이제 담덕에게 전쟁터에 나가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따라가겠다는 말도, 다치지 말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할 일을 찾아 나설 뿐이다. 군대에 필요한 약재를 살피고, 출정 전까지 담덕과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애썼다.
담덕의 손 곳곳에 박인 굳은살을 부드럽게 쓸어내리자 그의 어깨가 흠칫거렸다.
“연우희.”
담덕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정수리에 닿는 시선이 뜨거워 담덕의 손을 바라보고 있는데도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부추기는 거야? 난 그런 거였으면 좋겠는데.”
“잘됐다. 나 지금 부추기고 있는 거 맞거든.”
“부추기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알고 있겠지?”
“응. 당연하지?”
“……너 참으로 많이 달라졌다, 연우희?”
“글쎄…… 이게 다 누구 덕분인지.”
“설마 내 덕분이라고?”
“설마가 사람 잡는다던데.”
연이어 나온 대답 때문이었을까. 머리 위에서 담덕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곧 담덕의 손이 내 턱을 붙잡아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시선이 높아져 담덕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그의 입술이 닿았다.
턱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자 자연스럽게 내 입이 벌어졌다. 담덕은 그 사이를 익숙하게 헤집고 들어와 내 안을 채웠다.
담덕의 입맞춤은 다정하지만 어딘가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내 안의 모든 곳에 닿아야겠다는 듯, 꼭 나를 집어삼킬 것처럼 강렬했다.
턱을 붙잡고 있던 손이 뒷목을 단단히 붙잡고, 다른 손은 천천히 등을 타고 내려와 허리를 바짝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담덕과 몸이 맞닿았다. 담덕의 몸은 손만큼이나 나와 다르다. 나와 달리 크고 단단해서 닿을 때마다 완전히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서로의 숨이 누구의 안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 뒤섞였다. 내 입안인 것 같기도, 담덕의 입안인 것 같기도 했다.
서로가 너무 가까워서 그와 나의 경계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경계를 확인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나를 단단히 붙잡은 팔을 잡자, 내가 밀어내려 한다고 생각했는지 그가 더 강한 힘으로 나를 끌어안았다.
도망칠 수 없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강하게 나를 붙잡는 그의 몸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나도 도망칠 생각은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내 마음을 읽었는지 담덕이 내 목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여린 살을 예민하게 훑고 지나간 손이 옷깃에 걸렸다. 그가 손에 걸린 옷깃을 잡아당기며 내게서 살짝 떨어져 나갔다.
“이거, 이제 필요 없지? 응?”
입술이 맞닿은 채로 담덕이 물었다. 속삭임에 가까운 질문이었다.
숨결이 닿을 때마다 입술이 간지러웠다. 입술에서 시작된 간지러움은 금세 온몸으로 퍼졌다.
이제 서로에게 뭐가 필요한지는 담덕도,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번에는 내가 먼저 그의 아랫입술을 베어 물었다.
맞닿은 담덕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갔다.